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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국권탈취 후 초대 조선총독이 되어 언론을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武斷)식민정책을 폈다. 1916년 10월 총리가 되어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정책을 수행하였다.
3대 조선 통감이기도 합니다. 1910~1916년간 재임했습니다.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16∼1919년 제2대 조선총독 재임시 철저한 무단통치를 했으며 3 ·1운동 발발로 사임하였다.
1916~ 1919년까지 재임했습니다.
3대,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19년 조선총독에 취임하여 기존의 식민지 통치방법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헌병을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 병력을 증가하였으며, 이 기간을 이용하여 많은 지식인을 변절하게 하였고, 위장된 자치론을 이용하여 독립운동 방향에 혼선을 빚게 하였다.
1919~1927 년간 재임하였습니다.
6대 총독으로써는
1929년 8월 17일 (부임은 9월 1일) ~ 1931년 6월 17일 재임 중 피습당해 사망했습니다.
4대. 7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사이토 마코토가 제네바 군축협상을 위해 유럽에 파견되어 조선총독직을 비우자 임시대리로 후임에 임명되었으며, 1931년에 또다시 사이토 마코토의 후임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했다. 그는 조선총독으로서 농촌진흥정책 및, 북조선 지역에서 중화학 공업의 육성에 힘썼다. (임시였기 때문에 1년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7대 총독으로써는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재임했습니다.
5대 총독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1927년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자 당시 다나카 군벌의 중심이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의 천거로 조선 총독에 임명되었다. 1928년 한국 독립 운동가인 조명하(趙明河)가 육군 특명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 일본 왕족이자 일왕(日王)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를 독검으로 찌르는 의거로 정치적 곤경에 빠졌다. 이후 부산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설립 허가를 둘러싸고 5만원을 받은 ' 야마니시 총독 독직(瀆職)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하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총독을 지냈습니다.
8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으로 재임한 6년 동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하여 일본어 상용·창씨개명(創氏改名)·지원병제도 실시 등으로 한민족문화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재임했습니다.
9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小磯國昭)
총독 재임기간 중인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지사를 검거하는 한편, 조선청년특별연성령(朝鮮靑年特別鍊成令)을 공포, 17∼21세의 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1943년 8월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수많은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붙잡아 갔다. 이것도 부족하여, 그는 11월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하여 많은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끌어갔을 뿐만 아니라, 1944년 8월에는 학도동원본부 규정을 공포하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에서 대학생까지 동원체제를 확립한, 한국민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이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재임하였습니다.
10대 총독 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
같은 해 7월,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한 아베 노부유키는 전쟁지속을 위해 인력과 물자의 징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국민의용대를 편성해서 패전위기하의 경비태세를 강화하고 비협조적인 한국인에 대한 대규모의 가혹한 탄압과 검거를 단행하였다. 특히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대근로령(女子挺身隊勤勞令)을 공포하여 수십만에 이르는 12∼40세의 한국 미혼여성을 동원하여 일본과 국내의 군수공장에서 취로케 하거나, 가족에게는 행방도 알리지 않은 채 남방이나 중국전선에 군 위안부로서 연행하였다. 일본은 1945년의 전쟁 막바지까지 애국반 ·경방단(警防團) 등의 조직체에 한국인을 묶어두고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 등 주요물자를 철저히 통제하여 배급제로서 생활을 압박하였고, 놋그릇, 소나무뿌리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징발해서 군국주의의 마지막 제물로 삼았다.
1945년 7월부터 8월 15일까지 한달 반 정도 재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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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느방송에서인가 감격시대라는 제목으로 소위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데 그 의도가 무었인지 모르겠다.
일단 일제강점하에서 우리민족에게 감격시대가 있었나를 묻는다.
물론 일본의 입장에서보면 1930년대는 감격시대였을것이다. 팽창하는 군국주의를 외부세계로 돌리고자하는 그 야욕으로 중일전쟁을 발발하고 대륙침략을 위해서 조선의 모든것을 수탈해가던시절이 영광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바로 당시에 군국주의 일본이 소위 식민지에대한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내세운것이 바로 1930년대의 감격시대였다.
그렇다면 이시기 조선반도에서는 어떤일이 있었는가?
감격시대라는 노래가 발표되었고 복지만리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감격시대는 우리 조선백성이 일제하에서도 청춘남녀가 모든보이 모든걸로서 행복한 사랑을 할수있고, 멋진양복에 화려한 양장의 선남선녀들이 명동(본정통)의 찻집과 극장을 누빌때 우리의 독립군들은 차거운 만주벌판에서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만주사변에이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던시기 이미 우리의 독립군은 만주에서의 근거지를잃고 임시정부를따라 중국내부로 그 미약한 세력을 유지하고자 철수했으며 이후 만주에는 독립군이 존재하지않게 되었다. 따라서 좌파들이 주장하는 1944년 박정희의 독립군과의 대적도 없었다. 없는 독립군을 초급장교인 박정희가 무슨수로 때려잡아?
복지만리란 노래를 살펴보자. 그 노래가사는 새로운땅에대한뜻이 있어보이지만 감격시대와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서 관용으로 제작된 노래이다. 대륙침략을 합법화하고 미화시키는 일본에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노래이다.
또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하자 꽃서울하는것도 실제가사는 노래하자 하르삔 청춘하르삔이며 이 노래역시 일제가 만주를 침략해서 지배하던시기 만주는 행복했으며 송화강이흐르는 하얼삔은 아름다운 도시라고 미화하고있다.
소위 감격시대라는 1930년대의 조선반도 대다수 국민들의삶은 어떠했을까? 80%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봄이면 나무껍질을 벗겨먹는 춘궁기와 사시사철의 보리밥을 숙명처럼안고 살아야 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양복입고 양장을한 신사숙녀가 양식을먹고 영화관을 다닌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모르든가 무심코 지나치는것에는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뿌리박혀서 우리의 일부가된 것들이 부지기 수이다. 지금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서 괘변을 늘어놓고 있는데 자발적으로 돈벌자고나선 일본의 성적직업 여성과 강제동원된 조선의 어린 여성을 같은 선상에서 보고자 하는데 도대체 이런 괘변이 어디있단 말인가?
자살자와 타살자가 똑같은 죽음인가를 일본인에게 물으며 일제 강점기기 우리역사와 지금의 우리 현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있는지를 말해보고 싶었다.
사족으로 명색이 교수라는 진중권은 통일이 되었을때 북한의 엘리트들을 살려서 이용하자고 역설했는데 그렇다면 해방이후 친일파를 제외시킨 이승만 내각과 친일파를 중용시킨 김일성 정권에서 어느 정권이 더 정통성이 있다고 보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