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미성년자에 대한 로마시민과 원로원의 의아한 반응은 당시 너무 당연했으리라...
카에사르의 副將으로 신임을 받아온 안토니우스가 내심 후계를 자임해온 그로서 유언장에 자기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실망했으나 부재 중의 후계자를 자처하려는 야심이 일었다.
유언집행 책임자로서 보전책임을 내세워 카에사르의 금고를 자기집으로 옮겼다.
1억 세스텔리우스의 거금이 들어있는 금고를 확보한 안토니우스는 생각이 바뀌어 암살자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암살자들에게 목숨을 부지하려면 국외로 떠날 것을 요구했다.
마르스광장에 집결해 있는 파르티아원정 종군지원병들과 시민들의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가 그들의 살해로 이어질 지경라는 이유에서였다.
암살 2일 후 3월 17일 오후 시민들의 눈을 피해 체리노언덕 위 神殿에서 안토니우스 이하 카에사르파와 암살자 전원이 모인 원로원회의에서 사후책이 숙의되었다.
생전의 카에사르가 준비해 놓은 이듬해 BC.43년도 要職人事案을 알게된 암살자들의 동요는 극심했다. 요직에 암살자들 대부분이 안배된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카에사르측은 <공식선서에 반해 카에사르를 죽인 암살자들의 刑事상의 죄는 묻지않기로한다. 따라서 암살자측은 카에사르의 개혁정치의 계속을 인정한다.>는 타협안을 이끌어내고 카에사르의 國葬에 합의했다.
옥타비아누스 부재 중에 카에사르의 정치계승을 빙자한 후계자 토대구축의 일환이었다.
3월18일은 카에사르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국장일이다.
후세 세익스피어 작 <줄리어스 시저>에는 암살 주모자 브루투스가 먼저 추도사를 했다고 했으나 이는 역사기록 아무데도 없는 소설이야기고 그날 추도사는 로마의 관습대로 부재중의 최측근 옥타비아누스 대신 안토니우스가 추도사를 했다.
추도사에서 군중선동을 했다는 세익스피어의 소설같은 이야기도 꾸며낸 이야기일뿐 추도사 전문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카에사르의 유언으로 로마시민 모두에게
3백 세스텔티우스씩 유증한다고 한 말은 일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추도식이 끝나고 유해를 화장하는 불길이 솟자 이를 지켜보던 카에사르의 베테란병들과 시민들은 가눌 수없는 눈물과 함께 가슴이 달아올랐다.
카에사르가 타오르는 불길에 싸여 지상에서 사라지는 마지마 모습에 암살자들에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유해를 태우는 불길에 횃불을 당겨 든 군중은 암살자들의 집을 향해 달려가는 폭도로 돌변한 것이다.
브루투스 이하 전원이 친지들 집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들은 이날 죽음을 면했으나 암살자 하나 킨브로와 同名異人인 까닭에 애무하게 죽은 친 카에살파 詩人 하나가 있었다.
유해를 태우는 불길도 꺼져갈 무렵 이번에는 폭우가 퍼부었다.
카에사르의 유골은 누군가 거두기 전에 쏟아지는 빗물에 쓸려 내려가고 말았다.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겨우 내전을 평정하고 皇帝廟를 건립했으나 거기에 맨 먼저 들어가야했을 카에사르를 봉안 할 수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카에사르는 묘가 없다.
카에사르의 유해는 로마의 땅속에 스며들었거나 완비된 로마의 하수도를 타고 지중해로 흘러들어갔는지 모른다.
천편일률의 아무라도 갖는 무덤이라면 차라리 카에사르에게는 안갖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서 한 영웅에 대한 모독일까?
-계속-
이후 다녀올 데가 있어 잠시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