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비극은 소련군이 인민의 신망이 높던 조만식 선생같은 지도자는 일제 앞잡이 누명을 씌워 연금하고, 내세울 만한 경력이 아무 것도 없고, 국내에 지지 세력도 전무하며, 심지어 중국어가 체화되어 우리 말도 더듬거리던 김일성같은 33세 애송이를 온갖 허위 조작을 통해 영웅으로 만들어 지도자로 내세운 것이다. 처음부터 허위 조작에 기반하여 출발한 정권이라 허위가 탄로나면 정권이 붕괴하니, 인민들의 입과 귀를 틀어 막고 조작에 조작을 더하여 갈 수 밖에 없었다. 또 허위를 계속 감추려다 보니 최고 지도자를 세습할 수 밖에 없어서 오늘날과 같은 꼴로 전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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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전후 북한 지역은 해방되었다기 보다는 소련군 점령하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며, Joseph Stalin (1878.12.18 – 1953.3.5)이 사망하는 1953년까지는 소련의 식민지와 같았다. 지도자가 된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은 사실상 스탈린이 임명한 식민지 총독이나 다름 없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점령군 행세를 하며 민간에 대한 행패도 말할 수 없었고, 일제가 남기고 간 산업시설을 뜯어내어 소련으로 가지고 간 것도 많아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스탈린의 총독이었던 김일성은 스탈린이 죽자 북한을 조선왕조보다 몇배나 더 퇴보적인 세습 전제 왕조로 탈바꿈 시켰다.
소련은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해지자 1945년 8월 8일 갑자기 대일전에 참전하므로, 그 전에 북한 지도자를 누구로 할지 결정할 시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선택된 시기는 8월 8일 이후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일 것이다. 그 전에 김일성으로 결정했다면 일본 항복 직전 소련군이 북한으로 진격해 들어올 때 앞세우고 들어와 그의 정치적 이미지를 제고시켜 주지 않았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9월 19일에야 북한으로 들어 온 것은 지도자 결정에 그만큼 시간이 걸린 탓으로 보인다.
소련군의 조선인 중에는 김일성보다 상급자도 다수 있었는데, 왜 그들이 아닌 김일성이 선택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스탈린에게 김일성이 추천되어 올려졌을까?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결정되는 과정에 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는데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의 글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결정되는 과정에 정리되어 있다.
한편 해방후 평양에서 정치에 간여했던 소25군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 (일명 정치사령관) N. G. 레베데프 [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 – 1992)] 소장은 소련 극동군 장성들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내정했다고 증언한다.
「지도자 김」은 소극동군 작품(비록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39)중앙일보 1992년 02월 13일
레베데프 장군은 『군부대가 김일성을 북조선의 주요지도자로 내정한 것은 스티코프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그의 직계 상관인 극동군총사령관 A M 바시리예프스키원수와 극동군 제1전선군사령관 K A 메레츠코프 원수 등과 협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처음으로 증언했다.
레베데프 장군에 따르면 스티코프장군은 1942년 소독전쟁때 메레츠코프 원수가 사령관으로 있는 소련군 제7군 군사정치위원으로 파견돼 메레츠코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스티코프는 이 전쟁때 레닌그라드를 마지막까지 사수했고,핀란드에 친소정권을 세울때 혁혁한 공을 세워 모스크바 중앙당으로부터 「탁월한 정치군인」으로 평가 받았으며 그후 메레츠코프를 따라 극동군에 파견됐었다.
김일성의 발탁은 대개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주요 인사들을 만났으므로 모스크바의 수뇌부에서 결정했다는 설과, 극동의 소련군 장성들, 극동군 총사령관 Aleksandr Vasilevsky (1895-1977)원수, 극동 제1전선군 사령관 Kirill Meretskov (1897 – 1968)원수,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 Terentii Shtykov (1907-1964) 중장들이 논의하여 정했다는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이 엇갈린다.
스티코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5년 연재)
레베데프 비망록 : 중앙일보는 1994년 11월 15일 “레베데프 비망록” 입수 정리.
