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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준 박정희 = 18 편 = |
작성자: 안동촌노 |
조회: 2663 등록일: 2017-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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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져서, 저가 알기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 가 수정과 교정을 했음을 말씀드립니다.
= 제 18 부 =
100억달러 수출의 꿈을 안고 중화학 공업에 도전하다.
1978 년 12 월에 이임한 김 정렴 비서실장은 특별한 경우이다. 경제는 나대신 임자가 맡아서 챙겨주시오. 나는 대미, 남북관계 등 국가안보 문제가 바삐 돌아가니 거기에 몰두 할 수밖에 없소! 하며, 9 년 2 개월 간 김 정렴 실장은 한국 경제 발전에 총수 역할을 하였다. 이들 여 덜 사람은 모두가 문관 출신으로 자유 시장경제[自由市場經濟 = Free World Open Market System) 신봉자다. 이들이 우리나라 산업혁명을 주도한 중추적 인물이다. 이들의 성품이 바로 우리나라 경제의 성품[性品]이다. 현제 중국도 강력한
테크노크라트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혁명 주체인 홍 종철 씨는 대통령과 술 한 잔을 하면서 직언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은 “임자! 100 억 달러를 수출하려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지!” 이 질문이, 우리나라 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의 출발점[出發點]이다. 중화학공업 추진이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다. 수석 비서관 중에는 정치 출신은 없고, 청와대 근무는 공무원들로 2 년 - 3 년 순환근무로 상하 간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고, 대통령의 관심사항인 중화학 공업. 방위 산업, 율곡 사업,
행정수도, 기술인력 등을 다루었다. 한국의 산업혁명과 한국형 경제개발 모델 중대한 결단, 박대통령의 중대한 결단은 중화학공업 사업추진 결단이다. 2004 년 11 월 13 일 호주 올 련 대학에서 박정희 서거 25 주년 기념 포럼에서 발표하였다. 우리나라 중화학 공업의 발전은 다른 나라와 전혀 다르게 발전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한국은 수출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고자 중화학공업을 건설한 것이다. 이를 가장 잘 알고 추진한 분이 박대통령이다. 전 산업의 수출화이다. 즉 중화학공업건설의 목적은 수출에 있다는 것이다.
세계 일류 공장 건설 100 억 달러 수출에 대한 박대통령의 집념은 신[神]들린 것과 같이 강력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70 년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박대통령과 테크노크라트들은 중화학공업공장 건설에 세계인류[世界 一流]수준의 공장을 건설한 것이다. 피라미드형의 경제개발 형이다. 석유화학이 건설되고 의류, 플라스틱제품, 고무제품 등이 생산된 것이다. 1964 년 1 억 달러에서 1967 년 3 억 달러, 1970 년 10 억 달러 제 3 켐프 1977년 100억 달러 달성이 선진국 진입이다.
제철소, 석유화학, 조선소, 자동차 공장, 공작기계, 전자공업 국제경쟁력 강화 중화학공업 50% 까지 끌어 올림. 기능공[技能工]시대 도래.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 완성기까지 200 년 일본이 명치유신 산업혁명에 가담 이후에 성공한 나라는 없다. 한국은 30 년 만에 산업혁명[産業革命]을 완수한 것이다. 한국경제개발의 경우, 세계사적으로 그 예가 없으며 한국경제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고, 이를 압축형 산업혁명[壓縮形 産業革命] 경제발전[經濟發展]이라고 하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많은 문제가 발생하지만,
대통령은 모든 상황을 공개적으로 하며 비밀이 없다. 정치계, 학계, 언론계, 국민들도 이해하고 개인의 이해나, 사상[思想]이나, 주의주장[主義主張]을 내 세우지 않고 오직 수출과 경제발전만을 생각했다. 대통령은 1 회부터 15 년간 작전참모회의[作戰參謀會議 = 물가동향 대책회의, 수출확대회의)에 참석했다. 완전고용 선언[完全雇用 宣言] 1967 년 박대통령은 1967 년 년두 교서에서 70 년대에 완전고용[完全雇用]과 “수출 10 억 달러” 달성을 목표로 선언했다. 그러나 업계나 학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특히 3 억 달러 이상은
