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10,카에사르, 이집트왕실 남매간 御家騷動에 종지부를 찍다
(덴데라神殿 벽에 새겨진 여왕 클레오파트라7세와 카에사르와의 사이에 낳았다는 아들 카에사리온의 부조)
그리스 파르살루스대회전서 패하고 도주한 폼페이우스는 로마 제1의 명장답지 않게
도피처 이집트의 자객들에 의해 BC.48년 9월 28일 백주에 선상 살해를 당했다.
쫓던 카에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보고 내란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잔당 소탕전은 단지 반란진압작전일 뿐이라고 했다.
이렇게해서 12년 전 BC.60년 루카회담에서 결성한 <3두정치>도 막을 내리고 카에사르 독주의 共和政에서 帝政으로 가는 행보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다다넬스海峽을 건너 아시아에 발을 딛은 카에사르는 가는 곳마다 승전 축하를 받으며
동방 제국의 再編에 박차를 가했다. 폼페이우스에 자금과 병력 군선을 지원한데 대해서는 비난도 벌도 주지않고 오히려 지방으로부터 거두던 10%의 屬州稅도 반감해 주는 정치 제스쳐까지 보였다.
에게海를 뒤로하면서부터는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수일 후 소아시아 남해안에 도착한 카에사르도 폼페이우스가 해로로 알렉산으리아로 향했다는 것을 알았다. 카에사르도 이번에는 로도스島가 제공한 10척의 군선에 3천 2백의 병력을 태우고 폼페이우스 뒤를 추적한 것이 그의 죽음 4일후 알렉산드리아 도착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 뒤였지만, 이집트王室 관료들은 폼페이우스를 죽임으로써 카에사르에 큰 빚을 안겨줬다고 생각한 것같다.
폼페이우스의 목과 반지를 주고나서 그들은 로마 제1의 실력자로서 패권국 로마의 현집정관인 카에사르에 대해 추구한던 것을 얻었으면 머뭇거리지말고 어서 여기를 떠나라고 전해왔다.
개인감정에는 좌우되지 않는 카에사르였지만 이것만은 국가적 문제였다.
이집트는 독립국가이지만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로마와 동맹국 관게를 맺은 나라다.
로마가 독립국으로 인정함으로써 독립국가로 존립하는 것이다.
카에사르는 그 로마의 초고위 집정관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상륙을 결정한 것이다.
르네상스기의 마키아벨리는 민주적 토의로 일을 결정하는 습관을 갖지않은 민족에 그것을 이식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집트는 BC.3천년 옛날부터 지배자는 바뀌어도 神政이라해도 좋을만큼 절대왕정으로 일관해 왔다. 그 이집트에 그리스人에 의한 왕정이 들어선 것은 BC.4세기초 알렉산더대왕에 의해서였다. 대왕이 젊어서 죽자 대왕의 장군 하나가 프톨레마이오스王朝를 세워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집트의 국가적 특성을 좀 설명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더대왕에 神의 게시라하여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라고 전한 것은 이집트 아몬神殿의 司祭들이다 신의 아들이 지배해온 이집트가 사람의 아들에 지배되어서는 격에 맞지않기 때문이다. 그 이집트의 국왕을 일커러 파라오라 했다.
즉, 이집트人으로 보면 不死가 아닌 사람으로는 지배자의 정통성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같은 대왕의 지배 하의 장군을 開祖로해서 마케도니아는 사람들의 제1인자로 하는 왕, 시리아의 세레우코스王朝는 신과 사람의 중재 역할을 가진 왕,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신의 아들로서 사람을 다스리는 왕이 되므로 헬레니즘 3국의 통치이념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어왔다.
그러한데, 카르타고를 함락해서 동지중해역에 진출해온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하고 시리아도 속주로 하면서 이집트는 독립국으로 남겨두었다. 다른 원인 하나는 로마가 카르타고 상대로 사투를 벌일 때 이집트왕조는 로마에 붙었고 그 후도 마케도니아나 시리아처럼 로마에 宣戰하는 따위의 외교상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는 BC.63년에 폼페이우스가 시리아의 세레우코스왕조를 페하고 속주로 만든 시점에 마음만 먹으면 이집트도 속주화할 수있었다. 이집트의 군사력은 당시 로마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튼 카에사르는 바쳐진 폼페이우스의 목을 화장해서 미망인 코르넬리아 앞으로 봉송해 줬고, 미망인은 폼페이우스가 어디보다도 좋아한 아르바의 별장 정원에 묻어 지금도 무덤이 남아 있다.
카에사르가 알렉산드리아항에 상륙한 것은 BC.48년 10월 4일이다.
패권국 최고위의 현 집정관으로서 상륙한 그는 그 지위를 상징하는 경위 12인의 호위를 받으면서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내분에 싸인 왕궁으로 행진하는 것을 연도에서 지켜본 이집트인들의 반감을 찰지하고 공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카에사르는 즉시 소아시아에 남겨둔 군단에 이집트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동맹국에 내분이 발생할 경우 로마가 중재를 맡아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로마의 전통적 대외정책이었다.
이집트 國內政情의 안정은 로마의 집정관인 자신의 임무라 생각한 카에사르는 상륙 즉시 분쟁당사자인 누이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를 3일 후 10월 7일 알짜를 정해 왕궁에 소집했다. 이것이 또 왕궁 관리들을 자그했으나 할 일은 했다.
이집트에 처음 와본 카에사르에게 비친 알렉산드리아의 경제계가 그리스계와 유다계가 불평등하게 양분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通商權의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득을 본 유다계로부터는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해 왔으나 이집트계는 기득권 침해라는 항의를 해왔다. 카에사르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반감은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그러는 중 10월 7일 카에사르가 주재하는 御家騷動의 당사자 회담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남매의 父王 프톨레마이오스12세가 이집트왕실에는 다반사였던 내분으로 추방되어 로마에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로마시민의 친구요 동맹자'로서 복위시키는데 군사력으로 지원한 것이 폼페이우스였다. 그해 BC.59년도 집정관이었던 카에사르도 입법화를 통하여 적극 지원한 전례가 있다.
왕이 BC.52년에 죽자 유자녀로 당시 18세였던 장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해서 2남2녀가 있었다. 유언으로 연장자 왕녀와 왕자 둘이 공동총치하라고 했다.
선왕의 유언은 충실히 지켜저서 클레오파트라7세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13세가 공동통치를 해오는 도중 BC.48년 가을 로마원정군으로 와 있던 가비니우스의 잔당 로마병들을 등에 업은 남동생이 21살의 누이를 공동왕위에서 몰아냈던 것이다.
만약 현실주의를 택했다면 그 시점에서 카에사르는 군사적 우위에 있던 남동생의 손을 들어줘 이집트 정정의 안정을 꾀했을 것이지만 양 당사자에 내려진 재정은 선왕의 유언대로 남매의 공동통치의 회복이었다.
BC.48년 10월 7일, 카에사르가 주재한 이날 이집트 왕실회담의 배경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후세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많은 화제를 뿌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