<평양의4김회담>1.레베데프 비망록-자료적 가치 1994년 11월 15일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1994년 11월 15일
秘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93년,2쇄
"분단 47년만에 밝혀진 '북조선건국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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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는 비밀경찰 NKVD (KGB 전신)의 총책으로 인간 도살자로 악명높은 Lavrentiy Beria (1899.3.29 – 1953.12.23)가 자신에게 올라온 후보들 중 김일성을 택해 몇 차례 만나보고, 스탈린에게 천거했다고 한다.
중국에 오래 살았고 동아시아 역사 전문가인 언론인 Jasper Becker (b. 1956)의 북한 관련 저서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에서, 베리아가 김일성을 여러 차례 만나보고 스탈린에게 천거했는데, 그가 선택된 이유는 스탈린이 극도로 싫어하는 한국의 토착 공산주의자들과 무관하고, 전적으로 소련에 복종할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The Far East Command of the NKVD (the predecessor of the KGB) made the decision to use Kim to front a puppet gonernment at the very last moment. Kim was selected from several candidates presented to NKVD Chief Lavenrty Beria, who met him several times before Stalin gave his final consent.
Kim seems a curious pick as there were so many older and dedicated Korean Communists who were better qualified. Kim was then just 33, poorly educated, and unknown in Korea. His only merit seems to have been a reputation as a good fighter who disciplined drunken soldiers. Perhaps the Soviets chose him because he had no prior association with the indigenous Korean Communist movement that Stalin disliked so much, and because they could rely on him to show total obedience.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History of Kim Il Sung, p.49
-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Becker가 베리아가 김일성을 스탈린에게 천거했다는 말을 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위 책에 김일성과 자주 만났던 NKVD 요원 Leonid Vassin의 증언이 많이 나오므로, 그에게 들은 말일 것이다.
Wikipedia Kim Il Sung (15 April 1912 – 8 July 1994)에도 베리아가 김일성을 여러 차례 만났다고 나온다. 여기서는 이런 말의 출처로 매릴랜드대 물리학과 김영서 교수 홈페이지를 링크해 놓았다. 김영서 교수는 1935년경 황해도에서 나서 1946년 월남하여 고등학교를 마치고 도미하였다. [ BERIA’S KOREA, Y.S.Kim (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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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본 여러 설들의 치명적인 문제는 김일성을 발탁한 쪽이 모스크바 수뇌부든, 극동의 원수급 사령관들이든, KGB 총책 베리아든 간에 그같은 고위 인사들이 극동 말단 부대의 일개 대위에 지나지 않는 김일성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또 김일성이 소속된 88여단에는 김일성보다 상급자인 조선인도 다수 있었는데도 하필 김일성이 발탁된 배경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4년에 공개된 KGB 문서에 의해 베리아와 김일성의 연결 고리가 발견된다. 김일성이 자신이 바로 비밀 경찰 NKVD (KGB 전신) 요원이었다는 것이 공개된 KGB 문서에 나온다.
KGB 비밀문서, 金日成 抗日투쟁 경력 일축 연합뉴스 1994-06-08
美(미)정보전문 간행물 발표 "金日成(김일성) 항일투쟁은 조작" 1994.06.09 동아일보 5면
간행물에 영어로 번역돼 게재된 전문은 『金(김)이 과감한 빨치산 투쟁을 한 후 45년 8월 일제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킨 영웅임을 자처해왔으나 센터(KGB 본부를 지칭)는 그가 당시 북한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은 이어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을 해방시킬 당시 金(김)은 붉은 군대의 중위로 복무해오면서 동시에 NKVD (KGB 전신) 요원이었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전문간행물 「정보와 국가안보」가 92년 1월에 낸 「KGB의 1급 비밀서류철에 포함된 국제첩보활동 1975∼1985년분」이란 제목의 특집물은 인터넷에 올라 있으나 유료(USD 37.00)라서 확인이 어렵다.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ume 7, Issue 1, 1992
Special Issue: More ‘Instructions From the Centre’: Top Secret Files on KGB Global Operations, 1975–1985
이것은 단행본으로도 간행되었다.
Christopher M. Andrew, Oleg Gordievsky
More Instructions from the Centre: Top Secret Files on KGB Global Operations 1975-1985
Taylor & Francis 1992, 2012, 136페이지
이것은 1년 앞서 간행된 아래 책의 속편으로 보인다.
