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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준 박정희 = 박정희 13 편 = |
작성자: 안동촌노 |
조회: 2745 등록일: 2017-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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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져서, 저가 알기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했음을 말씀드립니다.
= 제 13 부 =
박정희는 위대한 혁명가, 군인, 교육자, 행정가였다.
대통령은 어려서 전깃불 없이 등잔불 아래서, 힘들게 공부한 유산을 자기 조국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면하게 해주려고 노력한 것이다. 텔레비전, 전기밥솥 보급에 만족하였으리라. 혁명가 군인 교육자 행정가[革命家, 軍人, 敎育者, 行政家]였던 지도자 박 대통령은 위대한 역사 창조자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을 강하게 촉구하고 특히 8 ․ 3 조치는 채권자의 희생과 정부의 재정상의 부담을 무릅쓰고 단행한 것을 기업은 기업공개를 통해 국민들에게 보답할 것을 5 ․ 29 특별조치로 지시했다. 박 대통령이 남긴 교훈,
청와대비서실의 전 방위 등거리 원칙. 비서실장은 월권으로 보이는 짓을 못하도록 비서관들을 감독하는 일이다. 나는 전 방위 등거리 원칙을 세워 사적인 초대나 식사, 골프 등을 일체 사절하되, 어느 계열 어느 중진을 막론하고 요청 시 언제나 청와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래서 미묘한 권력 세력 간에 말려들지 않게 하였다. 내가 떠난 지 10 개월 만에 비극[悲劇]이 일어났다. 핵심적 원인은 비선 조직의 발호와 그것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결과가 가져온 통치체계의 혼선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떠난 뒤에
일어난 이 비극적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굳이 이 한 장을 더 쓰게 된 것이다. 내가 동경[東京]에서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반드시 역사에서 박정희의 부활[復活]을 국민[國民]들은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한국경제사 30 년사 김 정렴 전[傳] 인간 김 정렴은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을 9 년 3 개월 동안 혁명가의 혁명 공약을 실천하는데 빈틈없이 역사적 임무를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경제개발 정책 30 년사는 보통의 경지를 넘어선, 그는 국가에 대한 공헌(貢獻)도는
정신[貞臣]의 경지이다. 김 정렴 실장은 박대통령의 역사에 산증인으로 박정희 실록 그 자체이다. 미국의 원조물자가 아니면, 연명을 하지 못했던 해방 전후와 정부수립과 6 . 25 남침시의 전쟁 뒷 밭침과 4.19와 5.16 혁명의 격동기를 혼신의 힘으로 역사에 헌신한 그 제체이다. 김 실장은 박대통령의 조국근대화의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핵폭탄이 투하된 2Km 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인물이다. 김 정렴 실장은 한국경제 개발의 절대적 주역은 박정희 대통령임을 확신한다. 소위 민주화 이후에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떠했으며,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박대통령이 이룩한 중산층[中産層]이 반쪽이 나고 말았다. 박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혁명을 감행한 혁명가[革命家]다. 4 . 19 직전 “못살겠다, 갈아보자”구호가 나왔다. 결국 4 . 19를 거처 정권은 야당인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민주당은 반반으로 갈라져 신구파로 당파 질을 했다. 해가 뜨기 전에 시작한 데모는 달빛 아래서도 대모는 끝이 없었다. 결국은 안 되겠다, 하고는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혁명[革命]은 모든 가능성[可能性]의 종합[綜合]이다.
