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소학교를 다녔고, 중학교 중퇴가 최종학력이며, 이후 계속 중국인들과 뒤섞여 살거나 빨치산 활동을 했기 때문에 우리 말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한국어는 서툴고 중국어가 더 익숙하였다. 한국서 태어나 어릴 때 미국으로 가서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 대다수가 영어가 익숙하고, 한국어는 서툰 경우에 비교될 수 있다.
해방 전후 시기에 김일성을 접했던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한국어 능력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
박일(朴一) 전 김일성대 부총장의 증언:
박씨는 『김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면서 김이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설명했다.
김의 행적과 관련,박씨는 『김은 평범한 인물이었으며 일제와 맞서 싸우지도 않았다.김은 단순히 일제로부터 도망쳐 빨치산에 가담했으나 싸울 기회도 없었다』고 말했다.
....
박씨는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1백여편의 그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김의 지적능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金日成(김일성)은 蘇(소) KGB 情報員(정보원)이었다 1990.04.22 동아일보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1945년10월14일 平壤市(평양시) 모란봉운동장. 꼭 50일전 北朝鮮(북조선)에진주한「蘇聯(소련)붉은군대」와「抗日(항일)유격전사 金日成(김일성)장군」을 환영하는 시민대회가 열렸다. 방금 사회자의 소개로 30대초반의 앳된 젊은이「金日成(김일성)장군」이 연단에 등단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8만여명의 청중들은 너도나도 이 抗日(항일)유격영웅을 조금이라도 더 잘보기위해 앞으로 밀고 나오며 고개를빼들었다. 33세의「抗日(항일)영웅」은무척 흥분한 듯했다. 그는"일본의 모진 탄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광복의 력사적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렬렬히 싸워온 혁명투사와 동포여러분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면서"우리 인민의 해방위업을 도와준 소련의 영웅적 붉은군대에충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金(김)장군」의 연설솜씨는 서툴렀다. 더듬거리며 미리 써갖고온(사실은 소련의 로마넨코장군이써준 것이다)원고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대위에서 將軍(장군)으로 넥타이를 맨 정장에 가슴엔 소련무공훈장을 달고 蘇(소)측에 의해「장군」으로 소개된 金日成(김일성). 그는그러나 바로 전날,아니 환영식직전까지만해도 붉은군대의 대위계급장을 단 소련 遠東(원동)군사령부88독립여단의 대대장이었다.
김허남(金許男) 전 함북도민회장 증언 미래한국 2005년 07월 14일
[1945년 10월 14일 10시에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개최된 항일 전사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시민대회 상황]김일성 장군이라는 사람은 30대 초반에 165cm가 조금 넘게 보이는 키에 살집이 약간 붙었고 좀 작아 보이는 듯한 감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는지 검게 보였는데 감색 양복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뒷머리를 버쩍 치켜 그 사람은 몸 어느 구석에서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의 티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미리 써 가지고 나온 원고마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한층 더 실망했다.
........................................
하와이대학 서대숙 교수의 견해
서대숙은 김일성이 전설적 영웅으로부터 모든 것을 가로챈 엉터리는 아닐지라도 해방 당시의 김일성은 “그의 혁명활동 경력이 서울에 모여 있는 많은 저명하고도 탁월한 정치지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전설적 영웅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도용한 사실”이 있는 “33살의 무명청년”이었다고 주장했다. 서대숙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공산주의자의 일인으로서 중국인으로부터 교육과 훈련을 받고 만주에 있어서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지도체계 속에서 승진하였던 이방인”으로 자신의 경력의 비(非)한국적 측면이 폭로되는 것을 꺼리는 인물이었다. 서대숙은 “김일성의 과거의 경력에서는 그의 성공을 보장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출처 :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한겨레21 제381호 2001.11.01]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
일본공산당원 출신 기자 하기와라 료(萩原 遼)씨 증언
소련군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중국공산당 산하 抗日 빨치산 출신 장교 金日成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발탁하여 1945년 9월 북한에 데리고 들어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적은 없다.‘朝鮮戰爭’이란 책을 쓴 일본공산당원 출신 기자 하기와라 료(萩原 遼)씨는 “이때 김일성은 조선인의 의식을 갖지 않은 일종의 이방인이었다”고 지적했다.
