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Digest-47-
스피키오 첫 작전서 한니발 본거지 스페인의 카르타헤나를 陷落
시스템의 로마는 역사의 고비마다 傑出한 인재가 등장하고 국가구조를 개혁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千年 帝國을 건설하였다.
한니발의 침공으로 8년간 수세에 몰려 이탈리아 중남부 거의 전역을 내주었던 로마는 시라쿠사도 카푸아도 그리고 타란토까지 수복하고 침략자를 장화발끝에까지 내몰았으나 한니발의 후방기지 스페인전선에서 로마군은 궤멸 직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만일 스페인전선이 무너지면 하슈도울바르와 마고네 두 동생으로부터 막강한 지원병력이 2차 3차 알프스를 넘어 형 한니발을 도와 로마로 밀어닥칠 위기상황이었다.
BC.210년 로마는 전 전선에 21개 군단을 투입했다.
지휜관 한 명이 전략단위 2개 군단을 통솔하게 되어 있는 로마는 모두 집정관 적령 40세 이상의 사령관 11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스페인전선 사령관만이 미정인채 40세 이상의 武將을 충원할 여유가 없었다.
집정관이든 법무관이든 2개 군단병력 2만 5천 내지 3만을 지휘하는 대임을 맡을려면 자격연령이 40세 이상이어야했다.
그런데 최하위관직 按察官 경력밖에 없는 한 청년이 스페인전선을 맡겨달라는 것이 아닌가.
자격연령이 15년이나 모자라는 25세의 푸브리우스 코르네리우스 스피키오였다.
티치노會戰에서 사령관 아버지를 구했고 칸네會戰에서 구사일생한 초년기병 출신이었다.
집정관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스페인전선에서 동시에 잃은 스피키오 청년은 원로원에 탄원했다. 적에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원로원은 먼 스페인 땅에서 죽은 코르네리우스가 형제 사령관의 뒤를 이어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는 2세 스피키오의 탄원을 거절할 명분도 또 대안도 없었다.
약관 25세의 스피키오는 실전경험이나 자격연령도 부족하지 않은 監察官 유니우스 시레누스의 통제를 받는 조건 하에 원로원에 의해 스페인에 파견된다.
원로원이 스피키오의 젊음에 신용이 안가기 때문에 시레누스에 스피키오와 동격의 권한을 주어 함께 스피인에 파견했으나 스피키오로서는 여간 거북하지 않았다.
우수한 두 명의 장수는 한 명의 凡將만 못하다는 것은 나폴레옹이 한 말이지만 둘이 협력해서 전선을 이끈다는 것은 스피키오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경우에나 해당될 일이었다.
스페인에 도착한 25세의 스피키오는 연장자 시레누스를 설득하여 에프로江 북쪽의 타라고나에 주둔한 본진 방위를 맡도록 하고 자신은 강을 건너 카르타고軍과의 전투를 지휘하기로 합의하였다.
엠보리아에서 배를 내려 육로로 타라고나의 로마軍 진영에 도착한 스피키오를 맞이한 것은 8년의 노고가 수포로 돌아가 두 지휘관을 잃고 낙담에 빠져있는 亡父의 살아남은 잔병들이었다.
스피키오가 첫째 할 일은 그들의 敗色을 일소하고 재기의 용기를 북돋우는 일이었다.
스피키오는 어제까지의 것은 과거로 돌리고 모든 것은 오늘부터 새로 시작한다며 海神 포세이돈이 우리편에 섰다고 병사들을 격려했다.
처음 밟는 스페인전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지 정보의 수집이었다.
BC.210년에서 209년에 걸친 자연휴전기 겨울을 정보 수집과 분석 뒤에 전략을 세우는데 집중했다.
적은 한니발의 아래동생 하슈도울바르가 이끄는 제1군과 막내동생 마고네의 제2군 그리고 카르타고 직할파견군 지스코네의 제3군, 각군이 2만 5천 병력이므로 총 7만 5천에 象隊가 가세된다.
