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내세우는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의 가장 중요한 항일 투쟁 실적은 보천보 사건이다. 남한에서는 대개 1990년 이전까지는 북한 김일성 가짜라는 설이 퍼져 있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는 좌파들이 주도하면서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여 별다른 명확한 기록적 근거없이 자신들의 희망 사항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글에서는 북한 김일성과 보천보 사건을 지휘한 김일성이 동일인인가에 대해 근거 자료를 제시하며 검토해 본다.
보천보(普天堡) 사건은 1937년 6월 4일 밤에 일어났고, 동아일보가 당시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김일성(金日成)과 최룡해의 부친
최현 (崔賢, 1907 ~ 1982)이 이끄는 두 빨치산 부대가 연합하여 공공건물 다수를 불태우고 식량을 약탈해간 것으로, 인명 피해는 일본인 경찰 5명, 조선인 경찰 2명, 일본 민간인 2세 여아 포함 2명 사망과 부상자 다수였다. 이 사건 직후부터 국내의 연루자를 색출하여 188명을 기소하게 되는데 이를
혜산사건(惠山事件)이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수 언론이 같은 해 11월 13일에 보천보 사건의 주모자 김일성(金日成)이 사살되었다고 11월 18일자로 보도한 것이다. 이러한 당시 기사가 알려지게 되는 것은 일제시대 신문에 대한 접근과 검색이 용이해진 근자에 와서의 일이다. [아래 참고]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京城日報) 기사에 나오는 보천보 사건 김일성의 신원은 제6사장으로 함경남도 출생이며, 나이는 36세(1902년생)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했다고 하였는데, 보천보 사건 5개월 뒤인 11월 13일에 사살되었다고 보도한 것이다. 같은 날자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김일성 사살을 보도하였고,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인 월간(月刊)『철심(鐵心)』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보도로 보아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이며, 1937년 11월에 죽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지휘한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측은 일본 군당국이나 검찰이 김일성 사망을 확인하는 공식 기록이 없으므로 이러한 보도는 믿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김일성 사살 보도 후에도 살아있는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계속 나오므로 김일성 사망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일성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여러 명이었던 것이 확실한 만큼 이 때문에 보천보 김일성이 사살되지 않고 계속 살아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보천보 사건 직후 국내의 연계 조직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혜산사건(惠山事件)이 일어났는데, 1939년 8월 31일자로 조선총독부 고등법원(高等法院) 검사국(檢事局) 사상부(思想部)에서 발행한 "사상휘보(思想彙報)" 20호에 최종 수사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보천보 사건 주모자 김일성의 신원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본명 김성주 (金成柱), 당년 29세의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간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동 지방에서 자라 비단(匪團)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현재 그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이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라는 유일하고 결정적인 근거로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정보 역시 김일성의 출생지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와 본명은 맞으나 나머지가 사실과 다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김일성은 당시 27세였으며, 그가 어려서 이주한 무송(撫松)은 간도 지방이 아니고,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1892 ~ 1932)은 193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혜산사건의 수사 기록에는 김일성의 신원이 경성일보 보도와 유사한 증언도 있다. 따라서 이 기록 하나만으로 보천보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신원 진술이 애매하고 엇갈리는 것은 빨치산 부대장들이 자신의 정확한 신원을 부하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혹시라도 체포된 부하들이 자신의 정확한 신원을 실토하게 되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사상휘보의 기록이 북한 김일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더라도, 보천보 김일성은 죽고, 그가 이름을 물려받아 김일성 행세를 했기 때문에 나온 증언일 수도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위 기록으로 보천보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동일인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사살되었다는 언론 보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
일본으로서는 혜산사건처럼 보천보 사건의 국내 연루자를 샅샅이 색출하여 처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건의 주모자 김일성을 끝까지 추적하여 죽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보천보 사건과 유사한 1935년 2월 동흥 습격 사건의 주모자
