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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훈
13, 카에사르, 폼페이우스 잔당이 기다리는 북아프리카로 出征

한니발이 난 고대 카르타고, 로마의 북아프리카속주였던 지금의 튀니지, 이탈리아 시칠리아島로부터는
海路 불과 2백킬로였다. 그 서쪽이 고대 이름을 떨친 기마민족 누미디아왕국이었다.
차석 副長 안토니우스에 국정 일반을 맡기고 카에사르가 1년 여만에 돌아온 로마사회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군사상 재능을 보인 안토니우스도 역시 정치력 부재로 카에사르가 지향하는 바에 따르지 못했다.
그중에도 폼페이우스와의 파르살루스결전에서 감투한 제10군단병들이 이르킨 종군거부운동이 문제였다.
카에사르가 키케로의 중립유지 확약을 받고 아피아街道로 귀로 중 안토니우스로부터 베테란병들 일부가 무기를 들고 성벽 밖 마르스廣場에 모여 종군거부 스트라이크를 벌이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법무관 살스티우스(후에 역사작가)가 현장에 가서 급료 일시불조건의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병사들은 그를 내쫓아버렸다.
폼페이우스 잔당 처리에 골몰하고 있는 카에사르에게 제10군단병은 정예 중의 정예로 가장 신임을 받아온 병사들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카에사르 자신이 농성 중인
병사들 앞에 나섰다.
연단에 모습을 나타내자마자 카에사르는 머릿말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뭐가 소원인가>?
병사들은 저마다 제대시켜달라고 외쳤다.
그들도 다음에 기다리는 것이 북아프리카 원정이고 자기들을 반드시 필료로한다는 것을 잘 알고하는 억지였다.
제대를 요구하면 카에사르로서는 일시금이나 글료인상 따위의 타협은 없다고 결심했다.
농성중인 병사들에게 던진 두번째 말은 <그렇다면 제대를 허거한다>였다.
예상찮은 카에사르의 대답에 병사들이 들고있던 칼이 땅에 떨어지고 시끄럽던 외침도 조용해졌다. 무거운 침묵이 병사들을 엄습한 가운데 카에사르의 소리만이 주위를 흔들었다.
<시민여러분, 내가 나를 딸아 주는 다른 병사들과 같이 전투를 종료하고 개선식까지 함께 마친 후에 그렇게 해주겠다. 제군은 그때까지 어디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면 된다.>
뜻밖의 일격을 당한 병사들은 소리내어 울기시작했다.
시민 아닌 병사로 돌아오게 해주고, 계속 싸우게해달라고 호소했다.
제대를 조건으로 내건 병사들의 속셈은 급료인상이었다.
평소의 <전우 여러분>이 아니라 <시민 여러분>의 호칭은 그들의 가슴을 울게한 것이다.전우애 없는 총사령관과 병사 사이는 이미 정이 끊긴 남남이기 때문이다.
이 인간심리를 간파한 카에사르의 휴먼코미디로 사태는 일시에 수습되었다.
제10군단을 상여금도 급료인상도 없이 북아프리카 참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코끼리군단을 앞세운 폼페이우스군.
무장으로 전군의 준비가 완료되기를 기다려 행동을 개시하는 스타일과 자기가 먼저 행동하고 군사가 뒤따르게하는 스타일의 두가지 지휘 스타일이 있다.
폼페이우스가 전자이며 카에사르가 후자였다.
카에사르는 통상의 기병 행군속도로 하루도 쉬지 않고 BC.47년 12월 19일 시칠리아의 마르사라에 도착 즉시 승선한채 항구에 대기시켰다.마르사라에 후속 도착한 군담병들에게도 출정 전 휴식같은 것 생각말라는 최고사령광의 암시였다.
옛카르타고에서 기다리는 폼페이우스군의 전력은 10개군단의 보병 3만 5처에 지중해 각지에서 사들인 용병기병대가 9천, 누미디아의 로마식 훈련을 받은 중장보병이 4개군단 2만 5천 그리고 이름난 누미디아 기병이 6천으로 계 보병 6만, 기병 1만 5천이다. 여기에 또 누미디아 코끼리군단 백 30두가 가세한다.
이에 대해 카에사르는 10개군단 보병 3만과 기병 4천이 전부였다.
신병군단 5개, 제9 10 13 14 15군단의 베테란병들이었다. 코끼리는 한마리도 없다.
