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 Digest-57-
*BC.140년 이후 1세기에 걸쳐 勝者 의 混迷期에 정쟁과 내란과 죽임의 복수가 되풀이 되다
역사란 반드시 순탄치만은 않은 것이 타고난 생리라고 말했다. 구비구비 우여곡절이 있어야 그 역사의 디테일을 드려다보는 재미도 있는 것이다.
BC.140년대에 동서남북을 평정한 로마는 이후 1세기에 걸쳐 아이로닉하게도 승자인 까닭에 겪는
정치적 混迷期를 피할 수없었다. 팍스-로마나를 이룬 후 로마를 중심한 동맹국간 분쟁을 치러야했고 이후 국내의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한참 뒤 카에사르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전승보를 전해 유명한 원정으로 평정한 그리스系 黑海연안 폰토스의 미토리다테스王에 의한 주변 로마동맹국들의 정복 위협은 로마로하여금 방관을 허락치 않았다.
지중해 연안 전역에 걸친 로마의 과대한 支配領域은 共和政 체제로는 통치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에서는 로마의 純血主義를 고수하려는 舊市民權層과 <율리우스市民權法>에 의해 半島 내
<로마聯合> 주민들에 새로 주어진 新市民權層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국가 전반에 걸쳐 개혁이 거듭되면서 마침내는 政敵 간에 대학살의 참사로까지 번져갔다.
BC.88년도 집정관에 루키우스 코르네리우스 스쯔라가 당선되고, 그의 희망대로 오리엔트戰線도
담당하게 되었다. 50세의 사실상의 同盟者戰役의 勝將 스쯔라는 집정관 임기 개시와 함께 폰토스王 미토리다테스를 치기 위한 군단 편성에 착수했다.
*老마리우스의 大虐殺劇
그런데, 民衆派 69세의 老마리우스가 平民 護民官 루프스와 결탁하여 오리엔트전선 담당을 빼앗았고, 신 구시민권자의 선거제도 문제로 갈등을 빚어 수도 로마에서 신 구시민권자 간의 난투가 유혈극으로 발전했다.
平民集會에 출석한 두 집정관도 사태에 휘말려 스쯔라는 간신히 마리우스의 집에 숨어 피신했다가 로마를 빠져나와 캄파냐지방의 노라에서 편성 중인 군단에 돌아왔다.
이로부터 로미는 걷잡을 수없는 혼란에 다시 빠져든다.
스쯔라에게 선거제도 개혁은 어찌되었건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지휘봉을 빼앗긴 것은 참을 수없는 일이었다.
편성된 휘하 병사들에게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의 명예가 더렵혀진데에 참을 수없어 당장 로마에
돌아가 실력으로써 더렵혀진 명예를 회복해야겠다고 호소했다. 병사 대부분은 스쯔라를 따라
동맹자전역 2년간을 싸와 이긴 사나이들이었다.
로마인 특유의 patrones와 clientes 즉 보호자와 피보호자 간의 관계에 있는 보스와 부하들 간의 뜻은 하나가 되었다. 전 대원이 대장의 명예 회복을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고 따르기로 했다.
3만 5천의 병력 중 막료 하나만이 이탈했을뿐 전원이 노라를 출발, 로마로 진군 중 로마를 도망쳐 나온 또 한명의 집정관 루프스도 스쯔라軍에 합류했다. 도달 거리는 불과 수 일이었으나 로마에
있던 마리우스와 호민관 스루피치우스 일파는 설마 로마의 집정관이 자국의 수도에 군사를 몰고
오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무방비의 로마는 몇 시간의 소규모 전투 후 스쯔라군에 제압되고 마리우스는 에토루리아地方으로 도망가고 호민관 스루피치우스는 붇들려 목이 잘려 로마광장의 연단 위에 방치됐다.
수도 주민과는 무관하게 성공한 사실상 쿠데타는 로마人이 로마를 제압안 로마사상 초유의 변란이었다. 이는 BC.88년의 사건이었다.
로마를 장악한 스쯔라는 로마광장에 시민을 모아 무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고
집정관으로서 다음을 제안했다.
가령 시민집회나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안이라해도 원로원의 승인을 얻지 않는 한 시행할 수없다는 스쯔라의 법안은 반대 목소리 하나 없이 가결되었다. BC.287에 성립한 소위 호루텐시우스法의 2백년만의 개혁이다. 신 구시민의 투표평등권을 담은 스루피치우스法은 이것으로 자동 폐기된 것이다.
이어 스쯔라는 마리우스와 스루피치우스派, 소위 民衆派 지도자들을 國賊으로 결정하고 그들을
도운자도 같은 죄를 묻는 법까지 성립시켰다. 그러나 더 이상은 추궁하지 않았다.
BC.87년도 집정관에는 옥타비우스와 킨나가 선출되고 東方으로부터는 불은한 정보가 계속 들어왔다.
에게해 동부 연안의 소아시아의 로마의 屬州를 점령한 폰토스왕 미토리다테스가 당지에 거주하는 로마시민과 이탈리아인들을 평민 노예 가리지 않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릴렀다. 살해된 로마시민권자는 무려 8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스계 미토리다테스왕의 그리스인들 환심을사기와 對로마 복수의 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로마사상 처음으로 로마진군을 강행하면서까지 스쯔라가 로마를 중도반단 상태로 남겨둔채 오리엔트로 발진한 것은 그가 사안 해결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결행한 것임이 분명했다.
스쯔라는 차기 집정관 킨나를 카피토리노언덕의 최고신 주피테르神殿애 데리고가서 스쯔라가 성립시킨 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받고 오리엔트로 향했다.
