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의 가짜 논란은 그가 전설적 항일투쟁의 영웅인가 아닌가에 비롯되는 것으로, 이에 대한 글들은 워낙 중구난방이라 전적으로 신뢰할만한 글은 별로 없다. 남한에서는 해방후 한동안 가짜설이 주류였지만, 근래에 와서는 가짜설은 오히려 배척 당하고, 진짜설이 학계에서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교과서에 까지 실리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 대해 정말 믿을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글에서는 가능하면 믿을만한 원자료들을 조사하여 김일성의 해방전 행적의 진위를 가려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가 1940년대 초 소련군에 있다가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기까지의 과정도 추적해 볼 것이다. 몇 차례로 나누어 글을 올릴 계획이다.
김일성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고하라. [내용이 모두 정확하다고 보기는 힘든것 같다.]
김일성(金日成, 1912-199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위키백과
Kim Il Sung (15 April 1912 – 8 July 1994)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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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정체 (1)] 김일성 가짜설의 전말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거짓 허위 선전의 뿌리는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우상화에서 비롯하고, 그 우상화의 핵심은 김일성(金日成)을 영웅적 항일투사로 조작한 것이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김일성을 직접 잘 아는 사람이 없었던 관계로 실체를 정확이 알 수 없는 상태에서 6.25를 전후해 내려온 월남민을 통해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전해졌다. 근래 알려진 바로는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을 지내다 59년말 소련파로 몰려 자진귀국형식으로 소련으로 되돌아가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으로 있는 박길용 (朴吉龍, 1920, 모스크바시) 박사가 북한에서도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민족민주진영·기독계 인사·젊은층 등의 소비예트화 거부와 가짜 김일성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다고한 증언이 있다.
소련파 입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 [중앙일보] 1991년 11월 14일
김일성이 처음부터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배경에는 일제시대 북한 지역에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가 상당히 퍼져 있었는데, 해방 후 평양에 들어와 1945년 10월 14일 10시에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개최된 항일 전사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시민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을 그 전설적 영웅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일성 장군의 뚜렷한 실체가 알려져 있었던 건 아닌 것 같고, 막연히 백마타고 설원을 누빈다던가 축지법을 쓴다던가 하는 뜬구름같은 풍문 정도였던 것 같다. 김허남(金許男) 전 함북도민회장은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戰犯者 김일성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아니다 >> 미래한국 2005년 07월 14일
...소학교 때는 김일성 장군이 백전 백승의 영웅적 인물로 부각되었고 때로는 도술마저 자유자재로 부리는 초능력자로 믿었고 또 흠모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어린 우리들에게 존경받는 독립군 장군은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김일성 장군, 김구 선생이었다....
당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함경도에서 일부러 찾아가 현장에 참여했던 김허남(金許男)씨는 위 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60대 정도로 예상했던 김일성이 30대 초반의 젊은이인 것을 보고 진짜라고 믿지 않았다고 말한다. 김허남씨는 1920년생인 자신보다 겨우 8살이 더 많은 김일성은 자신이 소학교 1학년 때 14~15세에 불과했는데, 전설적인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당시 모란봉 운동장 상황에 대한 다른 사람의 증언도 있다.
김일성은 가짜, 진짜 김일성 장군은 1937년 전사 뉴데일리 (김필재 칼럼) 2010.11.19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가짜 김일성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 해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것.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씨는 “연설에 앞서 스티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
스티코프는 소련군 연해주 군관구(軍官區) 실력자로 해방직후 북한의 사실상 지배자였고,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되었다. 당시 일을 기록한 스티코프 비망록이 1990년대에 공개되었다.
스티코프가 김일성을 下人처럼 다뤘다 前 동아일보 회장 金學俊 박사 강연에서
Terenti Shtykov: the other ruler of nascent N. Korea By Andrei Lankov
Shtykov, Terentii Fomich (1907-1964)이러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해당하는 인물은 실제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일제시대에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항일 활동을 한 인물이 여러명이라는 증언은 많고, 실제 기록상으로도 여러 명이 확인되므로, 김일성이 축지법 쓴다거나 하는 전설 비슷한 풍문도 김일성이라 칭한 사람이 여러 명이었기 때문에 나온 말로 보인다.
