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을 言語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들끼리의 疏通을 위한 도구이다.
글은 말을 記號로 形狀화 하여 조직적으로 組合한 형태이다.
말은 곧 消滅되지만 글은 存在로 남는다.
그래서 글은 말보다 체계를 갖추어 運用이 된다.
그래서 글은 文法과 맞춤법으로 다듬어야 한다.
그것은 소통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소통을 쉽게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학교나 어른들에게서
고운말 바른말을 써야 한다고 배웠다.
고운글 바른글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고운글 바른글은 문법과 맞춤법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미운글 나쁜글이 되고 만다.
나쁜 언어로 소통하면 인간의 인격과 교양이 나빠지고
나아가서 그 사회도 나빠진다.
그러므로 언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실로 막대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말과 글은 소통만 되면 된다고.
짐승도 나름대로 소통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소통은 本能에 국한된다.
그것을 언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만이 언어로 소통을 한다.
그런데 언어에도 格이 있어 좋고 나쁨이 있다.
좋은 언어는 소통에 기쁨이 있고
그것을 사용하면 人格과 敎養이 올라간다.
나쁜 언어는 그 반대다.
그러므로 좋은 언어는 사람을 인격자로 만들고
인격자는 결코 나쁜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것을 相互補完관계라고 한다.
이쯤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논리에는 名分이 있어야 상대가 納得을 한다.
나도 가끔은 도로교통법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호위반이나 주차위반으로 벌금을 낸다.
그것이 우선 당장은 불편하다.
그런 불편 때문에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며
차는 도로에 그냥 달리면 된다는 논리는
잠시는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큰 혼란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무슨 법이 되었든 법은 지켜야 하며
비록 그것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良心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다.
"글은 소통만 되면 된다?"
이것을 좀 비약해서 말 한다면
쌍욕도 언어이고
폭력은 운동이고
詐欺는 오락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指向해야 할 그런 사회인가?
그러면 묻는다.
학교에서 국어시험은 왜 보나?
운전면허는 왜 있어야 하나?
그것 없이도 글을 쓰며 말을 한다.
그것 없이도 운전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마도 글은 소통만 되면 그만이다라고 주장하는 그 분은
식당에서 옆자리의 손님이 마구 떠들며 밥을 먹으면
그래! 밥은 먹는 것으로 족하다며 그를 칭찬하겠는가?
나는 그런 마음으로 문법과 맞춤법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짐승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이기도 하다.
짐승은 법과 질서 교양 예의 등이 필요 없는
本能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므로 짐승이 추구하는 목적은 生存 그 자체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비싼 댓가를 치르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나의 이 글을 읽고도
계속해서 오로지 소통만을 고집할 것이다.
그가 자주 쓰는 誤字 두 개를 소개하여 그 느낌을 적어 본다.
그의 글에 '붕괘'와 '병패'가 나온다.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만이 한자를 代入하여 문맥으로 살펴보면
붕괘는 붕괴(崩壞), 병패는 병폐(病弊)임을 알 수 있다.
붕괘와 병패로 소통이 얼마나 원활(圓滑)하며
그것을 쓰는 이의 인격과 교양의 수준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그의 논리는 名分도 없고 實利도 없어 空虛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는 소통 至上主義를 고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속으로 이것을 다짐하면 된다.
"나는 착한 사깃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