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져서, 저가 알기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제 10 부 =
국산무기 개발과 신군부 등장으로 미사일 개발 포기
대전차 로켓, 다 연발 로켓, 중거리 로켓, 장거리 유도탄 등 4 종목 다 성공적이었다.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致賀]한다’ 박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비서관에게 친필로 지시했던 유도탄 개발이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 책임[責任]하에 국내 전문가들로서 연구개발단을 협의 편성 추진키로 한 것이다. 물론 외국 기술협력만 얻으면 가능하다고 판단, 미국은 기술이전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맥도널 더글러스사와의 우여곡절 끝에 M D 사에 우리 기술진을 6 개월간 파견하여 많은 성과를 획득하게 되었다.
핵무기 개발방심核武器 開發 榜心]한 미국[美國]의 감시[監視] 미국으로부터 C I A 요원을 대전 기계창[機械廠]에 배치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우리는 이에 반대하였다. 미국은 계속해서 감시를 강화하였다. 나는 1978 년 12 월 22 일 비서실장을 사임하고, 대통령은 1979 년 10 월 26 일 서거[逝去]하였으며, 79 년 12 ․ 12 사태가 발발하고 80 년 5 ․ 18 광주유혈사태가 발발하자, 5 월 31 일 국보위가 설립되어 전두환이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때 A D D 유도탄 개발 분야에 제 1 차 숙청 총책임자 심 문택 박사를 해임시켰다.
주 영복 국방장관 지시라고, 부소장 등 30 명의 간부를 해임하였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이경서 박사, 강 이구 박사 등 유도탄 개발의 핵심요원이 포함되었다. A D D 를 마비시킨 신군부 1982 년 12 월에 대대적인 제 2 차 숙청이 진행되었다. 김 성진 장군이 소장으로 취임하자, 2.400 명 중 3 분의 1 인 800 여 명을 숙청 A D D 를 마비 시켰다. 몇 년에 걸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역사상 최초 최고의 국방연구소가 해체되는 것이다. 이때 유능한 인재들은 이 연구소를 떠났다.
특히 유도탄 연구팀은 아예 없애고 말았는데, 이때 K - 2 유도탄 개발책임자였던 최 현호 박사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연구팀도 실물은 다루지 말고 책이나 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도탄 개발 사업은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 1974 년 미사일 개발 시설 및 장비를 미국으로부터 도입하기 위하여, A D D가 유엔군 사령관에게 써준 사거리 180 Km, 탄두중량 1000 파운드까지 양해각서를 A D D 의 제 2 차 숙청이 있은 다음, 1983 년 주 영복이 다시 미 측에 써주고, 1990 년 8 월
노 태우 정부에 외무부는 미국과의 양해각서 제한조건을 사거리 180 Km에서 300 Km, 탄두중량 1000 파운드에서 500k g 으로 변경하는 제 3 차 교섭을 했으나, 미국 측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北韓]에 압도당한 오늘 유도탄 분야에서, 1978 년 북한을 앞질러 세계에서 7 번째 개발 국이 되었던 것을 오늘날 북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북은 남한 전 지역을 공격할 수 있는 스커트 미사일을 연간 100 개 이상 생산능력을 갖고 있으며, 사거리 1.000 Km 이 넘는 노동 1호 개발에 성공하였다. 사거리 5.000 Km 대포동 1 호, 2 호를 개발하고
핵폭탄 운반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북의 도발을 응징할 수 있는 수단으로 미국 측의 견제와 비협조를 극복하면서, 군사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나아가 전쟁을 예방하고 자립국방[自立國防]을 확립하기 위하여, 평양까지 도달하는 유도탄을 개발했다. 신군부[新軍部]는 왜 ? A D D 요원 800 명을 숙청했으며? 숙청요원들이 국방부로 달려가 데모를 계속하는 동시에 부당 해고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에서 승소했으며, 정부로부터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무슨 연유로 A D D가 써준, 합의사항인 사거리 180 Km 제한을 사거리 300 Km로 수정하지 못하고, 주 영복 국방장관 공익[公翰]으로 다시 써주었는지? 더 나아가 외교문서화[外交文書化] 하였는지, 도저히 이해[理解]가 되지 않는다. 율곡사업. 서해 5 도의 위기, 박 대통령은 백령도를 위시하여 서해 5 도의 장병과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만일 북한군이 상륙을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하라! 육해공군은 총력을 다 하여 신속히 탈환할 것이니, 1 주일만 버텨라!’ 그리고 이들 섬에 화력 증강을 지시했다.