설상가상 전장은 적지,군량보급도 시칠리아로부터 선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戰記>에 따르면 53세의 최고사령관 카에사르는 그와같은 불리한 여건에는 조금도 개의치않고 자신만만 신뢰와 희망에 차있었다고 했다.
그런 카에사르는 한번도 발을 딛어보지 않은 미지의 북아프리카 어디를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느냐가 문제인데, 보통사람 같으면 시칠리아의 보급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順風이면 하룻밤에 닿을 튀니지만 어디를 생각했을테지만 정 반대였다.
2년 전 그리스에 건너가 도우라큠의 보급기지를 지근에 둔 폼페이우스군을 포위섬멸작전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한 경험을 가진 카에사르는 두번 실패는 없다는 생각으로 적을 보급기지로부터 멀리 끌어내 회전을 유도했다.
북아프리카 상륙지점은 폼페이우스군이 주둔하고 있는 튀니지만의 우티카로부터 2백킬로 떨어진 남쪽의 타프소스 근처 무인지대로 정했다. 병사들은 굳이 적을 멀리하려는 카에사르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최고사렬관의 생각은 달랐다.
코끼리를 구해 동물 습성을 이용한 코끼리 퇴치전술도 직접 연마시키며 회전에 폼페이우스군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적은 움직이지 않았다.
카에사르는 상륙지점에서 북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타프소스를 공격했다.
BC.46년 4월 4일 이른 아침이었다.적에 대한 회전의 미끼였으므로 全力을 쏟을 필요는 없었다.
2백 여킬로 떨어진 누미디아군과 폼페이우스잔당이 대세를 몰고 응전해 왔다.
소수병력으로 일시에 정면으로 대적을 맞는 것은 작전이 아니다.
BC.46년 4월 6일 날이 밝자 카에사르는 행동을 개시했다.
해안도시 타프소스의 내륙쪽은 좁은 지형을 격해 潟湖가 펼쳐저 있었다.
카에사르는 그 地峽의 남북 양면으로 갈려 공격해 오는 누미디아군과 폼레이우스군을 양분해서 대적했다.
먼저온 유바王의 누미디아군 코끼리군단은 장창과 투석으로 무장한 경보병의 저지로 무력하게 후퇴하여 전력을 상실했고 기병도 카에사르의 게르만기병에는 대적이 못되었다.
타프소스회전에서 전황은 카에사르가 읽은대로 전개되었다.
제5군단 병사들이 공격을 받은 코끼리군단은 적을 쓰러뜨리기보다 아군을 짓밟으면서 뒤로 도망쳐버린 것이다.
갈리아전 8년을 카에사르와 일심동체로 싸왔던 심복,배신한 라비에누스 지휘 하의 기병단도 베테란병과 기병대에 의해 포위되어 라비에누스 외 몇 기만이 살아 도망했고 거의 전멸했다. 메테루스 스키피오가 지휘한 3만 보병은 1만 이상의 죽음을 남기고 사방으로 도주했다.
카에사르측 희생자는 5십명도 안되었다.
반나절도 안돼 결판이 난 회전 직후 적 추격을 제9 10군단에 맡기고 카에사르 자신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누미디아왕 진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적은 싸우지도 않고 전원 패주했다.
카에사르는 유바왕이 도망간 자마(150년 전 한니발이 스키피오에 괴멸된 전적지)에까지 추적했으나 유바는 싸울 처지가 아니었다. 자마 주민들이 저들의 왕에 성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누미디아는 이로써 멸망하고 로마의 속주가 된다.
사실상의 전투는 4월 6일 카에사르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폼페이우스파의 수뇌진 적의 총사령관 메테루스 스키피오는 미쳐 그를 알아보지못한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고 집정관을 지낸 아프라니우스도 도주 중에 패잔병들에 의해 가족이 몰살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렇게해서 아프리카의 폼페이우스잔당은 모두 청산되었고 나머지 하나 극렬 反카에사르파 아들 카토(부자 공히 극렬 반카에사르)와 戰力은 상실한 일부 수뇌와 패잔병들이 숨어든 옛 카르타고 지금의 튀니지 옛수도 우티카에 카에사르는 무혈 입성했다.
카에사르의 叡知에 찬 지휘능력을 보면서 한 지도자의 힘의 무게를 실감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