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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있는 해에 특히 역사소설이나 역사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출판계 여론입니다. 아마도 한 표의 권리행사에 있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하는 경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플로로그
1.카에사르의 <內亂記>에 담긴 제국건설에의 집념
 "Vercingetorix Throws Down His Arms at the Feet of Julius Caesar", 1899, by Lionel Noel Royer
(BC.51년 알레시아요새 공방전서 패한 갈리아 명장 베르친제토릭스가 카에사르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원대한 구상과 빈틈없는 智謀로 帝國의 설계도를 그린 카에사르가 BC.49년 1월 12일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江을 건넘으로써 로마는 마침 내 미증유의 내란에 휩쓸린다.
카에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의 反카에사르파는 싸우지도 않고 전권을 위임한 폼페이우스를 앞세워 로마를 탈출하여 그리스로 도망했다.
아드리아海 연안을 따라 폼페이우스軍을 추적한 카에사르는 두 달만에 사실상 이탈리아 전역을 장중에 넣었다.
다음은 카에사르의 <내란기> 속에 담긴 폼페이우스군과 일진일퇴의 초기 전쟁일기
일부를 초역함으로써 로마사 제국편의 프롤로그로 삼는다.
BC.49(카에사르 51세)
1월 7일
원로원, 카에사르에 대한 최종권고와 함께 폼페이우스에 무제한의 대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가결.한다.
1월 12일
카에사르, 라벤나를 떠나 1개 군단을 인솔하고 루비콘강을 건너<주사위는 던져젔다>고 외치고 국경도시 리미니에 진입한다.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가 합류하여 안코나와 아레쪼 제도시를 지배한다.
1월 17일
폼페이우스, 로마를 탈출하고 키케로에 이어 집정관 마르케루스와 렌토울스도 탈출함으로써 로마는 대혼란에 빠진다.
카에사르에 등 돌린 심복 라비에누스가 카프아에서 폼페이우스에 가담한다.
카에사르, 아드리아해안을 따라 남진하여 22일 폼페이우스군 수비 하의 코르피니오에 무혈입성한다.
2월 25일
폼페이우스, 반도 동남단 브린디시까지 후퇴하여 反카에사르파 전원을 승선시켜 그리스로의 도주를 준비한다.
3월9일
카에사르, 브린디시에 도착했으나 이용 軍船이 전무하여 로마로의 회군을 결심한다..
3월 17일
폼페이우스, 봉쇄를 강행 돌파하여 그리스로 탈출을 시작한다.
카에사르, 사실상 이탈리아반도를 완전 제패하고 이틀 뒤 후 19일 로마로 향한다.
3월 30일
카에사르, 로마로 급행군 중 언론인 키케로를 포르미아의 별장으로 찾아가 양자회담서 중립 유지를 당부한다..
4월 1일
카에사르, 로마城壁 밖에서 열린 잔류 원로원회의에 출석하고 사르디니아島와 시칠리아島를 지배 하에 둔다.
카에사르, 북아프리카속주(현 튀니지)의 제패를 심복 쿠리오장군에, 內政을 법무관 레비도우스에, 대외防衛를 안토니우스에, 아드리아海 제해권 탈환을 안토니우스와 키케로의 사위
드라베트라에 명령한다.
로시우스法 을 성립시켜 北伊屬州 (직전 카에사르 총독 영지)주민에 로마市民權을 부여한다.
4월 19일
카에사르, 현 프랑스령 독립국 마르세이유에 도착, 2개월 여 전투 끝에 폼페이우스군을 제압한다.
6월 22일
카에사르,스페인속주에 진출하여 폼페이우스군과 레리다攻防戰을 편다.
8월 2일
레리다공방전서 폼페이우스군을 완전 해체한다.
9월
가디스에 이어 타라고나와 스페인 全域을 제패하고 바쯔로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도 해체한다.
10월 중순
카에사르, 마르세이유로 돌아와 25일 이를 함락하고 로마로 향한다.
12월 2일
카에사르, 로마에 귀환하여 독재관에 임명되고 寬容(Clemency)의 정치를 펴며 신경제정책을 시행, 다dma해 BC.48년도 집정관에 선출된다.
12월 13일
카에사르, 지난 3월 군선편이 없어 일단 포기했던 폼페이우스 추격을 위해 로마를 출발, 1월 4일 브린디시를 출항 다음날 그리스 서해안에 상륙한다.
이하는 BC.48년 1월 5일 그리스에 상륙한 카에사르군과 폼페이우스군 간의 일진일퇴 공방전 실황을 중계한다.
이기는 會戰이라도 극력 피하려고 한 카에사르는 寬容을 바탕에 깐 제패행진을 이어갔다.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포로라도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석방했다.
루비콘강을 건너며 생사의 주사위를 던지고 반도를 장악한 카에사르는 스페인으로 도주하여 항전을 계속한 폼페이우스군을 토벌하는 싸움에서 전사자를 내기보다 포로로 많이 잡음으로써 동족간의 살상을 피해왔다.
<내가 자유방면한 자가 다시 칼을 뽑아들지라도 그와같은 것에는 마음을 쓰고싶지 않다.
무엇보다 자기자신에 맡긴 임무는 스스로의 생각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어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해서 당연한 일아닌가>
카에사르가 그의 <내란기>에 쓴 신념의 표현이다.
인권선언과 같은 것이다.
인권론이 한창인 오늘날 생각해도 개인의 인권존중 사상은 천 8백년 후의 18세기가 되어 일어난 계몽주의의 전매특허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페인 제압을 왕료한 카에사르가 마르세이유에 돌아아 펼친 공방전은 마치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린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카에사르는 10월 25일 5개월 여만에 마르세이유를 함락하고 주민 모두를 자유인으로 방면한채 다만 주변 영토 대부분을 몰수하여 南佛屬州에 편입시키고 로마로 귀환했다.
그리스로 도주한 원로원파 폼페이우스군을 정벌하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해 1월 4일 35척의 군선에 1만 5천의 重裝步兵과 5백기의 騎兵을 데리고 반도 남단
브린디시항을 출항, 아드리해를 건너 그리스 서해안 오리쿰에 상륙하는데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겨울 난바다여서 폼페이우스측도 해상감시를 소홀히 한 덕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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