이때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방위성금을 내기 시작하여, 161 억 3 천만 원이 모금되었다. 1975 년에 월남이 패망하여 우리의 전력 증강이 절대 불가피하게 되었다. 75 년 7 월에 방위세가 신설되어‘율곡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신군부 율곡비리 싹틔워, 효율 극대화와 부정방지 위해 무기구매 절차 하달, 국민들이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염원을 달성하고자 율곡사업에 부정을 철저히 배격하기 위하여 2 심제를 실시하였다. 국방부 5 인 위원회, 그리고 청와대의 5 인 위원회를 통과하여야 한다. 최종적으로
박 대통령이 결재하는 것이다. 가능한 군사차관으로 구매를 원칙으로 하고, 거래는 중간상인을 배제하고 직거래를 원칙으로 한다. 박 대통령 사후에 신군부는 국방부 단독집행으로 비리가 싹텄다. 재평가[再評價]되는, 박 대통령 경제정책에 대한 국제청문회[國際聽聞會 ]세계은행[世界銀行]의 간담회 참석 요청[懇談會 參席 要請] 1993 년 세계은행으로부터, 한국과 일본 경제발전 모델에 관하여 비공개 간담회를 갖고, 그 실적을 분석 평가하려고 하니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는 주저 없이 동의하고 지난 15 년 동안 기다리던
기회라고 생각하고, 박 대통령 시대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국제적 청문회[國際的 聽聞會]에 나가는 기분으로 참석했다. 나는 기조연설자로 초청되어, 첫날 벽두에 박정희 대통령의“경제개발정책 1961~1979 년”이란 제목으로 45 분간 연설하고, 질의 및 응답을 가졌다. 전 세계적으로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 실정을 살필 때, 우리나라의 경우 개발도상단계에서 이륙하여 중진국으로 단시일에 발전한 나라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그 수가 매우 적었다. 유엔은 60~70 년대를 개발연대로 정하고, 개발도상국들의
경제개발을 강력하게 뒷받침했으며, I M F, 세계은행도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동아시아의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엔과 국제금융기관들의 비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73 년 제 1 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4 배로 인상되고, 79 년 제 2 차 쇼크 때 다시 2 배로 인상되어 개발도상국 비산유국들은 경제파탄을 겪게 되었다. 지구상의 기아선상의 인구가 53 억 중 58% 인 31 억 2.700 만 명이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렇게 여러 나라가 고전하는데 동아시아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
7 개국이 세계 20 위권에 끼어 중진국이 되었으며 일본을 합친, 동아시아 8 개국이 1965~1990 년 경제성장률 년 평균 6% 로, O E C D 성장률 2 배가 넘고 중남미 아프리카의 30 배가 넘는 소위 동아시아의 기적을 이룩한 것이다. 그 중심에 한국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시장[市場]의 자유경쟁기능[自由競爭機能]을 중시[重視]하는 세계은행[世界銀行] I M F 가 단지 유동성[流動性] 불항[不足]으로 인한 국제수지[國際收支]의 불균형[不均衡]을 시정하기 위하여, 공여하는‘스탠드 바이’융자[融資]나 세계은행[世界銀行]이
한 나라의 경제 전체 또는 어느 부문의 전체 예컨대, 금융부문 전체에 대한 구조조정[構造調整] 융자[融資]를 할 때에 이용하도록, 경제정책[經濟政策]의 기본 변수[基本 變數]의 변경[變更]을 융자조건[融資條件]으로 요구[要求]한다. 이 융자의 부대조건 정책조건에는 예를 들어 금리의 자유화[自由化] 금융의 자유화, 환율의 현실화[現實化] 무역의 자유화, 가격조건의 자유화, 국영기업의 합리화[合理化] 민영화[民營化]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경제[經濟]를 자유화[自由化]하시오, 라는 것이다.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