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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라면 사람이 한 서약만을 믿는 것은 경솔했다고 할는지모르나
고대 로마人이 생각하는 서약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多神敎민족 로마人에게는 一神敎의 유다人과 달리 신과 계약을 맺는다는 개념은 없었다.
신들은 인간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존재이지 인간 삶의 방식이 옳고 그름을 재정하는
심판관이 아니었다. 법정신의 창조자인 로마인 스스로가 책임을 저야한다.
로마인 누그든지 서약을 주고 받으면 그 말을 믿지 않고서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담보 없이 공적 효력을 지닌 말로만 하는 이른바 紳士協定은 로마법정신의
출발이었다.
카에사르와 암살자들도 함께한 원로원의원 전원 사이에는 카에사르의 신변안전을
전제로 무장호위대를 해산한다는 신사협정이 맺어졌던 것이다.
신사는 두 말이 필요없다.
카에사르는 공적 효력을 지닌 로마의 신사협정에 따라 무장호위대를 해산했으므로
공인의 암살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국가 반역행위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철시상태였다.
자기들은 카에사르가 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라 국가 로마를 더 사랑하기에 카에사르를
놔두고서는 로마인 모두 노예가 되는 것을 방치할 수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중은 브루투스의 연설에 무반응이었다.
암살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변사 소식을 듣고 범인들이 숨은 카피톨리노 언덕의
신전에 달려가 지지를 표명한 킨나(전 집정관)가 이어 등단했다.
그가 카에사르에 대해 비난을 퍼부으며 암살자들의 행동은 로마를 위해 정당하다고
발언을 하자 침묵하고 있던 군중이 폭발했다.
장례식도 필요없이 카에사르의 시체를 테베레강에 던져버리는 것이 옳다고 외친 킨나는
갑자기 함성과 함께 성난 군중이 연단으로 노도처럼 밀어닥치자 브루투스 등 암살자들과 함께 간신히 家奴들의 호위를 받아 현장을 탈출, 다시 신전으로 피신했다.
이무렵, 안토니우스가 사건 발생 24시간 만에 집정관의 입장에서 카에사르의 사저를
방문했다. 스브트라의 사저에는 미망인 칼푸르니아와 원로원의 유력 의원인 망자의 장인 피소가 와있었다.
카에사르의 유언장이 女司祭長에 맡겨져 있다는 피소의 말에 안토니우스가 이를 가져오게해 카에사르 시신이 바라보이는 앞마당에 모인 사람들앞에서 개봉되었다.
미망인 칼푸르니아, 장인 피소, 카에사르의 측근들 힐티우스, 바르부스 그리고 카에사르
없는 로마의 최고위자 동료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개봉된 것이다.
작성일짜 BC. 45년 9월 15일.
6개월 전에 써서 여제사장에 맡겨놓은 유언장이었다.
!. 카에사르의 자산 4분의 3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 옥타비아누스에
물려준다.
2.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퀸토스 페디우스에 양분해 물려 준다.
3.제1상속인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하면 상속권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 돌려준다.
4.옥타비아누스가 상속 받은 경우, 유언장 집행인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크스
브루투스가 되며 양인은 카에사르 유복자가 탄생하면 그 아이의 후견인으로 지명한다.
5.제1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을 받은 시점에 카에사르의 양자자가 되며 아들이 된
그는 카에사르 명을 이어받는다.
6.수도 거주 로마시민에게는 한 사람당 3백 세스테르씩 증여하고 테베레강 서안의
카에사르 소유지 정원도 시민들에 기증한다. 그 집행책임자는 제1상소인으로 한다.
여기 보다시피 상속인 중에는 카에사르를 앞장서서 찌른 동명 이인의 브루투스, 데키무스와 마르크사가 들어있다.
카에사르가 죽으면서 마지막 남긴 말 <브루투스 너도....>.
둘 중 누구를 지적한 것인지 후세인들은 설왕설래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로마인들은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가리킨다.
14인의 자객 모두가 반카에사르파가 아니며 오히려 카에사르의 은헤를 입은 심복들이 다수다.
사실상의 주모자 카시우스 론디우스(41)와 명목상의 주모자 마르크스 브루투스(41)는 폼페이우스에 가담했었으면서도 관용으로 둘 다 법무관에 발탁되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갈리아전시부터 카에사르의 인정을 받아온 유능한 청년장교였고 유언장에 제1상속인이 사양할 경우 혈연이 아니면서도 상속인으로 지명할만큼 총애를 받았다.
수르피티우스 가르바, 미누티우스 바디루스, 가이우스 토레보니우스 3인도 갈리아戰時부터 카에사르군의 군단장을 역임한 심복들이다.
토우리우스 킴브로는 전직이 무엇인지 모르나 카에사르의 천거로 원로원의원이 된 자이다.
한편 리갈리우스, 아퀴라, 루블리우스, 나조, 가이우스 카스카, 프블리우스 카스카 ,
강경 反카에사르파로 유명한 BC.54년 집정관이었던 에노발브스의 아들도 거기에 끼어 9명이 폼페이우스파로 분류된다.
굳이 나눈다면 카에사르의 심복이 5명, 반카에사르파가 9명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카에사르가 한 말,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다를 보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는 명구가 떠오른다.
카에사르 살해에 직접 손을 댄 이들의 동기는 왕정으로의 이행을 저지하고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으로 되돌리고자 한데 있다.
카에사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帝政>이라는 신체제였으나 그것을 <보고싶지 않다>는 그들이 보고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초기 로마의 체제 즉, 당시의 군주국 정체였던 <王政>이었던 것이다.
한편 <제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것일지라도 그것이 시작되게된 동기는 善意에 의한 것이었다>는 생전 카에사르의 관용정신의 바탕을 재음미하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