역사교훈
로마史Digest 제국편-25-
*먼 길을 돌아서 카에사르가된 少年 옥카비아누스와 명콤비 아그리파의 탄생
생전의 카에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족한 군사적 재능을 보완해 주기 위해 동갑내기 아그리파를 보좌역으로 붙여주었다. 지금도 어느 화실에서든 볼 수있는 데생용
아그리파 석고상의 주인공이다.
(군사재능을 갖춘 아그리파, BC.31년 Actium海戰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연합군을 격파하고 내전을
종식시켰다.)
로마제국의 밑그림을 그린 카에사르의 深謀遠慮의 작품이 후계자로서의 옥타비아누
스- 아그리파의 명콤비 결연이었다. 이들 둘의 相補관계는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이어
진다.
카에사르추모 체육대회 이후 제아무리 명성이 올라갔다해도 30세가 정치활동의 출발선이 되는 로마사회에서 18세짜리에게 원로원 의석은 꿈에도 생각못할 일이었다.
카에사르의 유지를 계승한다고 공언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암살자들과 타협을 하는 등 소신없는 안토니우스를 지켜 볼 수밖에 없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귀국 4개월 간에 착실히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하고 있었다.
카에사르의 옛측근들뿐만 아니라 카에사르의 직속 부하였던 베테란병사들의 마음까지 사서 그의 주변을 다졌다.
그런 옥타비아누스를 자기 쪽에 끌어들이면 쫓겨나간 공화주의자 브루투스를 귀국시
키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판단한 키케로가 안토니우스 탄핵연설에 열을 올렸다.
안토니우스보다는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 재건에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키케로는 안투니우스를 향해 <육체가 건장할 뿐인가. 타고난 무교양인으로 술에 취해 천한 창녀와 차마 입에 담지못할 소동이나 벌이는 짓 말고 하는 짓이라고는 몰상식한 검투사 같은 사내>라고 맹비난을 퍼붇는다.
옥타비아누스에게 들으라는 안토니우스 비난이었다.
둘을 갈라놓고 옥타비아누스를 받드는 쪽이 추방된 암살자들을 불러들여 공화정 재건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키케로의 안토니우스에 대한 소위<필리피케 탄핵> 연설은 BC.44년 9월부터 무려 14회나 이어졌다.
표면상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던 <3월 15일> 이후의 정세가 급변하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기회가 왔다.
그리스로부터 카에사르가 파르티아원정에 선발대로 집결시켜 놓았던 병력이 귀국한
것이다. 4월에 귀국한 옥타비아누스 일행의 소속 군단이었다.
이 병력을 수중에 넣어야겠다는 것이 안토나우스의 야심이었다.
군단이 상륙한 반도 남단 브린디시에 달려가 카에사르의 금고를 털어 돈을 뿌리며
병사들을 회유했지만 태반의 병사가 이를 거부하고 카에사르가 후계자로 지명한
사람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것은 안토니우스에게 키케로의 탄핵연설보다도 더 큰 타격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군사력 없이는 카에사르 후계자가 될 야망이 물거품으로 살아질 위기를 직감하고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휘하 병력만을 데리고 동해안을 거쳐 루비콘강을 건너 北伊屬州로 향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일부 병력이 루비콩강에서 이탈하여 옥타비아누
스측에 가세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힘을 얻은 것은 키케로였다.
그리스와 시리아에 머물고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의 편지 교환도 빈번해졌다. 北伊에서 안토니우스와 대결 중인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도 격려편지를 띄웠다.
BC.43년 1월 1일 새로 취임한 두명의 집정관 힐티우스와 판사 두 사람과도 친분 있는 키케로는 나이를 망각한채 원로원이 다음 두가지 사안을 의결하도록 요구했다.
1. 옥타비아누스에 公的 지위를 부여한다.
2. 안토니우스에 대해 <元老院 最終勸告>를 발해 그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안은 모두 부결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이 겨우 19세,<원로원 최종권고>는 그 비합법성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수단을 다해 자금을 모아 자기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BC. 43년 3월, 두 집정관과 키케로의 찬동을 받아 독자 군세를 이끌고 北伊속주에
들어가 안토니우스를 제압은 했으나 함께 싸운 두 집정관 모두 전사하고 그 병력은
카에사르 암살자 데키무스 브루투스軍에 합류를 거부하고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달려왔다.
절망한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단신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있는 그리스로 도망가려다가
현지 갈리아人들에게 붇들려 안토니우스의 명으로 살해되었다.
그보다 조금 전에 시리아로 가려던 암살단의 일원 토레보니우스도 살해되었다.
카에사르를 죽인 암살자들 중 둘이, 그것도 카에사르 휘하에서 군단장을 오래 하면서도 카에사르에 칼질을 한 4명 중 2명이 먼저 복수의 제물이 된 것이다.
카에사르가 죽으면서 <브루투스 너도?>한 그 브루투스와 토레보니우스의 목은 로마로 보내져 로마 포럼 연단에 효수(梟首)되었다.
이로써 죽은 카에사르에의 복수는 생전의 카에사르가 무엇보다도 바라지않았던 모습으로 시작된 것이다.
독자의 군사력으로 전투를 할 수있을만큼 군세를 처음 손에 넣은 옥타비아누스였으나 안토니우스를 추격하라는 키케로의 진언을 무시하고 군을 이끌고 로마로 철수했다.
군사력을 배경으로한 이 젊은이의 압력에 대항하지 못한 원로원은 두 집정관의 전사로 공석이 된 집정관에 옥타비아누스의 입후보를 인정했다.
키케로는 19세라는 전대미문의 어린 집정관 출현에 당혹은 했으나 반대하지 않았다.
아직 조정 할 수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BC.43년 8월 시민집회는 압도적 다수로 옥타비아누스를 집정관에 선출했디.
동료 집정관에는 죽은 카에사르이 조카 페디우스를 선출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 자격연령에는 21살이나 모자랐다.
집정관에 취임한 19세 청년이 맨먼저 한 일은 이제까지 안토니우스의 방해로 실현하
지 못한 자신의 養子入籍 절차였다. 시민집회의 찬성을 얻어 최고 신지관(神祗官)이
승인하여 비로서 성립되는 양자입적 승인에 따라 이름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에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다.
시민도 원로워 의원들도 키케로까지도 그를 카에사르라 부르게되었다.
열아홉 살의 카에사르가 처음 한 것은 동료 집정관 명의로 제출된 <<페디우스法>>의
성립이다. 별장에 나가있어 뒤늦게 이것을 안 키케로를 절망시킨 법이다.
이제 카에사르 암살자들에 대한 본격 의법조치가 시작될 차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