혁명은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작업이다. 왜? 혁명이 일어났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만약에 그때, 박정희 장군이 혁명을 하지 않았거나 혁명자체 실패했거나 혁명이 성공하고는 혁명공약의 핵심인 가난을 극복하고 민족중흥의 역사 창조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느 형편에서 살고 있을까? 혁명은 성공 보다 실패가 많은 법이다. 혁명에는 많은 노획물이 넘친다. 결국은 권력에 도취되고 부정부패에 마취되고, 결국은 혁명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5 . 16 군사혁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특별히 성공한 혁명이다. 김 정렴은 혁명에
혁명이성을 제공하고 조정역[調整役]을 하였다. 통치자가 김 정렴 같은 정신[貞臣]을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고 능력이다. 한국의 5 . 16 혁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혁명이기에 더욱 그렇다. 김 정렴은 대통령 비서실장 직을 명받고 각하!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저는 경제 밖에 모릅니다. 대통령은 정색을 하면서 “경제가 국정의 기본이야”비서실장 중에 가장 유능했고, 정직했고, 청렴했고, 능력이 탁월했으며 혁명 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 (All Nothing to Make All Something) 위대[偉大]한 역사[歷史]요, 신화[神話]며,
전설[傳說]이다. 대통령은 경제가 잘되어야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이 따듯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도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해 질 수가 있다는 국정철학[國政哲學]이다. 김 정렴은 1945 년 8 월 6 일 원자탄 세례를 받고도 살아남은 별난 인물이다. 김 실장은 일본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그날 8 월 15 일에 소위로 임관되게 되었다. 원자병 특별 치료를 받아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하늘의 도움이다. 그는 귀국하여, 45 년 11 월에 한국은행에 복직하고 뉴욕사무소 개설임무를 끝내고, 해방 직후 공산당들이
혼란을 조장하고 정판사[精版社] 위조지폐[ 僞造紙幣]사건도 그때 발생한 것이다. 1949 년 12 월 10 일에 국채법[國債法]을 제정, 연말에 제 1 회 건국채[建國債] 100 억 원을 발행, 당시 일본은 명치유신 때 프랑스 중앙은행 법을 본떠 만들 것을 우리도 답습한 것이다. 금융통화위원회도 영미법을 따랐다. 6 . 25 동란 27 일부터, 군인들 전비 지급시작 27 일에는 헌병들이 지금 은[地金銀]을 실어내기 시작하고, 6 월 28 일 새벽 2 시 30 분에 한강인도교를 폭파, 서울서 숨어 밀기울로 연명하고, 9 월 15 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9 월 28 일 서울 탈환 북진통일 가능성이 있어보였는데, 중공군 참전으로 1 . 4 후퇴 12 월에 동경지점 발령 통화계획 연구 19951년 6월 23일 휴전제의 조사부에서 통화신용, 외환전책, 제2차 대전 각국의 통화정책 즉 통화개혁 각국별로 연구 보고 총재로부터 꼭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화폐개혁을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비밀 보고서 작성 통화개혁안을 작성 보고하였다. 1952 년 9 월 백두진 장관에게 불려가 통화개혁 단행할 수 있느냐? 하기에, 김 정렴은 주저 없이 해낼 수 있다고 답하였다.
결국 1953 년 2 월 15 일 통화개혁 단행, 이승만 대통령 특별 담화 발표. 금융은 사람에 신체의 혈맥이다. 그 피가 너무 많아도 변이요. 너무 적어도 변이다. 미군정 환률 450대 1, 6000대 1 로 늘어나 시장가격은 20.000 원까지, 폭동 대통령은 긴급명령에 긴급통화조치 2월 25일 국화통과 26일 통과되었다. 미국 연수 중 긴급통화기금(IMF)와 IBRD 가입추진, 1959 년 송 인상 재무장관으로부터 이 재 국장으로 발령, 4,19가 일어나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5.16 혁명과 제 2차 통화개혁 1960 년 10 월 한은 복귀 대일재산
청구권 회담 참가 1953 년 미국 연수중에 5 . 16 혁명 일어났다. 결국 유원 식 장군에게 불려가, 제 2 차 통화개혁 참여 재무차관을 거쳐 상공부차관으로 임명 김 정렴은 연세대학 강의를 준비 중,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자기가 경제부총리로 갈 것이니, 내일 아침 6 시까지 당면한 주요 경제문제와 그 대책과 아이디어를 요악하여 메모로 작성하여 달라는 것이다. 김 정렴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라도“시장자유화정책”을 단행해야만 체질개선[ 體質改善]과 국제경쟁력[國際競爭力] 강화가
이루어져 수출입국[輸出立國] 공업화 입국[ 工業化立國]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經濟成長]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시장 자유화 정책[市場自由化 政策]을 위주로 해서 메모를 작성했다. 시장자유화정책이 국내기업의 체질개선을 하지 못하면 도산 될 위험이 민심에도 민감한 반응이 일어나 여당의 반대가 있을 것이다. 여당의 기반조차 흔들릴 것이다. 시장자유화정책을 시행하는 데는 대통령[大統領]의 확고하고, 충분한 이해와 끊임없는 지지와 그리고 재무, 상공 경제부처의 협조가 절대적 조건이다. 장기영 사장은, = 내일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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