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15, 카에사르의 로마 귀환과 장려한 凱旋式
Rome: Ruins of the Forum, Looking towards the Capitol (
지금은 형해만 남은 로마포럼. 그 옛날에 전승장군들의 개선식이 여기서 열렸다.
카토의 자살을 권력에 대한 자유의 항거라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현대에도 많으나 그의 논리에 수미일관하지 못한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카토가 자살한 다음날 카에사르는 우티카에 입성했다.
그는 루키우스 카에사르의 구명탄원의 말도 다 듣지않고 카토가 부탁한 사람들 모두의 안전을 보장함은 물론 다른 폼페이우스파 인사 아무도 처형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카토의 목을 잘라 우티카 광장에 梟首(효수)하지도 않았다.
카에사르는 카토가 공화정 논리의 자유 정신에 반한다고 규탄한 寬容(clemency)의 정신으로 모든 적을 대했다. 아프리카 제패에 3개월이 걸린 카에사르는 우티카에 승장으로 입성 2일만에 배로 더났다.
루비콘강을 건너 폼페이우스 잔당 일소까지, 로마국가의 새 질서수립 환경을 정비한 카에사르는 소수 병력만 대동하고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 두 섬으로 우회해서 로마에 귀환했다. 이탈리아반도 서쪽 지중해의 전략 요충일뿐 아니라 자급자족이 안되는 로마의 주식 小麥 공급원이기도 한 두 섬을 초도시찰하기 위해서였다.
BC.46년 7월 25일 로마에 귀환한 카에사르의 나이 54세, 로마 사나이로서 최고 영예의 개선식을 처음 거행하게 된다.
업적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 미루어온 개선식은 10일 간 4회로 나누어 거행한다. 전승 상대가 4개국이었기 때문이기도했으나 이틀간 거행했던 폼페이우스를 의식한 때문이기도 했다.
제1일에는 갈리아전승, 제2일은 이집트전승, 제3일은 폰토스전승 그리고 제4일에는 누미디아전승의 순으로 거행되었다. 로마인 간의 내전에서 이긴 싸움은 개선식에 해당 되지 않는다고 본 카에사르다.
개선식은 아이디어 풍부한 카에사르지만 옛 전통에 충실한 형식으로 치루어졌다.
개선행렬의 선두에는 원로원 의원이나 정부 요인 등 문민을 앞세워 어디까지나 문관
우위라는 로마인의 전통적 사고를 반영했다.
전리품을 만재한 마차행렬 뒤에는 전투 현장을 생생히 묘사한 그림의 플라카드가 따르고 참전 독수리군단기가 뒤를 잇는다.
패전국 인질들도 그날은 처음 시민에 선보이는데, 제1일에는 갈리아의 패장 베르친제토릭스가, 제2일에는 이집트여왕 아르시노에가, 제3일에는 폰토스왕국 파르나케스의 아들하나가 그리고 제4일에는 누미디아왕 유바의 5세 아들이 볼모로 등장했다.
카에사르의 패자도 함께 사는 관용정책으로 인질 모두가 로마의 명문가정에 입양되어 로마식 교육을 받으면서 살게된다. 다만 갈리아의 베르친제토릭스만은 그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고 보아 후환을 염려하여 개선식이 끝나고 옥에서 처형된다.

"Vercingetorix Throws Down His Arms at the Feet of Julius Caesar", 1899, by Lionel Noel Royer
(BC.51년 알레시아요새 공방전서 패한 갈리아 명장 베르친제토릭스가 카에사르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개선행진이 마르스광장을 출발하여 시내를 관통하며 로마포럼 광장에 이르는 동안 시민에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로마의 諸神이 거주하는 카피토리노언덕 위 유피테르神殿에 도착하는 것으로 퍼레이드는 끝난다.
유피테르신전의 내전에는 개선장군 한 사람만이 들어가 오늘의 이날이 있기까지 主神의 도움에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개선식은 막을 내린다.
개선행진 중에는 관중이었던 시민들도 개선식 후에 베풀어지는 연회에 초대된다.
4회에 걸친 개선식 후의 초대연 테이블이 2만 2천개였다니 그 규모에 놀랄따름이다.
로마포럼 광장과 테베레江가 야외에서 로마의 여름 밤바람도 시원한 夜會의 초대객 수가 6만을 넘었다고 한다. 개선식 부대행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연일 극장과 경기장에서는 연극과 운동경기가 펼쳐지고 4백마리의 사자가 우굴대는 투기장에서는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사자 사냥이 볼거리로 로마시민 모두에 무료 관람되었다.
지중해안 일대를 제패한 로마는 아프리카에서 희귀 동물 코끼리는 물론 처음으로 기린까지 반입해와서 로마인들의 볼거리를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
국가적 경사는 이것으로 끝난게 아니다.
카에사르와 함께 전장을 누빈 장병들에게는 모두 상여금이 지급되었다.
병사 1인당 5천 데나리우스, 백인대장은 1만 데나리우스, 대대장은 2만 데나리우스씩 받고 과거 예가 없던 유족과 상이용사들에게도 응분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로마병의 연봉이 백 40 데나리우스이므로 개선식에서 일시금으로 받은 병사들의 보너스는 35년치 연봉이 된다.
여자와 17세 이하 어린이를 제외한 성인 남자 관중 전원에는 87.5리터의 밀과 3.27 키로의 올리브유가 선물로 주어졌다.
개선식을 성료한 카에사르는 국가로마에 정치상의 신질서 확립과 동시에 실질적 국가개조에 본격 착수한다.
백년에 걸쳐 로마를 괴롭혀온 카르타고는 7백년 역사를 다하고 멸망했다.
로마는 7백년의 역사를 거쳐 지금 환골탈태를 준비하고 있다.
"역사는 때로 돌연, 한 인물 속에 스스로를 凝縮하고 세계는 그 인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위대한 개인은 보편과 특수, 머뭄과 움직임이 한 사람의 인격으로 집약된 존재다." 브루크하르트는 저서 <세계사의 고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