해방후 북한서 활동한 NKVD (KGB 전신) 간부 Leonid Vassin(1915~) 소좌의 증언
Kim Il Sung (15 April 1912 – 8 July 1994) wikipedia
According to Leonid Vassin, an officer with the Soviet MVD, Kim was essentially "created from zero." For one, his Korean was marginal at best; he'd only had eight years of formal education, all of it in Chinese. He needed considerable coaching to read a speech the MVD prepared for him at a Communist Party congress three days after he arrived.
Jasper Becker,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 p.50
NKVD Officer Leonid Vassin의 증언
"When Kim appeared we noticed he was not fully fluent in Korean."
국내 언론에 보도된 Vassin의 증언
[曺晩植제거-金日成등장 증언요지] 2 연합뉴스 1992-10-01 10:15
金은 만주 빨치산 부대에서 투쟁했다면서 자신은 어느 중국 촌락에서 중국국민학교 7학년을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제7부'에는 10여명의 한인출신 소련군장교들이 있었는데 金에게 무수한 질문을 던진 이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도 서툴지만 金역시 모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金日成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 46년3월 蘇軍장교 방어로 연합뉴스 1991-08-14 08:18
金은 우리소조에 자주 찾아왔으며 우리의 주요임무는 제1차 조선공산당대회를 앞두고 그의 연설문을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조선인 출신 소련군장교들은 金의 조선어지식이 매우 부족한 반면 중국어는 꽤 알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이 때문에 상황에 적절한 연설문 작성에 애를 먹었다.
"46년 金日成암살미수사건은 KGB 조작극" 연합뉴스 1994.12.15 (목) 오후 2:45
-------------------------------------------------
앞의 글에서 밝힌 대로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은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이지만, 내세울만한 큰 전과는 없었더라도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조선 독립운동인가는 회의적이다. 당시 김일성이 중국어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우리 말은 매우 더듬거렸다면 거의 중국에 동화된 것이 틀림없고, 그런 사람이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는 것도 사실로 보기 어렵다. 당시 김일성이 조선 독립과 민족에 대한 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우리 말도 제대로 못 할 수가 있었겠는가? 김일성이 설사 항일투쟁을 했다고 해도 중국을 위한 투쟁이었을 뿐이다.
김일성이 속해있었다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비록 조선인이 다수 있기는 했지만, 중국 공산당 산하 조직인데다 만주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조선 독립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 (동북항일연군, 東北抗日聯軍) wikipedia
The army was a mixture of various sources, with the same objective – expelling Japanese out of Manchuria.
일제와 만주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이 강화되자 김일성 부대는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으로 피신하였고, 소련군 88여단에 들어간다. 이 부대도 만주 지역의 정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소련이 만주을 차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고, 조선 정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소련은 자유시 사변과,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조선 독립운동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나라인데, 거기에 가서 빌붙어 살았다. 조선 독립에의 의지가 강렬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일제의 조선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하던 1940~1945년 기간에 소련군에 피신해서 아무 항일 활동도 없이 편안히 지낼 수 있었겠는가? 이상조(李相朝, 1916~) 전 소련주재 북한대사도 김일성이 고난이 가장 극심하던 일제말 1940년대에 소련으로 피신해서 편안히 보낸 것을 극도로 비판하고 있다. 더구나 김일성은 소련군 88여단에 있을 때 비밀 경찰 NKVD (KGB 전신) 요원으로 부대내의 항일연군 빨치산 동료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해 상부의 신임을 얻었고 이것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소련서 출생한 두 아들 이름을 소련식으로 유라(1942~2011)와 슈라(1944생)로 지은 것으로 보아 민족 의식이 거의 없던 사람이다. (차남 슈라는 일찍 죽고, 장남 유라가 정일로 개명한 것은 1953년이라고 한다.) 소련서의 그의 행적을 보면 독립을 쟁취해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전무하고, 소련에 정착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정상진(鄭尙進, 1918~) 전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의 증언 : p,8 김일성 및 어린 김정일에 대한 소략한 증언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북한서 숙청된 고려인 80인의 수기 : (미의회도서관)
미의회 문헌 중 김일성 일가의 소련 88여단 생활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나온다.