이홍광 [李紅光, 1910∼1935]도 사건 5개월 뒤 사살되었다. 이런 사건은 일제가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분명하므로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도 사살된 것이 맞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혜산 사건에서 보듯이 국내 연루자가 188명이나 기소된 것도 어릴 때 만주로 가서 국내에 연고가 별로 없었고, 우리 말도 서툰데다 당시 25세에 불과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주도했다고 보기 어렵게 한다. 하지만 경성일보 보도대로 사살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모자라면 함경남도 출신이고 나이도 지긋하므로 같은 도내의 보천보 인근 혜산 등지에 동조자를 다수 규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홍광 [李紅光, 1910∼1935] 연구(硏究)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당사자라는 근거는 북한의 주장 외에 이를 뒷받침하는 일제시대 기록은 사상휘보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의 주장을 지지하는 남한 학자들은 기존의 가짜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논파한 후, 과거 남한 정권이 이러한 가짜설을 조작해내었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가짜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놓은 주장 중에 일부 잘못된 것도 있지만, 모두 논파 되었는지는 의문이고, 설사 모두 논파 되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북한의 주장이 맞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가짜의 근거로 제시된 해당 주장들이 틀렸다는 증거가 될 뿐이고, 김일성이 가짜일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북한 주장이 맞다는 것이 문헌으로 입증되어야 가짜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모자가 맞다는 주장은 근거가 취약하며, 오히려 다수 언론의 김일성 사살보도가 더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권위있는 연구기관에서 발간한 백과사전에도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金日成, 1912-199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37년 6월 국내조직과 연계하여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의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하였다.혜산사건(惠山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이 사건의 수사와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김일성의 신원도 분명해졌다.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에 실린 혜산사건 보고 부문에는 김일성에 관한 본명, 나이, 출생지, 항일무장투쟁 투신과정 등의 경력이 거의 완전히 파악되어 있어, 과거 일각의 ‘가짜 김일성’ 논란에 대한 명확한 반론의 증거가 되고 있다.
일본 군경이 김일성을 직접 체포하여 심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기록들의 정확성에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1990년 10월 1일 한소수교가 이루어지고 이어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소련군 시절과 북한 지도자가 된 직후 시기의 김일성을 연해주와 평양 등지에서 상당기간 가까이 접촉했던 인물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모두 소련군 관계자들이거나, 소련에서 출생한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와 요직에 있다가 1950대 중후반에 숙청되어 소련으로 돌아간 이른바
소련파(蘇聯派) 들이다.
이들은 만주에서 김일성과 같이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김일성 본인이나 주변 인물들로 부터 들어서 그의 전력을 잘 알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인데, 모두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이미 죽고, 그 직후부터 북한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본명을 김일성으로 개명하여 그 공적을 가로채려 했다고 증언한다. 이들 증언 중에서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김일성과 소련군에 같이 있었던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 1917-1995)과 1944년 소련군 김일성을 처음 만나 밀접한 관계를 맺은 Grigory Mekler(1909~) 및 KGB 요원 Leonid Vassin(1915~)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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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철은 소련군에서 김일성의 휘하에 있다가 해방후 1945년 9월 19일 김일성과 함께 원산항으로 북한에 들어와 작전국장을 맡았고, 소련군이 작성한 6.25 작전계획을 번역하였으며, 6.25 첫 발포 명령자라고 한다.
金日成이 보천보전투 전공 가로채 연합뉴스 1991.06.11 08:11
前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 1917-1995)씨,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에서 폭로
그러면 김은 언제부터 김일성 행세를 하게 되었는가?
1937년 여름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끈 유격대가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파출소를 급습한 대담한 전투를 해냈다.
40여 명의 이 유격대는 습격하고 보니 일본군은 없고 경찰 몇명뿐이어서 일인 경찰관 2명을 죽이고 총기와 양식을 전리품으로 빼앗은 후 새벽녘에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탈출했다. 유격대는 뒤쫓아온 일본군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여기서 김일성 장군은 영웅적인 전사를 했다.