스피키오의 로마군 병력은 본국서 데리고 온 1만 1천에 전년 크라우디우스 네로의 스페인 급파시 파견된 1만과 亡父의 잔병 7천을 더해 모두 2만 8천이었다. 카르타고군 1개 군과 맞먹는 병력에 불과했다.
카르타고군 3개군은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동영 중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제1군은 스페인내 카르타고군 본거지 카르타헤나로부터 10일 행군거리의 내륙부에, 제2군은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르해협 가까이에 그리고 제3군은 지금의 포르투가르가 되는 타고江 근처에서 동영 중이었다. 3군간 거리는 어느 곳이나 10일 행군거리였다.
이것이 한니발의 실질적 배후지인 스페인내의 카르타고勢力의 실상이다.
이 상황 하에서 에프로江 북쪽으로 내몰려 있는 로마勢力을 이끌고 전황을 호전시켜야하는 임무가 젊은 스피키오에 맡겨진 것이다.
BC.209년 3월 15일을 기해 시작되는 신임 집정관들의 임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초봄, 스페인에서는 스피키오가 맨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스피키오는 타라고나의 본영을 출발, 에프로江 남쪽으로 건넜다.
친구이며 부관인 레리우스도 군사를 태운 30척의 군선을 이끌고 남하를 개시했다.
타라고나 본영은 감찰관 시레누스가 지키기로 했다.
전략 목표는 스피키오와 레리우스 그리고 시레누스 단 세 사람만이 알뿐, 적을 속이려면 먼저 우리편을 속일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비밀작전이었다.
타라고나에서 카르타헤나까지의 행정은 보통 20일 거리이나 급행군으로 소화해서 출발로부터 7일 뒤에는 카르타헤나 성벽 앞까지 도착했다. 병사들이 총사령관의 의도를 알게 된 것은 이때였다.
카르타고의 3개 군도 스피키오가 스페인에 도착한 것은 알았으나 그토록 빨리 그것도 적 본거지를 맨먼저 치리라고는 예상조차 못했다. 10일 거리에 있는 카르타고 제1군이 기동하기 전에 적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스피키오의 電擊作戰이었다.
카르타헤나는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의 유지로 스페인 식민지 수도로 BC.228년 사위 하슈도울바르가 건설한 도시이다. 서 남은 바다에 접하고 북은 潟湖, 동쪽만 육지에 연결된 천혜의 요새였다.
한니발은 왕궁을 방불케하는 거성에서 이탈리아 침공시까지 19세부터 10년을 살았다. 스페인의 문물이 모두 모여 본국 카르타고로 반출되는 식민지 수탈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스피키오는 카르타헤나에 도착하여 성벽 외곽을 따라 공격용 진지를 구축하고 레리우스가 인솔해 온 군선 30척으로 해상봉쇄를 완료했다.
도착 다음날 아침 정석대로 유일한 육지 동쪽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성내 4천명의 방위군과의 공방전은 오후가 되어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스피키오는 육지공방전이 한창인 틈을 타서 적에 노출되지 않게 미리 선발해 놓은 2천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돌았다. 눈 앞에 펼쳐진 석호를 보고 비로서 병사들은 스피키오의 작전을 알아채렸다.
카르타고軍 측이 예상치 못한 방향 석호를 건너 손 쉽게 북쪽 성벽을 넘는 작전이었다.
석호의 물은 오후가 되면서 20센티 밖에 차지 않았다,
기습전법은 완벽했다.
생각치않은 방향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은 총붕괴되고 말았다.
동쪽 성벽으로부터도 눈사태처럼 밀어닥친 로마군을 본 수비병들은 언덕 위의 성에 들어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항복했다.
단 하룻만의 전투로 스피키오는 적의 본거이자 카르타고본국과의 연락 거점이었던 도시를 공략하고만 것이다.
이 한번의 성공으로 스피키오청년은 2년 전 아버지와 숙부의 패배로 잃은 스페인에서의 로마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정북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유지해 나가는 일은 더구나 난사였다.
스페인의 카르타고군은 본거지 수비병 4천을 잃었을뿐 3개 군이 여전히 건재했다.
수믈여섯 나이의 젊은 로마의 무장에게는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