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로마사Digest 帝國篇 -16-
(농지개혁을 추진하다 형제가 참살된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위기에 있어서는 낡은 것과 새 것이 交合해서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의 內功을
통하여 정점에 이른다>>
독일 역사학자 브루크하르트가 저서 <세계사의 고찰>에서 한 이 말은 역사는 위대한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나타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타프소스회전에 승리하여 폼페이우스군을 일소하고 아프리카를 뒤로한 BC.46년 4월을
내전종료로 보았을 카에사르에게는 아직 원로원 문제가 남아있었다.
古代史家 아피아누스Appianus도 그의 저서 <내란기>를 그락쿠스Gracchus형제에서부터 붓을 대고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思考하는 카에사르는 覇者 로마가 빠진 混迷상태는
그락쿠스형제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았음이 틀림 없다.
사실 카에사르도 최초 집정관에 취임한 해에 정책화한 가장 중요사안이 그락쿠스형제가 제안하면서 아깝게 젊은 나이로 죽음으로써 중단된 農地改革法이었기때문이다.
사실 백 여년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포에니(한니발)전쟁 승리로 지중해 패권을 잡은
로마가 고도성장 이후 나태해지면서 빠진 로마의 혼미는 개별 정책으로는 이미 해결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가하다는데에 그락쿠스형제 이후의 몇 사람이 감지하게 된다.
로마가 채용한지 오랜 로마 독자의 공화정 자체가 기능하지 못하게된데서 비롯된
혼미라고 본사람들이 나온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스쯔라와 키케로 그리고
카에사르 3인이었다.
로마 독자의 공화정이란 매년 선출되는 집정관 2인을 정점으로하는 행정기구를 선거
를 거치지 않는 엘리트들로 구성된 원로원이 보좌하고 최종 결정은 시민권자 전원이
투표권을 갖는 시민집회에서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 다수가 원로원에 의석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과두정체(origarchy)라 불린다.
포에니전쟁 시대의 그리스인 史家 폴리비우스는 執政官에서 보이는 君主政(monarchy)의 이점과 元老院으로 체현되는 귀족정(aristocracy)의 이점과 市民集會로 상징되는
民主政(democracy)의 이점을 종합한 이상적인 정체라고 찬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집정관 이하의 행정관에 선출된다거나 원로원 의석을 얻는데에도 계급별은 존재하지 않고 누구에 대해서도 기회균등이 주어진다. 그러나 권력 행사만큼은 능력에 따르는 것을 인정하는 시스템이었다.
로마인은 민주정체,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한번도 매료된 적이 없다.
그리스문화가 꽃핀 시절 BC.450년 대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시대의 아테네민주정체도 페리클레스라는 발군의 정치능력을 가진 인물이 지도자였기에 민주정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이후 페리클레스 없는 아테네를 쇠퇴로 몰아간 衆愚정치는 아직 신생국이던 로마로서는취해서는 안될 반면교사였던 것이다.
더구나 로마인은 폴리스라는 도시국가의 체제에 집착한 그리스와는 반대되는 생존방식을 취해왔다. 즉, 정복하면 그 토지나 주민 모두가 정복자인 자기들과 同化하는 노선을 선택하고 있던 것이다. 이 노선이 가는 종착은 늦던 이르던 시민권 소유자의 확대로 이어진다.
민주정이란 유권자 각자의 지력과 판단력의 다소에 따라 기능하느냐 못하느냐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달려가는 우권자가 많고 적고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다.
5백년 이어온 로마 특유의 공화정체는 그리스인 폴리비우스가 찬양할만큼 훌륭히
기능해 왔다. 카르타고의 천재 전략가 한니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도 원로원이
하나가 되어 지휘계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전선 최고사령관이 전사하면 원로원의 인재풀을 통하여 배출해낸 많은 인재 중
골라 즉각 교체사령관에 임명하곤 했다. 로마의 조직력의 승리라해야할 것이었다.
전사자의 비율에서도 시종 최전선에서 싸왔던 언로원 게급이 가장 높았다.
로마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귀족들의 의무도 그만큼 높았다는 의미이며 노블레스
오블이즈의 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시스템에도 생명이 있다.
카르타고를 뉘고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떠오른 로마에 승자의 혼미가 엄습한 것이다.
인간사에 있어 제로에서 일어서는 경우보다도 이때까지는 제대로 기능해온 시스템을
바꿔야할 필료에 쫓기는 경우가 더 어렵다.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을 갖는데 더 익숙해온 사람들의 자기개혁만큼 어려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개혁을 게을리하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새로운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락쿠스형제 이후 로마의 엘리트들의 고민은 실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철권 개혁가 코르넬리우스 스츠라
스츠라도 키케로도 그리고 카에사르도 갱대해진 로마에 통치능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는 일치했다. 그리고 통치담당자인 원로원 계급의 실정은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부적격하다는 점에서도 생각은 같았다. 또 이들 3인 모두 우국지사라는 데에 이의를 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스쯔라는 한마디로 시스템 내 개혁을 단행했으나 아무도 반대를 허용 않는 독재관에 취임함으로써 일종의 위기관리내각을 조직하여 반대파는 죽이고 공직에서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탄압정책으로 일소한 후에 개혁을 단행했다.
BC. 60년 집정관 키케로가 내란음모죄로 전 집정관 카탈리니를 원로원 위원들 앞에서 심문하고 있다.
그로부터 30년 후 키케로는 스쯔라의 반대파 일소로 통치계급을 강화한데에는 반대했다. 로마국가의 현재를 걱정하는 애국자로서는 나무랄데 없으나 국가 개혁을 그의 말을 직역하면 <공적 생활의 정화>에 두었다.
원로원의 입이라 불릴만치 변론술에 능한 이른바 언론가로서 그가 발표한 수 많은 저서로 인간 일반의 도덕률 향상을 통한 계몽적 개혁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가 내건 스로건은 武力 없는 집정관, 토가 모습의 軍司令官 그리고 武를 제압하는 文으로 대표된다.
한편 카에사르는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려 했는가.
BC.46년 이후의 카에사르는 기왕의 스쯔라가 가졌던 거부권 행사에 방해됨이 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정책을 추진 할 수있는 독재관으로서의 절대권력을 수중에 넣은 것이다.
54세를 바라보는 카에사르는 우선 그가 수립하려고 한 신질서의 기조로 <<관용 Clemency>>을 내걸었다.
반대파 사람들의 처벌자 명부 작성을 거부하고 도망갔던 사람일지라도 원하면 귀국을 허용하고 잘못해 몰수했던 재산도 반환해 주고, 희망하면 공직에도 북귀시키는 敵과의 同寢으로 국가로마의 재생에 힘을 보탠다는 생각이었다. 스쯔라의 개혁방법과는 정반대 방법으로 국가개조의 틀을 잡아나갔다.
무력으로 정적을 잠재운 이 카에사르에 대한 많은 로마인들의 바응은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마인끼리 피를 흘리는 일에 많은 러마인들은 지쳐있었던 것이다.
카토의 자살을 두고 카토를 찬미하는 <카토>를 써서 카에사르의 <인티 카토>를 쓰게한 키케로도 이때 카에사르의 관용로선에 찬성하고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온다.
창조를 업으로하는 자는 고독을 일생 질머지고 간다.
그렇다고 한탄할 데도 없다.
아니 한탄할 시간도 없다.
때문에 당초 여섯 살위의 문우이며 서로 대화가 통하는 교양인 간이었던 키케로의 괴롭힘도 잊고 할 일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카에사르는 첫 과업으로 만인 공통 공용의 曆(달력)의 개정에 착수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