빨치산 중에 김일성이라 칭한자가 적어도 15명이 있었다는 증언 : 정상진 전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빨치산 부대가 작전할 때 단위 부대장들이 모두 김일성이라 칭했다는 증언 : 이선호 [월간조선 2004년 12월호]
김일성 장군이 한 두명이 아니었다는 증언 : 김허남(金許男) 전 함북도민회장
남한에서는 1980년대까지도 실증적 자료를 찾아 김일성이나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금기시되다시피 했으므로, 김일성의 실체에 대한 믿을만한 연구도 별로 없었다. 김일성은 6.25 남침의 전범으로, 또 북한 동포를 억압하는 독재자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고, 진짜니 가짜니 하는 논란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80년대에 대학 운동권이 주사파들에 의해 장악되면서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풍조가 학생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져나갔지만, 일반인들의 생각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과거 박정희-전두환 시절 용공 지하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다 구속되었던 전력자들이 정치권으로 다수 들어왔지만, 그들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므로 다소 잡음을 일으키는 정도로 지나갔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 말기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노무현 정권 기간에 80년대 운동권들이 다수 전면으로 부상하여 사회 주요분야의 실세가 되면서 종북파들이 득세하여 이념 논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남한의 과거 정권은 부정, 폄하하고, 북한 김씨네 정권에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정치권도 이들의 주장에 끌려다니게 되었다. 학계에서도 좌파들이 다수를 차지하여, 김일성이 항일 영웅인양 받아들여지고, 교과서에도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무시되고,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항일 없는 교과서, 김일성 항일만 조작 부풀려 뉴데일리
2011.05.02 "이승만 외교가 獨立 보장한 카이로선언(1943년 연합국 美·英·中이 한국 독립을 보장) 이끌어"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 조선닷컴 2013.03.19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의 실체에 대해 실증적으로 다시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남한에서 1970년대에 처음으로 김일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성균관대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교수는 일제시대에 항일 운동을 한 여러 명의 김일성을 밝혀내면서 그 중에 함남 북청 출생으로 일본육사를 졸업한 본명이 김광서(金光瑞)인
김경천(金擎天, 1888.6.5~1942.1.2) 장군이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경천 장군이 김일성으로 불렸다는 명백한 근거가 없어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김경천 장군이 백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백마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주장도 여전히 나돌아 다닌다. 김광서 장군이 보천보 사건을 지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金日成)과 같은 이름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으로 행적이 어느 정도 밝혀진 사람은 3인이다. 보천보 사건을 지휘한 김일성, 북한 김일성 외에 한 사람이 더 있다.
이 제 3의 김일성은 1906년생으로 출생지는 미상이며, 간도 용정(龍井)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와 소련 적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동북항일연군 1로군 2방면 군장을 역임했는데, 1944년 소련 오케얀스카야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이 김일성에 대해서는 그의 처 김혜순(金惠順)이 1940년에 체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1940년 조선일보에 체포된 김일성의 처와 관련된 2건의 기사가 있다.
愛妻가 본 김일성觀 : 조선일보 1940.07.05 / 석간1 2 면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조선일보 1940.07.05 / 석간1 2 면
일제시대 조선일보 검색 (기간을 1930-1944 로 설정하고 金日成으로 검색)
북한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체포되어 귀순해서 선무활동을 한 적은 없으므로 위 김일성은 보천보 김일성이나 북한 김일성과 분명히 다른 인물이다. 아래 자료에도 이 제3의 김일성이 소개되어 있다.