당시 김 장군은 40이 훨씬 넘은 용장으로 아주 영리하고 현명했으며 전투에서는 용감무쌍했다.
한편 동생 철수가 일본군의 포로가 돼 정신적인 타격을 받은 데다 유격활동에 별로 큰 공을 세우지 못해 고심했던 김은 김일성 장군의 전사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해 이름을 바꿔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으로 개명한 김성주는 해방 직후인 9월19일(추석) 소련군 운반선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에 조용히 상륙했다.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북한서 숙청된 고려인 80인의 수기 : (미의회도서관)유성철(兪成哲) 전 북한군 중장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 pp.8~9에 보천보 김일성의 전사에 대한 언급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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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gory Mekler(1909~)는 1944년 소련군에 있는 김일성을 처음 만났고, 당시 계급이 중령으로 해방후 북한에 들어와 1년여를 김일성과 같이 다니며, 정치적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법을 교육시킨 사람(spin doctor)이다. 그의 인터뷰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그 소련군 장교는 한국인 부대를 지휘하는 김(일성)이 그 이름을 전투 중에 죽은, 한국인 게릴라들의 대단한 존경을 받던 전임(前任) 지휘관의 이름에서 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The Soviet officer found out that Kim, who then commanded a Korean battalion, had borrowed his name from the previous commander. Kim's predecessor, highly respected by Korean guerrillas, was killed in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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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북한에 와서 정치기반이 없던 김일성을 도와 그의 대중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정치 공작을 하던 KGB 요원 Leonid Vassin(1915~)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동아시아 역사 전문가인 언론인
Jasper Becker (b. 1956)의 북한 관련 저서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에 나오는 내용이다. (p.51)
김(일성)이 정치적으로 쓰는 이름이 전설적인 공을 세운 연상(年上)의 게릴라와 연관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가 완전한 사기라고 의심했으므로, 다음 단계는 김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조선의 지도자로 일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그를 영웅의 지위로 끌어 올렸다."고 Vassin은 말한다. " 우리는 그가 진짜이며, 백두산의 호랑이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 우리는 만경대 마을에서 그와의 관계를 찾아내야 했고, 또 남한에 퍼져있는 그가 진짜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문도 불신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그가 모국을 해방시킨 맹활약한 전사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
As Kim's nom de guerre was widely associated with an older guerilla who had performed legendary feats, many suspected him of being a complete fraud, so the next step was to build up Kim's image. "We elevated him into the status of a hero to bolster his work as a leader of Korea," Vassin said. "We had to prove he was a real person, the tiger of Mt. Paektu. We had to find his relations at the village of Mangyoungdae. We also had to discredit the information put out in South Korea that he wasn't the real Kim Il Sung. We had to prove he was an active fighter who had liberated the motherland." [
nom de guerre : 연예인의 예명, 작가의 필명처럼 활동분야에서 쓰는 본명이 아닌 이름]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History of Kim Il Sung, p.51
-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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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철의 증언에서 주목할 점은 일제시대 언론 보도와 같이 진짜 보천보 김일성은 1937년에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그 후부터 이름을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바꾸고 전공을 가로채려 했다는 것이다. 유성철은 자신이 들은 바를 증언한 것이고, 일제시대 언론에 김일성 사살 보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므로(국내에서도 그 기사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임), 당시 언론보도가 사실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Grigory Mekler도 김일성이 대단한 존경을 받던, 전투중 죽은 전임 빨치산 지휘관의 이름을 빌려 썼다고 하였다. Vassin의 증언에는 김일성의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 유명한 전임 게릴라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 하므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김일성이 아닌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유사한 증언은 많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지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19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이러한 증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있는데, 다분히 고의성이 있는 것 같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937년 11월에 보천보 김일성이 사살되었다는 보도와, 소련군 관계자 또는 소련파들의 증언만으로도 보천보 김일성은 사건 직후 전사한 것이 틀림없고, 사상휘보의 기록은 전혀 믿을 바가 못된다고 하겠다.