Christopher M. Andrew, Oleg Gordievsky
Comrade Kryuchkov's Instructions: Top Secret Files on KGB Foreign Operations, 1975-1985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1 - 24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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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소련군 시절 KGB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다른 증거도 있다. 그의 소속부대 88여단 자체가 KGB 산하였다고 한다.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 동아일보 2004년 8월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⑤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동아 2004-09-12 수정 2009-10-09
이외에도 88여단 자체가 국방성 아닌 내무성 NKVD (KGB) 산하부대였고, 김일성이 소련군 시절 살았던 거처도 KGB 관리하에 있다.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⑤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동아 2004-09-12
88여단은 비밀경찰 (KGB) 산하로 김일성의 계급 대위도 경찰 계급일 가능성이 크다.
蘇軍(소군)시절 金日成居處(김일성거처) 확인 1991.12.04 경향신문
하바로프스크 이웃 농촌서 통나무집으로 50年前(연전) 거주, 현재 KGB가 관리
Vyatskoye, Khabarovsk Krai
김일성이 88여단에 있을 때 KGB 상관이었던 N씨의 증언도 있다.
"「金正日(김정일) 백두산出生(출생)」은 거짓말" 1991.12.26 동아일보 15면
김일성의 KGB 상관 N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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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NKVD (KGB) 요원이었다면 먼 극동에서 어떻게 모스크바의 수뇌부나 베리아와 연결되었겠는가에 대한 답이 아래 기사에 나온다.
金日成(김일성)은 蘇(소) KGB 情報員(정보원)이었다 1990.04.22 동아일보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八路軍(팔로군)이 주축 1990.04.29 동아일보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2>
위 첫 기사 말미에 나오는 박우섭(朴禹燮, 중장·군단사령관)과 최원(崔元, 소장·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의 증언에 의하면 동북항일연군에서 소련군 88여단에 들어온 사람들은 중국인과 조선인은 서로 친했으나, 소련인과는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소련 사람들은 항일연군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심해 항상 그들의 동정을 파악하는데 신경을 썼는데, NKVD 요원이었던 김일성은 소련인들과 마찰을 빚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일연군 사람들의 동정을 솔로킨 소장에게 자주 고변해주어 신임을 얻었고, 또 88여단의 모든 중대한 문제는 솔로킨 소장을 통해 원동방면군사령관 부르가예프 대장에게 보고됐다고 한다. 솔로킨소장은 베리야의 신임을 받는사람이었고 소련국가안전위원회의 극동방면책임자였는데, 88여단의 내부상황을 김일성을 통해 손금보듯 파악하고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88여단에 있을 때 모스크바에 두번 갔는데 솔로킨 소장이 김일성을 소련 수뇌부에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일성이 모스크바에 갔을때 한번은 몰로토프 (Vyacheslav Molotov, 1890 – 1986)와 만났다고 하는데, 아마 베리아도 만났을 것이다.
위 글의 필자는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 遠東(원동)방면 책임자인 솔로킨소장의 비밀정보원이자 蘇聯(소련)군 대위였던 金日成(김일성)은 원동방면군 사령관 부르가예프대장과 솔로킨소장의 추천으로 스탈린에 의해 北朝鮮(북조선)의 수령감으로 지목됐던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필자 여정(呂政)은 필명이며, 본명은 수기를 연재한 동아일보사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극동 말단 부대의 일개 대위가 모스크바로 가서 수뇌부 인사들을 만날 수 있도록 추천한 사람이 바로 김일성을 잘 알던 이 두사람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을 직접 잘 알았을 리가 없는 모스크바 수뇌부가 김일성보다 상급자인 다른 조선인들을 제치고 김일성을 발탁하게 된 배경이다. 나중에 대일전을 위해 극동으로 온 원수급 극동군 사령관들은 모스크바 수뇌부의 결정을 따라 이를 이행했을 뿐이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즈다노프(Andrei Zhdanov, 1896 -1948)와 만났다는 설도 있는데, 그의 사위가 해방후 북한의 소련군정을 요리한 Terentii Shtykov (1907-1964)이다.
