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종교 이야기(4) - 조카
나는 어릴 적부터 종교와는 무관하게 살았다.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일이 없던 집안 분위기도 그랬지만, 특정 종교 시설이 하나 없던 시골 깡촌 출신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나는 성년이 된 후에야 교회라는 곳을 처음 가보았다. 그것도 예수님을 뵙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애 시절의 아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겨보자는 강압적 협박 때문이었다.
아내는 처녀 적부터 천주교 신자였지만 나에게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런 삶을 살아가던 나에게 강적이 나타났다. 만날 적마다 교회를 다니라고 은근히 옆구리를 찔러대곤 했다. 나 같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 더욱 올곧은 사람이 된다나 머라나. 나는 더 이상 올곧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올곧게 살아가는데도 말이다.
우리 형제는 5남2녀다. 지금으로 보면 대식구이지만, 어릴 적 우리 동네 상황으로 보면 명함을 내밀 정도는 되지 못한다. 나는 밑으로 두 번 째라 제일 큰 누나는 거의 어머니뻘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누나는 어릴 적 서울에서 객지 생활하다가 시집가는 바람에 나는 초등학생이 될 때쯤에야 큰누나를 처음 보았다.
나도 나이가 들고 늙어가면서 누나를 자주 찾았고, 할머니 같았던 누나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십여 전부터 나 바로 위의 형과 나는 늙은 누나 두 분을 모시고 자주 여행을 다녔었다. 나이 차가 많아서 누나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었기에, 큰누나는 말년의 삶을 살고 있기에 더 늦기 전에 추억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였다. 그래서 큰누나가 돌아가셨을 때는 그나마 이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큰누나는 매형과 일찍 사별하고 과년한 딸 하나와 살고 있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서울 무슨 교회의 권사라고 했다. 누나는 나에게 교회를 다녀보라고 딱 한 번 이야기 했다. 동생이 교회에 관심이 없다는 것 안 누나는 그다음부터 교회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조카도 당연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조카도 당연히 그녀의 하느님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충실히 따라 나에게 교회를 다니라고 권했다. 기독교 신자는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는 확실히 DNA가 달랐다. 바로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을 외치는 것이었다. 아마도 기독교의 발흥이 죽음을 불사한 사도들의 전도에 있었기에 그랬을지 모른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애증의 종교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주라는 구절은 기독교에 사랑과 평화의 종교라는 이미지를 씌우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종교가 만들어내는 잔인한 장면은 항상 기독교가 주인공이었다.
누님은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사위로 맞았다. 목사가 일곱 명이나 된다는 교회의 말단 목사였지만, 듬직하고 순하게 생긴 목사님이었다. 다행히 조카사위 목사는 불신 지옥을 외치지 않았고, 교회를 권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카는 목사 사모님이 된 후에 더욱 극성으로 변해갔다. 그럴 때마다 내가 단골로 꺼내는 대답이 있었다.
나는 박정희교 신도다.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다. 아무리 눈 비비고 봐도 박정희만한 하느님이 없다. 너도 나처럼 박정희교를 믿어라. 그러면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나는 70쯤 되면 교회 다니는 걸 고려해 볼란다. 조카가 질문하면 삼촌이 대답하고, 둘은 서로 웃으며 넘어가곤 했다.
이런 분위기의 집안에 이번에는 조카보다 더 한 강적이 한 명 등장하게 된다. 이 강자는 순식간에 성당 다니던 집사람까지 교회에 나가게 만들고, 극성인 조카를 더욱 극성으로 만들 지원군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에 둘러싸인 사면초가의 박정희교 신도가 된다.
(계속)
비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