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1902년 생으로 사건 직후인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하였고, 북한 김일성은 이름을 바꾸어 그 공적을 가로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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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살 1937년 11월 13일, 보도일자 11월 18일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京城日報) :
기사 이미지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共産匪 金日成の 死
朝鮮軍當局談
父子二代の 不逞
普天堡 襲擊の 張本
1937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2면 2단 :
金日成 被殺? 1937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조간 2면 : 「反滿抗日의 首魁(수괴) 金日成, 被捉斬首(피착참수), 討匪隊와 격전 5시간」
日帝下 朝鮮日報에 나타난 金日成 : 1930~1944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 월간(月刊)『철심(鐵心)』: 「金日成匪賊討伐詳報」
普天堡の戦い 참고
만주국군 기관지 철심(鐵心) 1937년 4월15일자는 김일성이 30세 가량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의 젊은이이라고 나와 있다고 한다.--------------------------------------------
[원본책명]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8/31[제목]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동경대 교수 와다하루키(和田春樹)와 전통일부장관 이종석은 ‘혜산사건’을 다룬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편 [사상휘보]20호를 근거로 이명영이 주장하는 1대 김일성이 현재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인물임을 증명하였다고 주장한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지음, 이종석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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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파 입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 [중앙일보] 1991년 11월 14일
"特輯. 前북한군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 : " 蘇聯이 6.25남침계획 작성했다": 연합뉴스 1990.11.02
재소 한인 유성철씨 우리나라 방문, 당시 증언 [김현주] MBC 1990/10/31
아래 미의회 도서관 자료에는 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가 요직에 있다 1950년대 중후반 숙청된 소련의 고려인 81인의 수기가 들어있는데, 해방 전후의 김일성 행적에 관한 중요한 증언들이 나온다.
美의회도서관, 北정권 수립 관여 고려인 81명 手記 마이크로필름 제작 2007년 02월 15일
김일성 6·25작전계획, 소련에서 작성 · 보천보전투 조작 사실 재확인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고려인 81명 手記 The Library of Congress
정상진(鄭尙進, 1918~) 전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의 일대기 (미의회 도서관)p.8 [해방직후 정상진 해군 중위는 원산 경무부에서 책임 통역관을 하면서 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음]1945년 9월 19일 오전 11시 경이 되자 쏘련 화물선 뿌가쵸프호가 원산항에 부두에 인접하였다. 아래에서 맞웅하는 사람들은 나라의 전설적 영웅이 참말 영웅답게 생긴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하나하나식 골라보면서 김일성 장군이 어느 분인가 묻기도 하였다.
내종에야 알고보니 전설에서 듣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 새파란 청년이였다. 그 빨찌산 일행에는 좀 나도 있고 좀 위신있게 보이는 리동화 소좌도 있었고, 최용건 대위, 김책 대위도 있었건만 그들은 다 아니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낳이(나이) 원쑤라고 하지만 이 당시 김일성에게는 그 원쑤가 보배였지만 남의 이름을 자기에게 붙이다 보니 그 보물이 결여되였던 것이다. 이것을 본받아 그의 아들 유리도 자기 본명은 내깔리고 인민학교를 마감한 1953년에야 정일이라는 일흠을 붙이고 그 다음 또 2년이 더 지나간 다음에는 자기가 탄생한 고향도 내깔리고 백두산 턱밑에 귀틀집을 짓고 그 집에서 자기가 탄생하였다고 하니 세게 인민을 엇덯게 보며, 이 사람은 자기 혼자 힘으로도 력사의 사실을 외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Why]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chosun 2009/06/19
고려인으로 北문화선정성 차관 지낸 정상진씨 증언
“김일성, 스탈린에 ‘3개월내 통일 가능’ 설득 전쟁 승인” : 정상진씨 증언 dailynk 2008-06-24
“고려인 출신 北인민군 유성철이 6·25 때 첫 발사 명령”
박일(朴一) 전 김일성대 부총장의 증언:
박씨는 김일성이 당시 직접 자신의 생애를 솔직히 그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완전한 허구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서 이같은 개인숭배로 미화된 그의 생애는 실제의 그의 생애와는 딴판인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폭로했다.
