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11, 이집트에 간 카에사르의 <알렉산드리아戰記>
In antiquity, Ancient Egypt was divided into two lands: Upper Egypt and Lower Egypt.
그 옛날 고대이집트는 땅이 경작 가능한 나일강 연안을 따라 저지이집트와 불모지 고지이집트 둘로 나뉘어 있었다
BC.48년 10월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13세 간의 권좌 타툼을 裁定하여 先王의 유언대로 공동통치로 귀착시킨 카에사르는 난데없이 왕가 집안싸움에
휘말려 한바탕 불의의 전쟁을 치른다..
풀루타르코스가 처음 발설해서 후세에 널리 알려진 양탄자와 클레오파트라에 얽힌 이야기는 진위야 어떻든 클레로파트라의 성격상 능히 그럴 수있는 일이고, 파스칼이 말했다는 클레오파트라의 콧대가 어땠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또한 역사의 假定을 생각하는 호사가들에게는 좋은 화제꺼리가 되었다.
공적 일에는 스토익적(근검)면서 사생활에서는 에피큐리안적(향락)인 카에사르였다.
차려진 밥상을 외면 할만큼 위선을 모르는 그는 전장에서 오랜 긴장의 세월을 보낸 52세의 勝將이었고 생애 최대의 도박을 걸고 다가온 클레오파트라는 나이 21세의 異國的 미녀였다.
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질만했다.
그렇더라도 BC.48년 당시 카에사르가 내린 재정은 군사상 우위라고 해서 그의 동지이자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를 죽인 동생, 특히 그 측근들을 만족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 1개월 후 불만을 터뜨린 동생 왕측이 카에사르에 군사도발을 해온다.
이른바 알렉산드리아戰役이다.
흥분하면 평소의 생각은 잊어버리고 보고싶은 것만 보려는 사람이 무섭다.
막가파 가정교사 아킬라스와 宦官 포티우스가 동생 왕파의 全軍을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소집했다.
7년 전 폼페이우스 원정군으로 와있던 가비니우스의 잔당을 비롯해서 시리아나 킬리키아지방의 해적 그리고 도망친 노예 등 오합지졸을 합해 2만의 보병과 2천의 기병으로 구성된 이집트군에 대해 카에사르의 병력은 보병 3천 2백에 기병 8백뿐이었다.
그리고 적측의 보유 군선이 72척인데 비해 카에사르는 타고온 10척이 전부였다.
步騎 모두 수적 열세에 알렉산드리아시민들까지 등돌린 상황에서 市街戰으로 방위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한 카에사르는 항만 부두로 돌진했다.
바닷길이 차단되는 것을 두려워한 그는 적 해군을 주공격 목표로 적의 군선에 불을 질렀다. 타오르는 불길이 헬레니즘文化의 본산이기도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圖書館에 옮겨붙어 이때 장서 4십만권이 소실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燈臺가 있는 팔루스섬을 교두보로해서 4킬로가 넘는 긴 제방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카에사르는 숫적 우세로 공격해오는 이집트군을 막아내는 방어전을 폈다.
격전 중에 환관 포티우스가 먼저 쓸어지고 소년왕에 가담한 여동생 알루시노에까지 아킬라스측에 가세함으로써 공교롭게도 카에사르는 클레오파트라측에 붙어 싸우는 꼴이 되고, 알루시노에의 명령으로 가정교사 아킬라스마자 살해되어 결국 이번 전쟁은 클레오파트라와 여동생 알루시노에 자매간의 왕위쟁탈전으로 변질한다.
카에사르는 소아시아 방위를 맡고 있는 도미티우스에 원군을 보내라고 벌써 명령했으나 援軍船이 지류가 거미줄처럼 얽힌 나일강 하구에서 적선과 싸와야하는 등 상륙에 어려움을 겪고 카에사르와 합류한 것은 4개월 후의 BC.47년 2월 말이었다.
이렇게해서 전투는 알렉산드리아시내에서 나일강 하구로 옮마갔다.