김창국(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 대좌
[p.5] [88여단 여단장 대좌 주보중, 주로 한인들로 구성된 제1대대 대대장 대위 김일성]
88정찰여단에는 근본적으로 만주에서 항일 빨찌산 투쟁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하기 때문에 쏘련 국경을 허가없이 무조직적으로 넘어온 김일성 이하 한인 부대들과, 공식적 허가하에 국경을 넘어다니며 공작하던 중국 빨찌산 부대들과, 쏘련 지역에 살던 한인들이 정찰학교를 필한 후 배치된 인원이 약 30명 가량 있었으며 지방 동양족으로 조직된 박격포 중대도 있었다. 김일성 부대는 처음 국경을 월경하다가 국경수비대에게 몽땅 체포되어 블라지보스또크에 수용소에 감금되여 있다가 중공당이하 주보중 여단장이 보증을 서고 석방식혔으며, 자기 부대에 편입 식혔다. 1940년도에 아지 주보중 부대에 편입되기 전에 김일성 부대는 블라지보쓰또크 주변 오께안쓰크에서 채소 농사를 짛었다고 주보중 부대 사람들은 말하였다.
대대장 김일성이는 간호장 김정숙에게 장가들어 부대 주변 군관 사택에서 살아스며, 그때에 벌서 1942년도에 탄생한 유라가 자라고 있었다. 아이는 자라고 있어도 정숙이는 군의소에서 일하고 있어스며, 많은 군무원들에게 항상 따뜻한 간호를 하여주었다. 1944년 말엽에 또 아들 하나가 태여났댔는데 그 아이는 수라라고 불렀으며, 정숙이는 부대내여서는 왈랴라고 불렀다.
蘇軍(소군)시절 金日成居處(김일성거처) 확인 1991.12.04 경향신문
하바로프스크 이웃 농촌서 통나무집으로 50年前(연전) 거주, 현재 KGB가 관리
북한의 金日成(김일성)이 전처金正淑(김정숙),아들 正日(정일)과함께1940년부터 45년까지 5년동안 살았던 통나무집이 소련의 러시아공화국 하바로프스크근처 와츠고예라는 농촌에서 국내 취재진에 의해최초로 확인됐다.
Vyatskoye, Khabarovsk Krai 김정일 출생지
재일교포 김찬정(金賛汀)씨가 중국과 소련 등지에 사는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시절과 소련군 88 여단 시절의 동료들이나 지인들을 직접 찾아가서 만나 인터뷰한 기사가 "김찬정(金賛汀), "빨치산 만가(輓歌), 김일성과 88 독립여단," 『신동아』, 1992년 7월, pp. 360–387"에 나와 있는데, 김일성의 만주와 소련에서의 행적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
김일성의 중국에서의 빨치한 활동과 소련군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래 글들에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빨치산 시절 그가 거느린 병력은 많을 때는 100 명 가량되었다가 토벌로 인해 점차 인력 손실이 커지면서 20 명 정도로 줄어들기도 했다. 마지막에 견디지 못해 소련으로 넘어간 것이다. 현대의 군대로 치면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내의 위치는 위관급(尉官級) 초급 장교에 해당되며, 소련군에 갔을 때도 그에 상응하는 계급을 부여받은 것이다. 크게 내세울만한 전공도 없었던 그가 장군으로 불렸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다. 소련군 대위로 있다가 북한에 처음 들어와서 1945년 10월 14일 모란봉 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및 소련군 환영대회를 할 때 소련군이 무공훈장을 수여하고 느닷없이 장군으로 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 1990.04.22 동아일보
金(김)은 蘇(소)KGB 情報員(정보원)이었다
抗日(항일)유격대 시절 隊員(대원) 고작 20여명 지휘
平壤入城(평양입성) 연설문 蘇將軍(소장군)이 써준것 읽어
덧니 많아 모두 뽑고 틀니로…崔賢(최현)이 金貞淑(김정숙)과 결혼 중매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2> 1990.04.29 동아일보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八路軍(팔로군)이 주축
金(김),정권수립 7개월전 이미 軍(군) 조직 전투력 강한 압록강支隊(지대) 불러들여
32年(연)에 滿洲(만주)서「조선人民革命軍(인민혁명군)창건」주장은 꾸며낸 이야기
------------------------------------------------------------
소련은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 전선의 전투가 끝나자 대일전에는 참여하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진 순간에 1941년 4월에 체결된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을 일방적으로 깨뜨리고 8월 8일 기습적으로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와 조선으로 진격한다.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소련에 의해 무너져 점령 당하는데, 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모택동이 중공정부를 수립하고, 스탈린으로부터 만주를 돌려받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한다. 만주는 6.25 남침 직전인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공에 반환되었다. 모택동이 만주를 차지할 명분이 약했던 소련으로부터 이를 돌려받은 것이 어쩌면 중국이 한국전에 참전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만주 때문에 빚어진 중소 갈등과 한국전의 관계)
소련은 8월 9일 웅기와 나진으로 진격해 들어왔는데, 이날 일본은 나가사키에 원폭을 추가로 얻어맞고 이튿날 10일에는 비공식적으로 항복 의사를 밝히고 15일 드디어 항복을 선언 한다. 일본 패전에는 소련이 한 역할은 거의 없고, 소련이 한반도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들어온 것도 허울좋은 구호일 뿐 한국을 점령하겠다는 야욕을 실행한 것이고, 그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 한국말도 잘 못하고 중국인이나 다를바 없던 김일성이다.