박씨는 『김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면서 김이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설명했다.
김의 행적과 관련,박씨는 『김은 평범한 인물이었으며 일제와 맞서 싸우지도 않았다.김은 단순히 일제로부터 도망쳐 빨치산에 가담했으나 싸울 기회도 없었다』고 말했다.
박씨에 따르면 김은 42년 겨울 일제의 공격기간중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소비에트 수비대에 의해 다른 30여명과 함께 브야트카 마을에 억류됐다.
박씨는 이어 『김은 군계급도 없었으며 농부였다.그가 단순한 농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거짓말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김일성이 소련 있을 때 평범한 농부였다는 박일 부총장의 주장은 좀 어폐가 있으나, 일시적으로 농사를 지었던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김일성과 소련군 88여단에 같이 근무했던 소련파 김창국씨의 증언 :김창국(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 대좌 (미의회 도서관) : 88여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음.[p.5] 김일성 부대는 처음 국경을 월경하다가 국경수비대에게 몽땅 체포되어 블라지보스또크에 수용소에 감금되여 있다가 중공당이하 주보중 여단장이 보증을 서고 석방식혔으며, 자기 부대에 편입 식혔다. 1940년도에 아지 주보중 부대에 편입되기 전에
김일성 부대는 블라지보쓰또크 주변 오께안쓰크에서 채소 농사를 짛었다고 주보중 부대 사람들은 말하였다.박갑동(朴甲東, 1919~ )씨 증언 : (
박갑동 연보)
6.25 사변시 조선노동당 남조선 지하당 책임자, 북한 문화선전성 구라파 부장역임, 1956년 북한탈출, 일본거주.
혜산 사건으로 복역한 박달(朴達)과 박금철(朴金喆)이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김일성이 아니라고 했다.박갑동(朴甲東) 증언: 김일성은 가짜 박갑동씨는 보천보 습격사건에 관계했던 박금철(朴金喆)을 광복 직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박금철은 광복 때까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석방된 뒤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보았는데, 자신이 아는 그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서 놀랐다고 말하더란 것입니다.
이승만 항일 없는 교과서, 김일성 항일만 조작 부풀려 2011.05.02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달(朴達)과 박금철(朴金喆)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 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 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
김일성이 가짜가 확실하다는 월남민들의 증언"조선일보 89년 4월 13일자 독자 의견 ....
어느날 신문에서[현 김일성장군의 본명은 김성주인데, 옛 항일투사 김일성의 이름을 딴 것은 그 공로와 명예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라고 쓴 것을 분명히 보았다. 월남후 고향 지식인들에게 확인한 결과, 이구동성으로 그들도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당시 그 기사를 보고 자뭇 어리둥절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2~3일후 당 간부들이 직접 다니면서 그 날짜의 신문을 회수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김일성의 약력은 서서히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오히려 [백두산]이란 장편서사시가 발간되어 신출귀몰, 축지법을 쓰던 애국지사로 부각시키고, 보천보 전투의 주동자라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역사를 왜곡-조작한 것이다. 그당시 노인들은 새파란 사람이 어찌 그 이름도 드높은 노장 김일성으로 둔갑했느냐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확실히 가짜임을 자신있게 입증한다. 그것도 모르고 우상화 놀음에 속고 있는 북한동포가 억울하고 가련하기만 하다.<김청구.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