KGB 요원 김일성이 정보를 보고한 KGB 극동방면책임자 솔로킨 소장과 원동방면군사령관 부르가예프 대장은 아래 인물임이 틀림없다.
Naum Semyonovich Sorkin (1899 – 1980) wikipedia
Naum Semenovich Sorkin (1899 – 1980)
Naum Semyonovich Sorkin (Russian: Наум Семёнович Соркин; 11 February 1899 - 16 January 1980)
원동방면군 (극동전선군: Far Eastern Front) 사령관 부르가예프대장
Maksim Alexeyevich Purkayev (Russian: 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August 14, 1894 - January 1, 1953)
따라서 위의 증언은 역사적 사실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할 것이다. Sorkin 소장과 Purkayev 대장의 추천으로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 수뇌부와도 접촉했으므로, 김일성을 처음 발탁한 사람은 나중에 대일본전을 위해 극동에 온 원수급 사령관들이 아니고, 모스크바의 수뇌부에서 먼저 결정되어 극동군 사령부로 내려온 것이다.
결국 대일본전 이전에 KGB 요원 김일성을 자주 접하던 극동군 KGB 책임자 Sorkin 소장과 극동전선군(원동방면군) 사령관 Purkayev 대장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사실상 발탁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과 Sorkin의 관계가 언급된 문헌은 거의 보이지 않으나 러시아어 wikipedia에 간단히 상호 언급되어 있다.
Ким Ир Сен (Kim Ir-sen, 1912-1994) / Соркин Наум Семёнович (Naum Sorkin, 1899-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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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수기 다른 곳에도 88여단내 보선인 빨치산들 중에 소련 안전기관의 비밀정보원이 생겨나 서로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2>
1990.07.08 동아일보 7면
反黨宗派(반당종파) 죄명씌워 數百(수백)명 처형
58年(연) 抗日(항일)인사 대숙청뒤 빨치산 重用(중용)
「붉은一色(일색)」사업땐 모든敎人(교인) 검거投獄(투옥)
金(김), 스탈린格下(격하)에 충격…가짜證人(증인) 내세워 재판「준법殺人(살인)」
...蘇聯(소련)땅에 쫓겨갈때까지 극좌노선의 지배를 받을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어 정치이론을 배우지 못했을뿐 아니라 소학교 교본조차 보지못했다. 蘇聯(소련)땅에 들어가 있는 5년동안 蘇聯(소련)공산당역사와 레닌주의 제문제를 배우기는했지만 무슨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그들이 보고 접촉한것은 전쟁에서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사람들뿐이었다. 그 5년동안에 항일 빨치산들속에는 蘇聯(소련)안전기관의 비밀정보원이생겨나고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악랄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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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전을 개시하기 전의 극동군 편제는 명칭이 극동전선군(원동방면군 : Far Eastern Front)이고 사령관은 Purkayev 대장이었다.
그러다 1945년 유럽전선의 전쟁이 종료되고 대일본전을 준비하면서 극동전선군 대신 극동군 사령부(Far East Command)로 개편하고 만주 동부 전선을 담당하는 극동 제1전선군과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하는 극동 제2전선군으로 나누고, 만주 서부 전선을 담당하는 트랜스바이칼 전선군까지 포함시켜 세 명의 원수를 투입한다. 3개의 만주 전선을 총괄하는 극동군 총사령관은 Aleksandr Vasilevsky (1895-1977) 원수, 극동 제1전선군 사령관은 Kirill Meretskov (1897 – 1968) 원수, 극동 제2전선군 사령관은 Maksim Purkayev (1894 - 1953) 대장이 맡는다. Terentii Shtykov (1907-1964) 중장은 Meretskov 원수를 따라 극동으로 파견되어 와서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을 맡았다.