가짜 김일성이 낳은 민족의 고질적 고난 이명산 북한전문가
김일성의 正體 최 진 (호남대교수/ 前 駐中國 公使) - 기록으로 확인되는 여러 김일성들의 약력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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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정정: 임은(林隱)의 북조선왕조 성립비사(北朝鮮王朝成立祕史, 한국량서, 1982)는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옥천문화사, 1989)으로 재출판되었다. 여기에 김일성(金日成)의 최초 처(妻)로 김정숙 이전에 한성희(韓聖姫)가 있었으며, 이 여자가 체포되어 본명은 숨기고 김혜순(金惠順)이란 가명을 대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 부대가 토벌에 쫓기는 와중에 일어난 일로 보이며, 이때 둘은 헤어지고, 김일성은 소련으로 넘어 갔으며 김정숙과 재혼했다. 해방후 북한에서 김일성은 다른 남자와 결혼한 한성희를 다시 만났고, 뒤를 돌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
金日成(김일성)의正体(정체) 蘇(소)망명 北韓幹部(북한간부)가 폭로한內幕(내막) 1982.03.26 동아일보 4면)
이로 봐서 위 제3의 김일성은 정체는 모호해 진다. 김혜순의 남편은 아니고,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보강 조사가 필요하다.
일본 검경이 김일성의 처를 체포해 놓고도, 당사자의 본명도, 남편의 정확한 신원도 밝혀내지 못한 것은 당시 수사 기록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증거도 될 수 있다. 사상휘보의 혜산 사건에 대한 검찰 기록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김일성 정전」의 저자 임은씨는 내용분석등 여러점으로 미루어 의병장 旺山 許蔿(왕산 허위)의 장손자 許眞(허진)씨(63)인 것으로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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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38년 12월에 최소한 2개의 김일성 부대가 있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들의 정확한 신원은 가늠하기 어렵다.
김일성考②...기존 연구가들의 오류① :
진명행 블로그
1938년 12월말 당시「對岸匪賊現勢表」를 보면 임강현(臨江縣)을 근거로 한 김일성(金日成匪) 200과 무송현(撫松縣)을 근거로 한 김일성(金日成匪) 300 두 부대가 장백현(長白縣)의 최현비(崔賢匪) 180과 병행 등장한다. 이 자료에 의하면 김일성 부대가 최소 2개 이상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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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이름이 북한 지역에 퍼진 시기김허남(金許男, 1920~) 전 함북도민회장의 증언에서 보듯이 북한에서 전설적인 김일성장군의 이름이 퍼져 있었던 것은 1937년의 보천보 사건 때문이 아니고, 그가 소학교에 들어간 1920년대에 이미 상당히 퍼져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1920년대에 동네에 붙은 김일성 현상수배문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다.
언론에 보도된 최초의 김일성은
김좌진 (金佐鎭, 1889.11.24 ~ 1930.1.24) 장군 암살을 사주한
김일성(金一星)으로 보인다. 이 김일성은 고려공산청년회 소속으로 본명이 김봉환(金鳳煥)이며 남한 출신이다.
삼시참 정미소에서 배후서 일발총성.金佐鎭피살 당시의 광경 하수자는 金一星 :
조선일보 1930.02.15 / 석간 2 면
보천보 사건 자체는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당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라 널리 알려졌다고 보기 어렵다. 그와 비슷한 규모지만 2년 먼저인 1935년에 있었던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과 그 지휘자
이홍광 [李紅光, 1910∼1935]에 대해서 거론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보천보 사건으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풍문이 생겨났다면 왜 전설적인 이홍광 장군의 풍문은 나돌지 않았겠는가?
동흥습격 사건은 이홍광이 단독 지휘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보천보 사건은
최현 (崔賢, 1907 ~ 1982)과 김일성 부대의 공동 작전이었는데도 최현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김일성만 유명해질 수 있었겠는가도 생각해야 한다. 보천보 사건은 단지 김일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나중에 중요성이 과장되어 알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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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진위 논란의 문제점학계의 김일성 항일 투쟁에 대한 논란은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의 글
김일성 연구의 쟁점 /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정리되어 있다.
김일성의 진위 논란은 해방후 북한에 처음 나타난 김일성이 북한 지역에 풍문으로 퍼져 있던 전설적인 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았던 것에서 출발한다.
지금 밝혀진 것으로는 그런 전설적 영웅 김일성 장군은 실존하지 않으며, 항일 활동을 한 동일한 이름의 김일성이 여러 명이 있어서 그들에 대한 풍문을 한 사람의 것으로 오해하여 축지법을 쓴다거나 도술을 부린다는 등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속된 김일성 진위 논란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과 동일 인물이냐 하는 것으로 좁혀진다. 남한에서 이에 대해 벌어진 논란은 과거에는 가짜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으나, 지금은 북한 주장이 맞다는 쪽이 학계의 주류로 되었다. 그러나 이또한 충분히 입증된 사실로 보기는 어렵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에는 교묘한 논리의 함정도 들어 있다.
