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에 역사관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람들이 조선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의 쇄락에는 청과 연관이 있다.
조선과 청에 관한 책이라면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참고 될만하다. 명은 임진왜란 당시 10만의 원군을 조선에 보낸 후 급격히 국력이 쇄락하여 결국 숭정제 의종때 반란군에 의해 망하고 청이 반란군을 격파함으로서 중국은 통일 된다.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은 박제가, 홍대용, 유득공과 사귀었으며 과거에 뜻을 버린 채 곤궁한 생활 속에서 학술과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정조 5년 진하사절을 따라 중국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돌아보고서는 이 연행 뒤 열하일기를 지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했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43세의 나이에 벼슬 없이 부담 없는 상태로 중국에 보내는 사신 일행과 같이 북경과 숭덕(열하)을 다녀오면서 모든 일을 적은 일기이다. 이 사신의 목적은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세 생일 축하였다. 청나라 건륭 황제의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경제력이 높고, 평화를 이룬 시기였다. 이런 융성한 중국을 청나라가 발생한 지역 근처에서 시작하여 청나라의 수도까지 가면서, 그 당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도 최고의 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연암이 보고 느낀 바를 매일 상세히 적은 것이다. 이 연행을 계기로 하여 충(忠), 효(孝), 열(烈) 등과 같은 인륜적인 것이 지배적이던 전통적 조선사회의 가치체계로부터 실학, 즉 이용후생의 물질적인 면으로 가치체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연행 뒤 열하일기를 지어 이용이 있은 다음에 후생이 있고, 후생이 있은 다음에 도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비록 이적(夷狄)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여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려보에 이르니, 집들이 모두 띠 이엉을 이어서 몹시 쓸쓸하고 검소해 보인다. 이는 묻지 않아도 고려보임을 알겠다. 앞서 정축년(병자호란 다음해)에 잡혀온 사람들이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 산다. 박지원 일행이 지나갈 때 이들은 돌을 던졌다고 쓰여 있다. 자기들을 이곳으로 보낸 조선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벽돌을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기와를 올리고 그 빈틈을 진흙을 채운다. 진흙과 기와의 무게로 나무 기둥이 휘어지게 되고 진 것이 마르게 되면 기와 밑이 자연히 들떠서 비늘진 곳은 물러나면 틈이 생겨 쥐나 새가 뚫고 들어오며 뱀이 자리 잡고 고양이가 설치는 걱정을 면치 못하는 결과가 된다. 반면 중국은 벽돌의 공이 크다. 비단 높은 담을 쌓는 뿐만이 아니라 집 안팍에 이 벽돌을 쓰지 않는 곳이 없다. 저 넓고 넓은 뜰에 눈 가는 곳곳마다 번듯번듯하게 바둑판을 그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사방으로 길이 났는데 바퀴 달인 마차들이 달릴 수 있게 돌을 평탄하게 깔아 놨다. 조선의 길은 마차가 다닐 수 없이 울퉁불퉁하다. 적이 쳐 들어오기 쉽다고 그리 하는데 그러다 보니 물류가 원활하지 않다. 물류가 원활하지 않으니 생산을 해도 판로가 막히고 필요한 곳에 물품이 공급되지 않으니 발전이 없었다. 사극을 보면 사대부들이 타고 다니는 걸 보면 가마를 노비들 몇이 매고 다닌다. 비생산적이다. 청나라에서는 바퀴 달린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
박지원은 이런 청나라의 이용후생을 보고 조선에 접목하려 했으나 뿌리 깊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에 의해 무너진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할 때의 정신인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저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