성장률이 둔화(鈍化) 된다고 반대 주장. 수출을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수출업자들이 안 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기가 찰 노릇이다. 바보 같은 놈들! 이때에 혁명을 한 박정희라는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떤 처지에 놓여있을 까? 그러나 박대통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밀어 붙였다. 한번, 승기를 잡으면 절대 절명[絶對絶命]의 찬스를 포착한다. 불가능은 없다.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경쟁력의 정신 무장이다. 1969 년 무역협회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대통령은 10 억 달러 달성을
분수령으로 보았다. 이락선 장관은 피나는 노력으로 1969 년 11 월 30 일 10 억 480 달러를 달성했다. 결국 70 년대 중반에 30 억 달러를 달성하게 된다. 박대통령은 혁명공약[革命公約]에서처럼, 기아선상에서 절망적인 민생고[民生苦]를 해결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력을 똘똘 뭉쳐서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대 전진[大前進]을 한 것이다. 바로 한강의 기적인 것이다. 이때에 피땀을 흘리지 않은 국민이 누구인가? 1970 년대에 “보리밥”을 먹게 된 것이다. 쌀밥은 충분히 먹을 수 없지만, 보리쌀 밥은 충분히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보리 쌀 밥은 보리에 쌀을 어느 정도 혼합한 것이다. 보리만으로 먹는 것은 깡 보리밥이다) 국제시세는 보리가 쌀의 반값이다. 쌀 막걸리는 100 억 달러 달성한 다음에 1977 년까지 기다렸다. 한국의 산업혁명은 1964 년에 시작하여 5 년의 짧은 기간에 큰 변화를 창조한 것이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시작되었다. 국가안보 북한의 푸른 낙원의 꿈, 북한의 인민경제발전의 7 개년 계획. 5 . 16 혁명 후, 4 개월 후에 1961 년 9 월 11 일 북한 김일성 인민경제 7 개년 계획 1961 - 1967 발표.
사회주의 건설의 결정적 시기라고 했다. 공업생산 년 18% 성장 7 개년 완성 시 60 년대 대비 3 , 2배. 일본 수준을 크게 앞선다. 전 인민의 수요를 충분히 공급하고 국토를 대규모를 개조하고 농촌은 풍작을 이루고, 푸른 낙원의 도래를 약속했다. 북한은 쌀 3,00 만 톤 생산, 철강 230 만 톤, 결국 7 개년 계획을 실패로 끝나다. 북한은 67 년 말, 경제발전 이야기는 온대 간대 없고, 67 년에 군사비 30% 증액발표 1 . 전 인민의 무장[武裝]화 2. 전국토의 요새화 3 . 주요 산업시설 및 군사시설 요새화 4. 평양인구 제한.
긴급대피호 건설. 4 개로선 발표, 푸른 낙원 7 개년 계획은 군비강화로 경제개발 7 개년 계획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제개발을 방해전력으로 특히 68 - 69 에는 격화된 남침 게릴라전으로 방해했다. 북한의 인민경제발전 7 개년 계획 내용은 너무나 유치하다. 예를 들면 양말 72,000 켤레 자전거 15 만대 라디오 12 만대 우유 12 만 톤, 계란 8 억 개 등이다. 북한은 1967 년 124 군 특수 게릴라 2,400 명을 양성 대한민국 각도에 300 명씩 침투하여 발전소, 정유공장, 등 산업시설을 폭파 유엔군 발표에 의하면
1,262 명이다. 청와대 습격 대통령 암살 계획, 울진, 삼척 100 명 침투, 1968 년 미 정보 함 납치, 1970 년 국립묘지 폭파 1970 년 8 월 15 일 영부인 암살 범인은 문 세광. 1970 년 7 월 6 일 닉슨 미군 1 개 사단 철수. 5 년 후 완전 철수. 한국군 현대화 15 억 불. 박대통령 자주 국방 자위방위책 수립. 남북한 경제전과 북한 6 개년 계획. 김일성은 7 개년 계획을 실패하고, 1967 년까지 연장하였으나 중국과 소련의 지원 없이 실패를 6 개년 계획으로 제시도 했으나 실패. 김일성은 공업주체성 강화,
자력갱생(自力更生) 천리마 운동 등으로 철[鐵]의 장막을 치다. 결국 남북한이 전혀 다른 국가운영체제로 가동되었다. 박대통령은 완전 개방 정책으로 자유 시장 정책으로 국력을 발전 시켰다. 여적[餘滴] 냉전시대에 모든 공산국가는 경제파탄으로 붕괴되고, 중국도 홍위병 난동으로 전국 폭동사태로 붕괴 직전에 등소평의 등장으로 경제건설에 성공하면서 체제는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인민들에게는 많은 자유와 부의 추구와 행복 추구를 하게 되었다 중국은 모태동이 먹는 문제는 해결한 상태였다. 김일성의 경제 실패는 = 내일 계속 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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