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교 이야기 (2) - 아내
나는 신을 부정하지만 종교를 긍정한다.
세계 인구의 75%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
종교에는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는 종교의 그 무엇은
종교인은 신 앞에 겸손하여 오만하지 않으며
삶의 여로는 어둡고 거칠고 비바람이 몰아치기에
종교는 연약한 인간의 안내자로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내가 천주교 신자인 줄은 결혼 후 한참 후에 알았다. 연애 시절에 알았다고 한들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우리 집은 종교에 관대했고 종교에 무관심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 당시 나에게 종교라는 것은 일시적 감정에 의해 발화되었다가 잠시 뜨거웠다가 식어가는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교에 무심했던 나와는 반대로 아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종교에 열성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교를 밝히는 것에 무지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시집을 오고 보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아버지가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 역시도 나처럼 며느리가 무슨 종교를 믿든 관여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는 독실한 신자의 반대인 사이비 신자였다. 신혼 당시엔 성당을 나가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먹고살기 바빠 그럴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애들이 조금 크고 이사를 몇 번 다니고 나서 성당에 재적 변경을 한다고 한 후에야 아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았다.
아내에게는 세례명도 있었다. 기억이 안 나서 물어봤더니 '글라라'라며 짜증을 냈다. 세례명을 물어본 것이 벌써 몇 번째이고 남편이 기억을 안 해 주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건 내 기억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이름이 나쁘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이름이면 이렇게 자주 잊어먹을 리가 없다.
천주교 신자는 이사 가면 그 지역의 성당으로 소속을 바꾼다. 규정이 그렇단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는 이사 가도 원래 다녔던 교회에 다녀야 한다. 물론 본인이 원해서 교회를 바꾸는 것은 언제든지 자유다. 성당과 교회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그래서 성당의 천주교는 중앙집권적이고 교회의 기독교는 지방분권적이다.
성당에는 신부가 있고 최상위에는 바티칸의 교황이 있다. 교황청은 전 세계의 성당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한다. 교회에는 목사가 있고 목사는 교회를 대표하며 교회 내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목사의 상부에는 교파에 따라 교단이 있지만 전 세계의 교회를 지휘하는 교황청 같은 지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브레이크 없이 목사가 막 나가다 보면 스스로 구세주를 자처하는 위치까지 가게 된다. 천주교보다 기독교에 이단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한국 천주교는 세계 천주교 분야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100년 이상 박해를 받으며 1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조선의 학자들이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자생적 교회의 위치도 가지고 있다. 한국에는 천주교 성지도 많이 존재하고 있고, 제주도에도 역시 천주교 성지가 많이 존재하고 있다.
아내와 처형들이 거의 천주교 신자인 것은 제주도도 그만큼 천주교와 역사적 인연이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는 천주교 용수 성지가 있다. 1846년 조선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 일행이 풍랑에 휘말렸다가 표착되어 조선인 신부에 의한 최초의 미사가 열렸던 곳이 용수리 바닷가 바위 위에서였다.
아내의 본적은 서귀포 중문이다. 중문은 '이재수의 난'이 발화되었던 대정과는 지척에 있다.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의 난으로도 불리며, 1901년 5월 발발했다. 프랑스 선교사의 위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이 횡포가 극심했다. 징세관으로 채용되어 심지어 폭행과 약탈을 일삼았다. 주민들이 숭상하는 신당도 없애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민중이 들고일어났다.
노비 출신 이재수가 장두였다. 제주성으로 몰려간 민군은 제주성을 포위하고 열흘 만에 성문이 열리자, 민군은 관덕정 마당에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었다. 이때 죽은 이가 수백 명이 넘었다. 잘린 머리들이 관덕정 마당에 널려있는 장면은 사진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나중에 천주교도들의 시신은 황사평으로 옮겨지는데, 이곳은 나중에 황사평 성지가 되었다.
신혼 당시에 아내의 본적인 중문에 처갓집 친척의 조문을 간 적이 있다. 고인이 천주교인이라 장례식장은 성당이었다. 조문객들은 성당 미사실의 의자에 앉아 성당의 신부가 하얀 연기가 피어나는 향로를 손에 들고 흔들며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지켜봤다. 머리에 하얀 미사포와 삼베 두건을 쓴 조문객들이 뒤섞여 앉아 있는 미사실의 풍경은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제사 금지가 이재수의 난의 한 원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성당에서 미사포와 삼베 두건의 양립은 상전벽해의 일이었다. 천주교가 현지에 적응하여 진화한 덕분이었다. 1939년에 교황청은 훈령을 발표했다. 제사는 미신이 아니라 미풍양속이며, 아시아 지역에서 전통문화와 민족정신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독교는 제사를 금지하고 있다.
종교가 인간의 내세를 넘어 현세를 지배하거나, 과학과 물질을 능멸하고 인간의 문화와 생활양식까지 간섭하려 든다면 그건 종교의 월권행위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구호에 그쳐야 하지 그걸 현실화 이념화한다면 그거야말로 이단이고 미신이다. 인간이 있어 종교가 있는가, 종교가 있어 인간이 있는가. 그래서 각종의 종교가 만발하는 우리 집이야말로 천당이고 극락이 아닌가.
하여간에 아내는 사이비 신자가 맞았다. 다만 언니들이 모두 성당에 다니는 바람에 휩쓸렸거나, 아니면 글라라라는 이름이 우아해 보여서 성모 마리아보다는 글라라라는 이름에 더 마음을 주었을지 모른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아내는 나이가 들어서 교회로 말을 갈아타기 때문이다. 이런 것에 말을 갈아탄다는 표현이 불경스러운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계속)
비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