Soviet invasion of Manchuria
The Far East Command : under Marshal of the Soviet Union Aleksandr Vasilevsky
Eastern Front of Manchuria : The 1st Far Eastern Front, under Marshal K. A. Meretskov
Northern Front of Manchuria : The 2nd Far Eastern Front, under General M. A. Purkayev
Western Front of Manchuria : The Transbaikal Front, under Marshal R. Y. Malinovsky
김일성을 발탁했다고 알려진 극동군 사령관들 Vasilevsky 원수나 Meretskov 원수, Shtykov 중장 등은 이전부터 극동군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고, 대일전 개전을 위해 극동에 처음 온 사람들로 그 전부터 김일성을 알고 발탁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다. 결국 이 사람들이 한 일은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한 모스크바의 수뇌부의 통보를 받고, 김일성을 찾아내어 준비를 시키는 일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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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동부 전선을 담당했던 Meretskov 원수 휘하의 극동 제1전선군 일부가 북한으로 진주해 들어왔다. 북한으로 진격해 들어온 소련군의 지휘관은 25군 사령관 치스티아코프 (1900-1979) 대장으로 북한주둔 소련군정 사령관이 된다.
[ Ivan Mikhailovich Chistiakov (1900-1979) / Ivan Mikhailovich Chistiakov (1900-1979) ]
이외에 북한의 소련군정에 간여한 인물들은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 Terentii Shtykov (1907-1964) 중장, 25군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 (일명 정치사령관) N. G. 레베데프 [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 –1992)] 소장, Andrei Alekseevich Romanenko (1906 – 1979) 소장 등이다.
[평양에 온 NKVD의 Anochin 장군은 아래 사람으로 보이나, 자세한 인적 사항은 검색되지 않는다.
Nikolai Aleksandrovich Anokhin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нохин) Major-General (NKVD) ]
치스티아코프는 주로 군사 쪽을 다룬 모양이고, 북한지역 점령 작전 완료 후에는 정치방면의 실세 스티코프 중장이 사실상 총독 역할을 했다. 로마넨코 소장은 1945년 10월 14일 모란봉 운동장에서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장군으로 치켜세우며 북한 주민들에게 처음 소개한 사람이다.
45년 10월 14일 당시 소련 군정사령관 로마넨코소장과 함께 군중대회에 모습을 나타낸 김일성 1994.07.10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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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1945년 9월 19일 소련 군함 Pugachev 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입항할 때는 북한지도자로 확정된 상태는 아니고,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내정된 상태에서 평양의 사정도 어떻게 돌아갈 지 감안해야 하므로 최종 결정은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만식 선생을 표면적인 지도자로 하고, 김일성이 군사 실권을 장악하는 안도 고려했던 것 같으나, 조만식 선생이 타협을 거부하므로 이내 가택 연금시키고,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으로 독자적으로 권력 기반을 닦아 나간다.
당시 남한에 있던 남로당 당수 박헌영도 소련 외무부에 의해 유력한 지도자 후보로 천거되고 있었는데, 스탈린이 1946년 7월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 시험을 본 후 김일성으로 최종 낙점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가 깨끗하고 오히려 그 점 때문에 투철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소련군부의 지지를 받던 김일성은 그 전에 이미 북한 지역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상당히 구축해 놓고 있었으므로 스탈린 면접은 요식행위로 보인다. 당시는 2차대전 직후라 외무부보다는 군부의 힘이 훨씬 강하고, 군부가 북한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지도자로 선택된 것이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소련군 경력을 선호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곧 소련이 시키는대로 잘 따를 것이라는 믿음을 줘서 일 것이다. 소련을 위해 동족의 정보도 기꺼이 팔아넘기던 인물이었으니까.
"김일성이,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 앞에서 시험 쳐 합격했다고 이야기"
새 교과서들이 덮어준 '김일성과 북한의 8대 치부'조갑제 2011.04.05
<秘史> 황장엽이 털어 놓은 김일성 김대중 이야기조갑제 2010.10.10
내세울 만한 이렇다할 공적도 없고, 국내에 지지기반도 전무하며, 나이도 33세에 불과한 청년 김일성이 일국의 지도자로 자리 잡기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많았으므로, 소련군 요원들이 그를 대중적 지도자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공작을 벌여 나갔다. 그들 중에는 비교적 오래 살아 당시 일에 대해 증언한 사람으로 소련 25군 사령부(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정치담당관 그레고리 코노비치 메크레르 (Grigory Konovich Mekler, 1909~) 중좌(중령)와 NKVD (KGB) 요원 Leonid Timofeevich Vassin (1915~)이 있다. 아래에 이들이 당시 벌였던 공작에 대한 증언을 소개한다.