사태가 반전된 논리적 구조는 가짜설을 뒷받침한다는 근거들이 논파되었으니 진짜가 맞으며, 가짜설은 과거 남한 정권이 조작해내어 퍼뜨렸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 외에는 진짜가 맞다는 근거도 명확한 것이 별로 없고, 정부 수립 이전부터 김일성 가짜설이 상당히 퍼져 있었으므로 남한 정부가 지어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연합뉴스 2009-08-13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연합뉴스 2009-08-13 (TV 뉴스)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네이버 연합뉴스 2009-08-13
북한이 상습적으로 허위 조작을 일삼는 집단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른다는 데서 출발하여 어느 쪽이던 의심할 수 없고 논파할 수 없는 확실한 근거가 제시되는 쪽으로 결론이 나야 타당한 것이다. 그러니 가짜설을 뒷받침한다며 제기된 기존의 몇몇 근거들이 논파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 진짜임이 입증된 것은 아니다. 가짜라는 다른 근거가 얼마든지 더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로 입증되려면 진짜가 맞다는 반박 불가능한 근거가 따로 나와야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오늘날의 학계는 진짜가 맞다는 근거는 거의 제시하지 못한 채 가짜설의 근거가 논파되었으니 북한 주장대로 진짜가 맞다는 식으로 정리되어 있는 상태로 보인다.
과거 나왔던 가짜라고 주장하는 근거도 모두 부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중의 일부, 예를 들어 김경천 장군이 진짜 김일성 장군이라는 주장 등은 부정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보천보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에 사살되었다는 다수 언론의 보도는 오보로 봐야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니 부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널리 알려진 기존 자료로는 가짜설이든 진짜설이든 어느 쪽도 완벽하게 부정된 것도 아니고 충분히 입증된 것도 아니라고 봐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보천보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거의 확실한 근거들을 제시하며 이에 대해 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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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예찬론자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2002.02.03) : YouTube 방송보기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 48 회 2002년 2월 3일 (일)
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광화문에서 열렸다면…"
[김기협-한홍구], 역사에 '가정'은 있다!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한겨레21 제381호 2001.11.01]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김일성 가짜설'의 생산구조와 그 의미 한홍구, 이승환
역사적 사실 '보천보전투' 계속 외면할텐가 오마이뉴스 2005.08.18
[답사기] 김정기 서원대 교수... 아직도 총탄자국 생생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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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북한 김일성이 가짜임을 입증하는 글들이다. 그는 실체가 불분명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도 아니며, 1937년 11월 13일 사살된 보천보 습격을 지휘한 김일성도 아니다. 단지 그는 진짜가 나타날 리 없는 실체가 불분명한 김일성이란 이름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해 김성주란 본명을 김일성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가 1930년대 초반부터 1940년까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것만 사실이고, 이렇다할 전공은 없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군의 빨치산 토벌을 피해 1940년 10월말 소련으로 불법 월경해 들어가 구금되었다가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만주 빨치산 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만든 88 정찰 여단에 배속된다. 그가 북한 지도자가 된 것도 소련군 88정찰여단에 있을 당시 비밀 KGB 요원으로 빨치산 출신 동료들의 동태를 상관인 극동군 정찰국장 Naum Sorkin(1899-1980) 소장에게 보고하여 신임을 얻었기 때문인 것을 밝혔다. Sorkin은 KGB 총책 Lavrentiy Beria(1899-1953)의 신임을 받던 인물로, 말단 소련군 대위 김성주를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와 모스크바 수뇌부에 북한 지도자로 추천하여 스탈린의 낙점을 받게한 장본인이다.
출처- http://botw.egloos.com/viewer/11029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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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에대한 시리즈가 재미없더라도 다루어 볼만하다고 보기에 차후 몇편더 나갈것입니다.
-동서남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