일대가 델타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은 여러개의 지류로 갈라져 지중해로 들어가는 나일강 하구지대가 그리스어로 알파벳 세모꼴字의 델타와 닮았기 때문이다.
거북한 시가전으로부터 벗어나고 원군과의 합류에 성공한 후 카에사르는 겨우 독자의 전법을 구사하여 나일강 델타에서 전개된 전투를 1개월도 안돼 끝냈다.
패주하는 이집트군측은 동생왕도 휘말려 전사하고 지휘권을 행사하던 환관 가니메데스도 전사했다. 여동생 알루시노에 여왕은 포로가 되었다.
카에사르는 그림자처럼 그를 딸아다니는 충실한 게르만기병단을 선두로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승전 장군으로 입성했다. BC.47년 3월 27일이었다.
그리스계 세력으로 굳어있던 이집트에서 왕실내분을 이용하여 로마세력을 추방하려다가 실패한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전쟁의 결과에 승복했다.
잔존 적들은 카에사르 앞에 무장해제는 물론 왕이 되어달라고까지 진언하며 목숨을 탄원했다. 오리엔트식이라면 패자의 운명은 죽음 아니면 노예의 길빡에 없다.
그러나 카에사르의 생각은 5개월에 걸친 전쟁 후에도 선왕의 유언을 충실히 이행하여 클레오파트라와 생존 왕자 하나를 공동통치자로 앉히고 시민들에는 평화를 선물했다.
전장에서도 정치감각을 잃지 않는 카에사르식 전후처리였다.
이집트의 민심에도 맞고 로마로서는 착한 동맹자를 얻는 득책이기도 한것이다.
22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7세와 새로 즉위하는 어린 프톨레마이오스14세의 새로운 이집트왕국과 동맹조약을 맺은 로마는 동맹국 내정에는 불간섭 원칙을 재확인하고 패자신분의 백성들이지만 적대한 시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 돈을 탐하지도 않았다.
같은 로마인 입장에서는 카에사르에게도 살인범죄자들인 폼페이우스 살해범들은 모두 전장에서 죽었다.
이렇게해서 이집트에서 할 일을 마친 카에사르는 北西 계절풍의 탓도 있지만 2년간 연속 치른 전쟁의 피로를 풀기 위해, 그리고 병사들에 휴식을 주기 위해 봄이 오는 남국의 저취를 맛볼 겸 나일강 水源의 탐사길에 나선다.
영국왕립지리학회 발행 공문서에는 나일강의 발원지는 후에 빅토리아湖로 명명되는 호수로 되어있지만 그것은 2천년 후의 영국왕실지리학회원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2개월간 클레오파트라를 태운 나일의 뱃노리를 즐긴 카에사르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의 막료가 쓴 <알렉산드리아戰記>에는 한 줄의 언급도 없다. 카에사르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려는 배려였는지 모른다.
이집트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로마세계 제1인자가 된 카에사르에게는 발을 딛고 있는 여기와 육지로 연결된 지금의 튀니지와 알제리 즉 北아프리카에는 권토중래를 벼르는 폼페이우스 잔당이 있었다.
갈리아의 알레시아공방전으로부터 그리스의 파르살루스회전까지 5년의 세월, 카에사르는 긴장을 늦출 여가가 없었다.
최대 라이벌 폼페이우스는 지금 세상에 살아졌지만 천재라고해서 스트레스가 싸이지말라는 법은 없다. 자기억재력이란 긴장과 완화를 스스로 제어하는 능력이다.
카에사르는 나일강에서 그것을 연출했을 뿐이다.
나일 발원지 탐사 결과에 대한 것은 모르지만 휴가 중에 카에사르는 <內亂記> 전 3권을 써냈다.
그리고 동방의 폰토스왕국을 제압해야하는 또하나의 과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유명한 알렉산드리아등대를 배경으로 해상에서는 배가 불타고 세계지성의 전당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이 불길에 싸여 사라지는 지옥에서 피아가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한 로마의 장군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은 아마도 헐리우드 영화가 노칠 수없는 신이 아니었겠나 생각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