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14, 극렬 反카에사르파 카토의 자살
A statue of Cato the Younger. The
Louvre Museum. He is about to kill himself while reading the
Phaedo, a dialogue of
Plato which details the death of Socrates. The statue was begun by
Jean-Baptiste Roman (
Paris, 1792 - 1835) using white
Carrara marble. It was finished by François Rude (
Dijon, 1784 - Paris, 1855).
(아들 카토는 카에사르가 미워 쫓기는 중 北阿에서 분풀이로 자살을 했다. 49세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들 카토는 아버지 카토의 대를 이어 이름난 원로원체제 고수 강경파로 폼페이우스軍의 북아프리카 본거지 우티카의 방어책임을 맡았다.
카에사르보다 5살 아래의 카토는 원로원 주도의 寡頭政體를 견지해야한다는 소신에는 원로원의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청렴한 인물이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에 포진해 있던 폼페이우스 잔당군이 BC.46년 4월 6일 타프소스會戰에서 카에사르군에 괴멸되고, 기병 1,500기만이 본거지 우티카까지 2백 여킬로 거리를 도주하여 카토와 합류해서 철저저항을 하려다 카에사르가 접근 중이라는 제보에 방어전을 포기하고 패잔병들은 뿔뿔이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적수일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증오해온 카에사르가 우티카에 접근 중이라는 소식에 카토는 극단을 선택했다.
카토가 그리스의 도우라큠으로부터 도주해온 것은 아직 폼페이우스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미 죽었다.
폼페이우스 하의 수뇌들 대부분도 전사했거나 카에사르에 순종을 서약한 처지이다.
이미 카에사르의 천하가된 마당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카토는 카에사르의 친족이지만 폼페이우스派인 루키우스 카에사르를 불러 사후를 부탁했다. 주요 인사들과 그 가족들의 안전을 맡긴 것이다.
폼페이우스의 딸 폼페이아와 그녀의 자식들과 카토자기의 아들 그리고 카에사르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비브루스의 미망인이 된 자기의 딸 보루키아를 데리고 도망가라는 것이 아니라 카에사르를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카에사르가 아무 대가없이 그들을 본국에 송환해 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자신은 카에사르에게 용서를 빌 생각이 없었다.
敵을 용서한다는 특권을 카에사르에게 인정 해줌으로써 적마자도 용서한다는 자부심을 카에사르에 주고싶지 않아서였다.
타프소스회전으로부터 6일이 지나는 4월 12일, 카토는 우티카의 조요 인사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로마人이 사람을 초대하는 만찬은 플라톤의 <饗宴(심포지온)>에서와 같이 침대형 의자에 비스듬히 옆으로 한 자세로 요리와 술을 즐기면서 테마를 정해 토론을 하는 자리를 말한다.
이 대화가 있는 酒宴을 로마인은 그리스어의 심포지온을 라틴어 발음으로 심포지움이라 불렀다. 그 자리에서 토론 주제를 정해 주인이 사회를 보며 초대객들이 토론을 벌
인다.
그날밤 심포지움의 토론 주제로 타프소스회전은 화제에 오르지않았고 오로지 철학적 명제 <自由란 무엇이가>가 집중 논의되었다.
카토는 소크라테스의 예를 인용하여 '스스로 정직한 인간은 죽더라도 자유인간으로 생을 이어간다'고 강조했다.
연회가 긑나고 손님들이 돌아간 뒤 카토는 침실에 들었다.
잠을 잔 것이 아니라 불을 밝히고 플라톤의 <바이돈>을 읽었다.
지금도 교양인들이 찾아 읽는 <바이돈>은 내일 사형을 앞에 둔 소크라테스가 옥중 방문한 제자들과 죽음과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정경을 서술한 철학서이다.
잠시간 읽은 후 카토는 단검을 들어 배를 찔렀다.
펼쳐진 파필루스紙의 책 <바이돈>에 선혈이 튀었다.
그러나 급소가 아니었는지? 즉사하지 않았다.
연회석상에서의 발언으로 미루어 혹시나 하고 밖에서 침실을 엿듣고 있던 아들과 머슴들이 신음소리를 듣고 재빨리 의사를 불렀다.
달려온 의사가 괴로워하는 카토의 상처를 봉합하려하자 카토는 의사의 손을 뿌리치고 제 손으로 뱃속 내장을 헤집어내 숨을 거두었다. 49세였다.
로마인이 다른 로마인을 용서하는 행위는 아무리 소수일지라도 공화정 체제의 로마에서는 시민이면 누구나가 평등권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이상 용납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국정을 담당하는 원로원 의원끼리는 더군다나.....
남을 용서하는 특권을 갖는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공화정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카토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옳다.
法治를 존중하는 로마인으로서 보면 당연한 논리이나 카토는 자기 논리에 일관성을 잃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기 아들과 딸에 대해서도 평등권 논리를 적용했어야지 어찌 권력자에 목숨을 구걸하는 행동을 취했는가이다.
카토의 수미일관하지 않은 예외 행동에 대해 키케로와 카에사르는 각각 <카토>와
<안티 카토> 저서를 내고 찬반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쓰면서 감히 말한다면, 카토의 자살행위는 특히 카에사르를 미워했기에 분풀이로 자기 희생을 통해 앙갚음을 한 경우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