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군은 가족생계를 책임지는 시민군이기 때문에 1년 전투가 끝나면 예비역이 되어 귀가해서 가족을 돌보도록 제도화 되어있다.
*2차 遠征서 시칠리아島를 거의 무혈전령
방위가 완벽하다고 자신하는 시라쿠사는 로마군에 의해 城이 함락되는 것보다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페니키아系의 카르타고 측에 漁業權을 빼앗길 것을 오히려 염려하였다.
僭主 히에론은 고민했다. 승산 없는 전쟁에서 저항하다 성이 함락되면 자칭 왕의 운명은 말할 것 없고 그리스系 시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약탈되고 학살되리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전통적으로 로마는 항복한 敵에는 관대하고 저항자에게는 가혹했다.
히에론은 시라쿠사가 살아남기 위해 메시나처럼 로마냐 카르타고냐 선택의 기로에서 로마를 택해 로마진영에 사자를 보내 講和를 제의한다.
로마執政官 발레리우스와 오타치리우스는 시라쿠사 城壁 밖에 머무른채 싸움도 해보지않고 적의 항복을 받아들인다. 無血占領한 것이다.
로마가 제시한 강화조건은.....
첫째,두 나라의 同盟關系는 우선 15년 기한으로하나 이의가 없으면 무기한으로 갱신한다.
둘째, 로마는 시라쿠사의 완전 自治權과 獨立을 존중한다.
세쨰, 시라쿠사는 小麥을 로마에 우선적으로 판매하는 의무를 진다.
네째, 시라쿠사는 <로마聯合>에 군사를 제공하는 의무를 지지 않는다.
다섯째, 시라쿠사는 로마에 배상금으로 100탈렌트를 지불하되 25타렌트는 조인 즉시, 나머지는 15년간 분할 지불한다.
로마는 적과의 강화시 전선사령관인 집정관에게 全權이 부여되어 있다.
히에론으로서는 뜻밖의 관대한 조건에 승복하고 存命 중 지켰으며 향후 50년간 로마-시라쿠사간 동맹관계가 지속되어 시라쿠사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와같이 시칠리아島 東半部 메시나와 시라쿠사가 로마의 동맹국이 됨으로써 근접 위헙은 살아진 것이다. 반도 남부의 방위를 견실히 한다는 로마의 당초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시라쿠사와의 강화조약 후 로마는 시칠리아에 2개 군단만 잔류시키고 2개 군단은 귀향조치하여 군비축소에 착수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때 카르타고가 로마와 시라쿠사동맹에 위기를 느낀데 있다.
시칠리아에 소유하고 있는 기득권 잠식을 우려한 카르타고가 육 해군 4만을 본국과 마주한 남부 해안도시 아그리젠트에 상륙시킨 것이다.
이것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總力戰 포에니전쟁의 본격 전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실상 지금까지 바다를 모르고 살아온 로마인들은 반도 턱밑까지 카르타고의 制海權에 묶여 심지어 카르타고의 허락 없이 로마인은 바다에서 손도 못씻는다는 말이 있어왔다.
로마가 공화정으로 이행된 직후 BC.508년에 체결된 양국협약에는 시칠리아 서부나 아프리카 北岸에 로마船의 기항을 허용하나 그 밖의 항구에는 천재지변시라도 불허한다고 하였다.
한편 로마를 중심으로한 근접지역 항구에 카르타고船의 기항 허용 여부를 로마가 결정하지만 그밖에 지방은 카르타고선이 자의로 기항할 수있으며 로마는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명백한 不平等條約이지만 공화정 이행 직후에 여러가지 난제에 직면해 있던 때라 로마로서는 건드릴 수없는 대국 카르타고와의 역학관계로 보아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후 BC.348년에 로마가 반도의 중부를 제패했을 때 개정된 협약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와 로마연합국에 대하여 사르데니아島와 코르시카島 以西의 西地中海에서의 통상을 금지했다. 로마의 주권은 반도 땅 이외 바다 밖에는 못미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통상권을 카르타고의 자유행위로한다고 협약에 명기했다.
이제 힘의 균형을 찾았다고 보고 시라쿠사 평정 후 1만 5천 병력만 남기고 철수했던 로마 원로원은 이미 상륙 완료한 카르타고군에 대항하기 위해 재차 4개 군단을 시칠리아에 파견했다.
이번 전투는 지휘 집정관 2명이 모두 졸장이었던 탓에 고전을 면치못하다가 마침 카르타고군의 실책 덕분에 패전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용병으로 구성된 카르타고군도 지휘관의 무책으로 패색이 짙자 그해 12월 厭戰症을 느낀 카르타고군은 야음을 타서 전선기지를 버리고 본국과의 최근거리 항구 마르사라로 도주해 갔다. 여기서도 무혈점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승자로 입성한 로마군은 순간 크게 뉘우칠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그리젠트시가를 휩쓸며 약탈하고 2만 5천명의 주민을 노예로 잡아 시라쿠사시민에게 외상으로 팔아버렸던 것이다.이 만행이 후일 동맹군을 얻는데 크게 반작용을 하게된다.
로마가 면적 3만 5천 평방킬로의 시칠리아 섬 남부해안까지 점령하게 되면서 시칠리아 全島를 어느 한쪽이 완전 제패에 성공할때까지 끝날 줄모르는 장기전의 숙명을 안고 포에니전쟁은 여기서 본격 전개된다.
국력이 바다를 건너 뻗치기 시자한 로마는 해군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BC.261년 5단층 군선 1백척과 3단층 2백척에 의한 최초의 로마海軍을 탄생시킨 것도 이때였다.
(배 맨 아래 갑판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층계를 만들어 상하 다섯명씩일렬로 노를 젔는 것을 5단층선(漕手 3백명)이라하고 상하 세명이면 3단층선(조수 백명)이 된다.)
로마는 해양국 카르타고와의 3년간 전쟁에서 노획한 적의 함선 모방을 통하여 조선기술을 익히고 당당히 제해권까지 쥐게 되었다.
조선기술 습득보다 어려운 것이 선박 운항기술이었다.
그러나 항구도시 동맹국들의 지원으로 이를 극복하면서 빠른 기간내에 수병을 양성, 해상 제패에도 성공한다. 로망人 앞에 불가능은 없었던 것이다.
육전 전통의 로마가 해외웅비의 해군력까지 갖추면 로마군에 대적할 군대는 세계에 없는 시대가 열리는 역사를 맞게된다. 제1차포에니전쟁편 계속.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