김일성은 운좋게 스탈린이 북한 지도자로 발탁해 주지 않았더라면 기껏해야 중국의 조선족이나 소련의 고려인이 되었을 사람이고, 조선을 위한 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
Soviet Conquest of North Korea
북한으로 진격해 들어온 소련군의 지휘관은 25군 사령관 치스티아코프 (1900-1979) 대장으로 북한주둔 소군정 사령관이 된다. [ Ivan Mikhailovich Chistiakov (1900-1979) / Ivan Mikhailovich Chistiakov (1900-1979) ]
아래는 소련군 88정찰여단 시절의 김일성 사진이다.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최룡해의 부친 최현 (崔賢, 1907 ~ 1982) 및 안길(安吉, 1907 ~ 1947)인데, 모두 동북항일연군 산하 빨치산 출신으로, 소련군에 들어갔다가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온다. 클릭하면 확대된다.
-------------------------------------------------
황장엽씨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말은 아래와 같다.
.................................
(사) 북한민주화위원회 / 황장엽 강좌 / 민주주의철학강좌
북한의 인권문제 1999년 5월 15일
북한의 인권문제 (3) : ①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나는 1958년 초부터 7년 이상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하였지만, 그로부터 해방 전에 주체사상이나 주체를 세 울데 대하여 논의하였다는 말을 한번도 들은 일이 없다. 오히려 그때
내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는 "항일빨치산이 크게 투쟁한 것은 없지만 안한 것보다는 낫다"든 가, "그때 조선의 지도자로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다"든가 하는 따위의 비교적 겸손한 말이었다.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항일빨치산 투쟁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은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이 앞장서 조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
아래는 20년 가량 홍콩과 북경 등지에 체류했던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정통한 언론인
Jasper Becker (b. 1956)의 저서에 나오는 김일성에 대한 기록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중국에서 교육받아 겨우 문맹을 면한 정도이고, 한국어에 서툴고, 민족주의자로서의 정체성도 의심 스럽고, 만주의 항일 게릴라 활동이라는게 약탈, 납치 등등 마적단의 행위와 구분하기 어렵고, 소련이 꼭둑각시로 픽업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나 소련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일성의 만주와 소련에서의 활동에 대한 가장 적확하고 신랄한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Jasper Becker -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History of Kim Il Sungpp.45~46
Kim was educated in Chinese at a local school and then spent the next 20 years in the service of either the Chinese or the Soviet Communist Party.
So his loyalty to the cause of Korean nationalism is questionable. By the time he returned to live in Korea,
his Korean language skills were so poor that he needed extra coaching to be able to make speeches before Korean audiences.
..........
Kim Il Sung returned to Korea to serve as Stalin's handpicked puppet for the occupying Soviet forces.Resistance to the Japanese was led by Chinese Communists as well as many bandit groups that operated in these lawless times; in many respects their activities were indistinguishable. The barely literate Kim left school at age 14 and joined a Communist study group for which he was imprisoned for eight months;
in 1932, at age 20, he joined a Chinese Communist Party(CCP) guerilla group. He spent the next ten years with a small group of up to 200 men and women organizing hit-and-run raids against Japanese interests. They financed their guerilla activities by murdering and pillaging wealthy but defenseless Korean villagers. Such groups often gained fresh recruits by kidnapping young men from villages. Kim eventually served in a minor command in the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 which at its peak in the 1930s had some 30,000 partisans.