Grigory Mekler(1909~)는 1944년 소련군에 있는 김일성을 처음 만나 아는 사이 였는데, Meretskov 원수가 김일성을 아느냐고 물으며 그를 찾아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하도록 지시 받았다고 한다. Mekler는 해방후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 25군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으로 1년여를 김일성과 같이 다니며, 정치적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법을 교육시킨 사람(spin doctor)이고, 몇년 전 당시 일에 대해 증언한 것이 아래와 같은 러시아 언론들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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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비밀파티' 김일성 '요정정치'가 원조? dailynk 2005-10-07
술-여자 이용한 용인술, 父子 닮은꼴
북한 소련 군정 정치담당관 그레고리 메크레르 (Grigory Mekler)씨 증언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Soviets Groomed Kim Il Sung For Leadership (Interview with Soviet handler)
원래의 Vladivostok News Link : http://vn.vladnews.ru/News/upd10.HTM - 현재 작동하지 않음
[Marshal Meretskov, Commander of the Far East Front, asked Mekler whether he had heard of a man called Kim Il Sung.]
극동군 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가 Mekler에게 김일성을 아느냐고 물은 것은 모스크바의 수뇌부로부터 김일성에 대한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극동의 사령관들이 김일성을 처음 발탁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The Moscow Times, July 22, 2004
(The Moscow Times, 22 July 2004 | Issue 2967 원주소는 http://www.themoscowtimes.com/news/article/kim-il-sungs-soviet-image-maker/229454.html 이나 유료임.)
위 기사들은 아래 국내 사이트에 소개 되어 있다.
그리고리 메클레르,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구소(舊蘇) 군정 치밀한 작전” 동아일보 2004-07-23
"김일성은 종주국 소련이 만들었다"..구소련 예비역중령 폭로 뉴스앤피플 유지호 편집위원.전 예멘대사
겨우 소련군 중령에게 발탁되어 조선민족의 "위대한 수령"이 된 김일성
1945년 10월 14일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개최된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시민 대회’ 막간에 김일성(가운데)이 소련군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오른쪽)와 강미하일 소좌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일성은 시민대회 직전 소련으로부터 무공훈장을 수여받고 갑자기 대위에서 장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사진에서 메클레르는 김일성이 수여받은 무공훈장을 만져보고 있다. 소련 극동군 정보 및 정치공작 담당 과장이던 메클레르는 1945년 9월부터 1년여 동안 김일성을 대중성 있는 정치지도자로 조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출처: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⑤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동아일보 2004-09-12
소련 군정기의 북한 사진 1945 ~1947 (메클레르의 다른 사진도 있음)
金日成(김일성)은 蘇(소) KGB 情報員(정보원)이었다 1990.04.22 동아일보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내정되고 나서, Grigory Mekler(1909~) 나 NKVD 요원 Leonid Vassin(1915~) 등의 소련 요원들이 북한으로 들어가 거의 매일 김일성과 만나 국내에 무명이고 기반도 전무한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법도 교육하고, 정치 세력을 구축하는 일을 도운다. 조만식 [曺晩植, 1883. 2. 1 ~ 1950.10.18] 선생등 정적을 일본 스파이로 몰아 감금하고, 김일성이 백두산의 호랑이라고 조작하여 선전하고, 출생지 만경대를 소련군들이 단체로 방문하는 등 김일성을 지도자로 저항없이 받아들이도록 공산당식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중을 속이는 온갖 지저분한 정치 공작을 벌여 나가게 된다.
Jasper Becker의 Rogue Regime에 실린 Leonid Vassin의 이에 대한 증언이다. (p.51)
As Kim had no credentials or support, the NKVD went on to organize his own political party for him that they called the "The Workers Party." Soon they forced the other parties to merge with it and thus obscured its origin.
We manipulated the names of the parties to create a smokescreen to hide our intentions," recalled Vassin. "Then we had to destroy real heroes of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General Anochin of the NKVD had Cho Man-sik framed by spreading accusations that he was a Japanese agent so the Japanese had released him from jail just before their surrender. After this story was broadcast over the radio and put in the newpapers, he had Cho put under house arrest. "This is how the hero became the enemy and how the puppet we pushed forward became a hero," Vassin declared.