그러나 40대의 혈기 왕성한 킨나는 스쯔라가 그리스로 떠나자 서약을 깨고 국적으로 몰린 마리우스와 그 일파의 명예회복법안을 시민집회에서 의결하고 이어 신시민권자의 평등 투표권을 담은 스루피치우스법도 부활시켰다.
그러자 동료 집정관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발동했고, 로마는 다시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여기서 패한 킨나는 로마를 탈출했다. 거기에 정세변화를 알아차린 마리우스가 망명지 아프리카에서 6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귀국한다.
무력으로 로마를 장악한 측은 이번에는 마리우스와 킨나쪽이었다.
70세 노장 마리우스는 복수심에 불탔다.
집정관 옥타비우스는 도피 권고를 거부하고 원로원 내 집정관석에서 살해되었다.
후에 카에사르와 함께 로마 3두정치의 두 사람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츠스도 그해에 함께 부친을
잃었다.19세의 폼페이우스는 아직 어렸고 27세의 크라츠스는 멀리 스페인으로 도망가 살았다.
한편 스쯔라의 처자는 그리스로 도피해 죽임으로 면했다.
죽임을 당한 수 많은 요인들의 목이 로마광장의 연단이 좁다하고 梟首되었다.
노마리우스가 죽인 사람은 원로원 의원 50명, 기사계급의 경제인이 천명이라고 전한다.
그가 5일 밤낮으로 그만큼의 많은 사람의 목을 자를수 있었던 것은 노예 무리를 이용해서였지만
자유민으로 해주겠다고 속여 이용한 뒤 마리우스는 그 노예들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죽은 사람들 모두가 스쯔라파였던 것은 아니고 다만 마리우스를 국적으로 단죄하는 스쯔라에 반대 한마디 안했다는 이유였다. 원로원의 양질의 인재가 다수 살륙되는데 대해 킨나는 복수에 혈안이 된 마리우스를 돕지는 않았으나 제지하지도 않았다.
BC.86년 시민집회는 복수의 피의 제전을 치른 마리우스와 킨나를 집정과에 선출했다.
마리우스로서는 일곱 번째의 영예였으나 임기 개시 13일만인 BC.86년 1월 13일 많은 동족의 피를 보고 70생애를 마감했다.
집정관 킨나는 신시민과 하층민 표를 배경으로 國外遠征 중인 스쯔라의 총사령관직 해임안을 의결하고 스쯔라와 그 일파의 재산몰수와 국외추방안도 가결시켰다. 국외추방 처분을 받으면 스쯔라
인솔하의 로마병도 로마의 정규군 자격을 잃게된다.
권력이 뭔지?
政爭 권력투쟁은 살륙을 낳고 내란으로 확대되어 공동체를 약체화하는 것은 오늘의 한반도와 우리의 현실을 비춰봐도 2천년 전이나 후나 그 屬性은 변한 것이 없는 것같다.
*스쯔라의 동요없는 遠征수행
BC.87년에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에 건너간 이후 1년간에로마에서일어난 사태를 모를리 없는
스쯔라는 동요없이 원정 임무를 수행했다. 그도 폰토스의 미토리다테스왕과 똑같이 그리스 제압에는 아테네의 동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느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아테네 공략전을 폈다.
로마의 변화를 알면서도 戰陣을 흐트리지 않은 스쯔라는 마치 로마가 아무렇치도 않은냥 평상적인 공격의 손을 느추지 않았다. 다만 원군의 도착도 군자금의 지원도 무망해진 스쯔라는 어느 것도
현지 조달 외에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육군은 현하 장병들로 만족할 수밖에 없으나 해군이 없는 아테네 전초기지 항구 피레우스공략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 스쯔라는 그리스에 건너간 첫해에 막료 루크루스를 해군 편성차 동맹국 로도스와 키프러스 두 섬과 이집트에 파견했으나 두 섬에서 겨우 30척을 확보했을뿐 이집트에서는 빈손으로 돌아와야했다.
스쯔라 휘하에는 이탈리아서부터 데리고 온 5개 군단 3만 보병과 기마병 5천이 전부였다.
그는 전비의 현지조달을 위해 그리스 각지의 유명한 신전이 가지고 있는 金銀貨 등 보물에 착안했다.
신전에 봉납된 보물들은 諸神들의 소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文化의 이해가 깊었던 스쯔라이지만 군을 파견해 이들 보물을 우선 압수(후에 보상한다)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프라미누스, 에밀리우스 바울루스 등 그리스에 원정한 로마의 선배 무장들 아무도 손 대지 않았던 신전 보물의 압수는 스쯔라에게 있어 불가피한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근엄한 史家 플루타르코스는 후에 기술하고 있다.
BC.133년 이래 50년 가까이 계속된 로마의 混迷상태는 오랜 우호국마저 로마에 등을 돌리게했다.
하지만, 아테네 공략이 BC.86년 3월 1일에 완료된 것은 스쯔라가 단호히 서둘렀기 때문이다.
총 병력 12만을 헤아리는 폰토스軍이 헤레스폰토스海峽을 건너 그리스 본토에 들어왔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52세가 된 스쯔라는 로마측에 돌아온 아테네에 머물면서 적을 기다리는 전략은 취하지 않았다.
먼저 북상해서 테사리아를 통과, 남하 중인 적을 중부그리스 어디선가 邀擊하는 작전을 폈다.
적의 12만에 다해 아테네 방위에 5천을 빼고 나머지 3만으로 1대 4의 대적을 대하는데는 방어보다 공격이 유효하다는 名戰略家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오늘은 이만.....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소음 없이 실내를 쾌적하게 만드는 환풍기로 변신하는 마술
게시물 삭제요청방법
Copyright(c) www.nongak.net
tapng97@hanmail.net
연락처 : 010-4696-7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