Kim Il Sung took orders from Chinese political commissars until 1945;
his mission was not to gain Korean independence but to win power in China and to annex the resource-rich Manchurian territories. While the Japanese were creating their overseas empire, they scattered over 4 million Koreans, recruited as soldiers, guards, miners, asilors, workers, and "comfort women,' aound Asia.
Many ethnic Koreans joined Mao's armies and some rose to the highest ranks of the Chinese People's Liberation Army. Others stayed in the service of the Soviet Union, which after 1945 seemed set on annexing Manchuria as well.
The exact nature of Kim's patriotism at this time is ambiguous. Had the Soviet secret police not selected him for their mission, Kim Jong Il (
Kim Il Sung의 착오) might well have stayed on in China, or the Soviet Union.
------------------------------------------------------------------------
김일성은 20세 되던 1932년 중국 공산당 산하의 남녀 200여명으로 된 게릴라 조직에 가담하여 1940년말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갈 때까지 8년 가량 빨치산 활동을 했다. 게릴라 활동의 자금은 살인이나, 부유하지만 무방비 상태인 마을의 한국인들을 약탈하여 조달했다. 자주 마을에서 젊은이를 납치해와 게릴라 신병을 충원했다. (They financed their guerilla activities by murdering and pillaging wealthy but defenseless Korean villagers. Such groups often gained fresh recruits by kidnapping young men from villages.)
일제시대 신문을 보면 만주의 빨치산들은 방화, 납치, 약탈을 일삼고, 양귀비를 재배하여 아편 밀매를 하는 등 여느 마적단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공산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 차이일 지는 모르겠으나.....물론 그 과정에서 일본이나 만주 군경과 싸우기는 했는데, 항일이 목적인지 마적질이 목적인지 헛갈린다. 그들의 가장 빈번한 활동은 식량 약탈인데, 1937년 6월 4일밤의 보천보 습격 사건 때도 상당량의 식량을 약탈해 갔다고 당시 언론에 도보 되었다.
食糧缺乏(식량결핍)으로來襲(내습) 1937.06.14 동아일보 2면 기사
普天堡第一線(보천보제일선)을視察(시찰)한 磯崎事務官歸任談(기기사무관귀임담)
일제시대 신문 검색 : 기간을 1930-1944 로 설정하고 金日成, 共匪(공비) 등으로 검색일제시대 조선일보 검색 일제시대 동아일보 검색-----------------------------------------------------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 시인이 일제시대에 간행한 잡지《삼천리(三千里)》에는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혜산진 주재 양일천(梁一泉) 기자의 비적 수괴 김일성에 관한 글이 2편 실려 있다. 여기에 보면 당시 표면적으로 항일을 내세운 빨치산들이 양민들을 상대로 약탈, 방화, 납치를 일삼아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1937년 10월 01일)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삼천리(三千里) 제10권 제11호》(1938년 11월 01일)
길림성(吉林省) / 장백현(長白縣), 무송현(撫松縣) 지도 :
장백현은 백두산 남서쪽 혜산진 건너편이고, 무송현은 장백현의 북쪽이다. 간도는 연길이 있는 지역으로 오늘날 연변 조선족 자치주 일대이다.위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의 행적은 보천보 사건(1937년 6월 4일)을 전후한 시기의 것이나,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진술은 뒤죽박죽이라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군경의 추적을 피해야하는 빨치산 수괴가 피납자나 부하 대원들에게 자신의 정확한 신원을 알려주었을 가능성은 낮은만큼, 대충 둘러댄 말을 듣고 진술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김정부(金鼎富) 씨는 마적단 피납 기간이 1936년 8월 ~1937년 4월이고, 1936년 12월 16일에 김일성과 대화를 나누었다는데, 김일성의 말로는 장백현에 온지 3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나이는 24세(1913년생?)라고 하니 앞뒤도 맞지 않는다. 간도에 부모와 처자가 있으며 잘 살고 있다고 하고, 본관이 선산김씨라고 하니 전주김씨이고, 부모는 죽었으며 처자도 없던 북한 김일성은 아니다.
5년간 김일성 부대에 있다 귀순한 여자 대원들의 증언으로는 김일성을 처음 본 것이 1937년 봄 무송현에서라고 하니 장백현을 거점으로 한, 김정부씨를 납치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나이는 1938년에 27세라고 하니 1912년생으로 보이지만, 나이에 비해 신중하고 노련하다고 했으니 실제 나이는 더 많았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