As Kim's nom de guerre was widely associated with an older guerilla who had performed legendary feats, many suspected him of being a complete fraud, so the next step was to build up Kim's image. "We elevated him into the status of a hero to bolster his work as a leader of Korea," Vassin said. "We had to prove he was a real person, her tiger of Mt. Paektu. We had to find his relations at the village of Mangyoungdae. We also had to discredit the information put out in South Korea that he wasn't the real Kim Il Sung. We had to prove he was an active fighter who had liberated the motherland."
Vassin said that he even suspected an assassination attempt, made at one of the first public meetings he addressed, was staged to burnish Kim's image. In March 1, 1946, Kim was sitting on a podium in Pyongyang when a youth in the crowd threw a grenade at him; it was caught by a Soviet soldier. The handmade grenade blew off part of the soldier's arm, but did not cause further damage. The Soviets blamed Syngman Rhee for the attempt on Kim's life and used the event go illustrate the sacrifices the the Soviet Union was making on behalf of Korea.
조만식 선생같은 진짜 영웅은 일제 앞잡이로 몰아 적으로 만들고, 김일성 같은 꼭둑각시를 영웅으로 둔갑시켰다. 김일성이란 이름이 더 나이 많은 전설적인 공을 세운 게릴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가 완전한 사기라고 의심하니 김일성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도 그 다음으로 해야할 일이었다.
Vassin은 남한에 퍼진 가짜 김일성 소문에 대해서도 대응을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해방일보 기사 같은 것이 그런 예인 것 같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창간된 극좌익지로 정판사사건으로 폐간되었던 해방일보 [解放日報] 1946년 4월 8, 9일자는「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이란」이란 주제로 권용호의 기고문을 실었는데, 김일성의 가짜 시비의 배경에 대해 "나이가 어리다는 데서 나온 평범한 해석으로 친일파 반역분자들이 진보적 민주주의 진영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오늘날 남한 좌파들의 주장과 완전히 똑 같다.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한 것도 소련이고, 대중의 주목을 받을만한 경력도 정치 기반도 없고,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교육시키고, 권력 기반을 다져주는 일까지 모두 소련이 떠맡아 했는데, 그만큼 이용가치가 높은 탓이었으리라. 같은 책 p.50에는 Vassin이 "우리는 김일성을 거의 백지 상태에서 [훌륭한 정치 지도자로] 창조해 내었다"고 증언한다.
After the Soviet Union collapsed, it became clear just how clumsily the Soviets had installed Kim Il Sung. “We created him from zero,” boasted NKVD Officer Leonid Vassin. "We did very crudely." Vassin worked in the 7th Department of Special Propaganda of the 25th Army in charge of military propaganda in enemy territory, and says he was in contact everyday with Kim during his first six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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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대중적 지도자로 만드는 공작을 담당했던 NKVD (KGB) 요원 Leonid Vassin (1915~ )의 저작물이 스탠포드 대학 Hoover Institution Archives 에 있다. 김일성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으나, 스탠포드 대학에 직접 가야만 볼 수 있다.
Vasin, Leonid Timofeevich, 1915-
Biographical History
Major, Soviet army; political officer, North Korea, 1945-1947.
From the finding aid for Leonid Timofeevich Vasin writings 1992-1993 (Hoover Institution Archives )
Overview of the Leonid Timofeevich Vasin writings
Abstract: Relates to Grigorii Semenov, Cossack ataman and White Russian commander during the Russian Civil War; and to the North Korean political leader Kim Il Sung.
