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9, 도주와 추적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죽음(하)
이집트왕국의 수도 동지중해 최대의 해양도시 알렉산드리아항는 대형선박이라도 옆으로 정박하기에 충분한 크기의 부두였다.
폼페이우스 일행이 탄 5단층 대형 카레선 정도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등대 깊숙한 내항에 닻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王室의 가정교사와 宦官(환관)으로 구성되어 있던 왕의 측근들은 왕명으로 마중을 갈테니 항구밖에서 기다리라고 전했다. 의심 없이 마중 나올 배를 기다렸다.
그리스人 윤리학 교사 아키라스와 로마군출신 세프티미우스가 탄 소형선이 다가왔다.
폼페이우스가 해적소탕전 당시 자기 부하였던 백인대장 세프티미우스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마잤다.
폼페이우스만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는 왕한테 가자는 아키라스의 말에 폼페이우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마중나온 작은 배로 먼저 가라탔다. 그 배에는 폼페이우스와 전 집정관렌토울스 이외 몇명의 병사만이 함께 탈 수있었다.
그들만 탄 배는 함께 도피 중이던 폼페이우스의 妻子와 장인 스키피오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레선으로부터 멀어져갔다. 활의 사정거리쯤이었을까 백미터 이상 거리였다.
그 정도 거리면 밝은 해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있었다.
폼페이우스에 달려드는 세프티미우스의 움직임도, 뱃전에 내동댕이쳐진 폼페이우스의 꼼짝않는 오른 팔도, 모든 일은 지켜보던 사람들의 놀라는 탄성과과 절망의 신음소리와 함께 끝났다.
따라간 소수의 병사들을 그자리서 죽이고 렌토울스는 옥에 갇혀 거기서 죽었다.
폼페이우스를 태우고온 배는 서둘러 닻을 올리고 비탄에 잠긴 사람들을 태운채 먼 버다로 사라졌다.
BC.48년 9월 28일이었다.
파르살루스회전으로부터 한 달 20일 밖에 안되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奇緣에 흐느끼는 카에사르의 눈물
그로부터 4일 뒤에 알렉산드리아 외항에 카에사르가 모습을 나타냈다.
카에사르가 상륙하고 그의 앞에는 향유에 잠긴 폼페이우스의 생목과 인감 금반지가 보내졌다.
후세의 史家들이이라야 풀루타르코스나 카시우스 디오 같은 고대로마시대의 사가들이지만 그들에 의하면 그것을 본 카에사르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12년 전 BC.60년 당시 46세였던 폼페이우스와 40세의 카에사르 두 사람은 <3頭政治>를 결성한 盟友였다. 다음해에 폼페이우스는 카에사르의 딸 율리아를 후처로 맞았다.
그리고 다음해 BC.58년에 수도 로마를 폼페이우스에 맡기고 카에사르가 갈리아총독으로 떠나기 전 써 놓은 유언장의 상속인은 혈연으로 사위가 된 폼페이우스이기도 했다.
그 폼페이우스도 맹우관계가 7년 지나면서부터는 카에사르를 떠나 마침네는 강경한 反카에사르파로 떠밀려 돈독한 맹우에 적대하는 사람이 된다.
카에사르의 루비콘강 도하, 폼페이우스의 이탈리아 탈출,그리고 파르살루스의 회전과 이집트 도피 중의 죽음. 이것이 여섯살 아래뿐인 로마 절세의 두 무장의 최후 2년간의 운명이었다
냉철하지만 냉혹하지않았던 카에사르였다
알아볼 수없는 벗의 죽은 모습을 눈앞에 하고 눈물이 볼을 적셔다 하드라도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카에사르 자신은 그 광경을 자필 <내란기>에 다음 한줄로 간략히 써 남기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
정략결혼이 보편화했던 고대로마시절이라 하드라도 카에사르와 폼페이우스와 같은 현연관계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기야 후의 로마제국 초대황제되는 아우구스투스는 아들 둘을 둔 친구의 아내를 이혼시켜 연상의 여인을 황후로 맞지만, 여섯살 위의 사위를 맞은 카에사르야말로 희대의 정략가였지않나싶다.
제국 건설의 웅대한 꿈을 안고 당시로서는 힘에 겨운 3두정치를 펴며 로마 제1의 무장을 부려먹을 수있었던 카에사르의 힘은 어디에 연유하는 것이었을까. 몸젠 같은 독일 사가는 카에사르를 가리켜 창조적 영웅이라 평했지만 속인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미치는데가 없다.
원래 자식 복이 없던 카에사르는 외동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 재취로 보냈으나 후사 없이 율리아는 요절을 하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의원 메테루스 스키피오의 딸을 세번째 아내로 맞았고, 그 장인 스키피오도 파르살루스회전에 동참했다가 이집트망명길에도 도반이 되어줬었다.
그 폼페이우스가 이제 죽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는 카에사르의 비문같은 글은 당시에도 정반대의 독후감을 주었던 한 줄 글귀였으나 후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읽는 글이다.
어떤 학자는 자기 손에 피 묻히지 않고 숙적의 종말을 본 것은 카에사르에게는 바람직한 최고의 결착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카에사르는 과연 그렇게 생각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내란이란 국내를 양분한 세력이 서로 밀고 당겨서 일어나는 투쟁이다.
카에사르는 이런 의미의 내란은 루비콘江 도하로 시자해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루비콘강에서부터 시작한 <내란기>는 파르살루스회전서 끝난게 아니라 폼페이우스의 죽음에서 끝나고 있다.
그 후로도 폼페이우스파와의 전쟁은 계속되지만 그것은 이미 내란이 아니라고 카에사르는 선언하고 있다.
상호 拮抗(길항)하는 양대 세력간의 항쟁이 아니라 단지 불평분자들의 叛亂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내란기>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종장한 것이므로...-계속-
이 글을 쓰며 카에사르의 눈물을 보고 생각했다.
눈물도 눈물 나름이라는 것을......
나는 2007년 12월 노무현의 눈물을 보고 나라가 뒤바뀌는 꼴을 겪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그 눈물때문에 얼마나 신고의 날들을 살아왔나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었던 사람들은
역사의 눈물에 한을 남긴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시는 그런 가증한 눈물에 속지않을 것을......
독자 여러분,
제가 노무현시절 정신적 공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찾은 피난처가 로마史였습니다.
영 일서 모두 합하면 만여페이지가 됩니다.
뒤늦은 학문을 위해서도 아니오 무료를 달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천착을 하다보니 우리에게 시사하는 교훈의 寶庫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혹시나 여러분과 공유할까싶어 손댄것이 왕정 공하정편 75회를 몇해 전에 마치고,
총선 대선이 요란한 시국을 보며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졸고를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