국내 언론에 보도된 Leonid Vassin의 증언
[曺晩植제거-金日成등장 증언요지] 1 연합뉴스 1992-10-01 10:14
[曺晩植제거-金日成등장 증언요지] 2 연합뉴스 1992-10-01 10:15
[曺晩植제거-金日成등장 증언요지] 3 <完> 연합뉴스 1992-10-01 10:18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해방직후 北韓(북한)진주 蘇(소)장교 레오니트 바신 資料(자료)제공 “「金日成(김일성)집권」蘇(소)의 차선책이었다” 1992.10.19 동아일보 9면
金(김) 平壤(평양)도착사실 2개월동안 숨겨
민족주의자 기피┉曺晚植(조만식)선생 제거
조선공산당대회 연설문 蘇(소)측서 써준것
金日成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 46년3월 蘇軍장교 방어로 연합뉴스 1991-08-14 08:18
"46년 金日成암살미수사건은 KGB 조작극" 연합뉴스 1994.12.15 (목) 오후 2:45
<화제> 김일성과 蘇軍장교 노비첸코의 `기이한 인연' 연합뉴스 1998.03.10 (화) 오후 1:49
蘇軍(소군) 北韓(북한)서 日軍(일군) 항복받을때 한국인 曺晩植(조만식)선생 유일 참석 1992.10.01 동아일보 4면
日軍항복식에 曺晩植 유일지도자로 입회 연합뉴스 1992.10.01 (목) 오전 9:29
日軍항복식에 曺晩植 유일지도자로 입회 연합뉴스 1992.10.01 (목) 오전 10:12
Vassin 이 조만식 선생을 가택연금한 사람으로 증언한 NKVD의 Anochin 장군은 [ Nikolai Aleksandrovich Anokhin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нохин) Major-General (NKVD)]으로 보이나 자세한 인적 사항은 검색되지 않는다. Anokhin은 최종 계급이 소장인데, 북한에 있을 때의 계급은 미상이다.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추천한 NKVD 극동 책임자 Naum Semyonovich Sorkin (1899 – 1980) 소장은 소련의 대일전 개시 후는 만주 동부 전선 담당 극동 제1전선군 사령관 Kirill Meretskov (1897 – 1968) 원수 휘하에 있었으므로, Anochin도 Sorkin 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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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발탁 과정에 대한 아래 동아일보 보도가 맞다면 김일성을 잘 알고 있던 NKVD 극동 책임자 Sorkin 소장이나, Purkayev 대장이 김일성을 모스크바 수뇌부로 바로 추천한 것이 아니고, 북한 지도자감을 추천 해 올리라는 수뇌부의 지령을 받은 극동군 총사령관 Vasilievsky 원수에게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극동군 사령부가 김일성을 면접하고 긍정적인 보고서를 수뇌부에 올리고, NKVD 총책 베리아가 이를 검토한 후 스탈린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판단된다. 김일성이 최종 결정된 것은 45년 9월 중순쯤으로 보이며, 그 직후 9월 19일 소련군함 푸가초프호 편으로 원산항으로 입북한다.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 동아일보 2004년 8월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⑬소련은 왜 일사불란했나 동아 2004-11-14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⑭北단독정권 기반 어떻게 닦았나 동아 [2004-11-21]
김일성은 평양에 와서 10월 초까지도 김영환이란 가명 사용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⑮소련군이 과연 해방군이었을까 동아 [2004-11-28]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⑤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동아 2004-09-12
소련이 김일성을 찾은 것은 소련군이 평양에 사령부를 개설한 뒤였다. 그해 8월 하순과 9월 초순 사이에 스탈린이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데르 바실리예프스키 원수에게 “북조선을 소련의 뜻에 맞게 이끌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해 보고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소련 극동군이 김일성 심사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 국방부에는 지금도 그 심사기록이 남아 있다.
●스탈린, 비공개리에 직접 김일성 면접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북조선으로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세계혁명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오.”
심사기록에 나와 있는 소련 극동군 관계자와 김일성의 대화록이다. 심사 결과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추천했다. 추천서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받고 있음.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음”이라는 평가가 붙어 있다. 추천서를 받은 베리야는 “좋다”고 평가한 뒤 다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탈린의 번견(番犬)으로 무고한 시민들의 투옥과 고문에 앞장서 공포정치의 상징이 된 베리야는 이후에도 줄곧 김일성의 옹호자가 된다.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의 정보 및 정치공작 담당 과장이던 그리고리 메클레르 예비역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베리야의 보고서를 읽은 직후 김일성을 비공개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을 했다. 이에 김일성이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예, 예”를 연발하자 스탈린은 흡족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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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스탈린이 1953년 한국전쟁 중 갑자기 죽었는데, 베리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베리아 자신도 그 해말 처형 당한다.
"스탈린 3차대전 일으키려다 독살" 한국일보 2003/03/18
출처-http://botw.egloos.com/11033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