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모든 면에서 국가적 역량이 대한민국을 압도하고 있다. 인구 또한 2배가 훨씬 많고 경제규모 또한 우리나라 경제의 2배를 능가한다. 다만 1인당 국민소득은 대한민국에 따여 뒤처졌고 개인의 구매력은 대한민국에 개처발린지는 좀 되었다. 현실의 삶은 대한민국 보다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는 일본이다.
노벨상만 하더라도 개대중이 돈주고 산 노벨평화상과 노벨위원회의 대륙적 배려로 붉그죽죽한 한강이 노벨문학상이 전부지만 일본은 의학, 과학, 문학 할 것 없이 25개 정도를 수상했다. 감히 조센징이 넘볼 일본의 국가역량은 아니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세월 일본의 추락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 미국의 국가GDP 70%까지 쫒아가 미국을 잡아 먹는다는 소리가 시끄러웠었는데 인구 8000만의 독일에게도 국가GDP를 따여 지금은 세계 4위에 간신히 매달려 있지만 곧 인도에게도 국가GDP가 따일 예정이다.
과거의 일본의 명성이 쪽팔리게 국제적 위상이나 국가적 영향력은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디지털 혁명을 거부한 일본 국민의 보수성으로 인해 국가적, 국민적 혁신에 뒤쳐짐으로서 과거의 명성만 남은 오늘의 초라한 일본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추구하여야 할 국가정체성도 잃어 버린지 오래이다.
우리는 일본인을 비하할 때 쪽발이라 부른다. 그것은 다름아닌 버선을 신은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를 나막신의 끈에 끼워 넣은 모습이 꼭 돼지 족발처럼 생겼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로 만든 나막신은 사무라이만 신는 신분의 상징이다. 두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 사무라이를 보고 쪽발이라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일본의 사무라이가 신던 나막신(下駄, 게타·Geta)은 단순한 신발이 아니라, 신분의 상징이었다. 나무로 만든 굽이 2~3cm, 혹은 높은 경우 10cm 이상 되었고 발이 직접 흙이나 진흙에 닿지 않도록 설계된 구조이다.
칼을 차고 다니기 때문에 발의 균형을 유지하기에 좋은 형태이기도 하지만 기능보다 품위를 위한 것이었다. 걸음걸이와 자세가 곧 신분의 품격이었다. 사무라이가 성문이나 성 안으로 들어갈 때 게타 소리를 내며 걷는 것은 지배계급의 위엄을 상징했다.
그에 비해 농민은 논밭에서 일하기 때문에 진흙과 물에 강한 짚신(草鞋, 와라지)을 신었다. 볏짚으로 직접 엮은 신발로, 저렴하고 가볍고 미끄러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민이 게타를 신고 성문이나 관청 근처에 가는 것은 무례로 여겨졌다. 신발로 계급을 나누는 문화가 일본에 있었던 것이다. 그 사무라이가 원숭이가 됨으로서 일본은 비로서 일본인이 되는 문명개화의 축복을 받는다.
사무라이가 막부시대 죽고 죽이며 땅따먹기하던 시대도 있었고, 칼을 버리고 근대국가로 혁신함으로서 식민지를 경영하며 세계의 열강으로 올라서서 미국과 맞짱뜨던 시대도 있었고, 현대전쟁의 화력을 상징하는 항공모함 전단을 처음으로 창안하여 바다를 지배하던 일본의 위상은 요즘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해군력에 있어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전력을 평가받고 있어 그나마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일본은 대단한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폭 두방을 받고도 재건하여 세계 경제를 호령한 나라의 영화와 명성은 여전히 미국을 두렵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국민성 또한 선진국 답게 수준과 교양을 갖춘 선진국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여타 선진국에 비하여 일본의 위상은 쪽팔리게 해마다 주저 앉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으며 동양을 대표하던 선진국의 위상은 초라하기만 하다.
일본은 미국의 흑선(黒船, 쿠로후네)을 끌고 온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개방을 당한 후 국가 혁신을 통한 생존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이 메이지 유신이었다.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일본열도는 200여개의 번으로 갈라져 막부의 통치를 받던 일종의 연방제로 일본열도가 분할 되어 있었다. 강성한 다이묘가 다스리는 번은 많은 사무라이 즉 칼잽이를 고용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천황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개무시 당하는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고 가장 강력한 힘과 군사력을 가졌던 막부에 번주들이 충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누가 칼잽이를 많이 고용하였는가에 따라 다이묘와 사무라이가 활개치던 나라였다. 권력은 칼끝에서 나오는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누가 인간 도살을 잘할 수 있는가가 곧 힘이었고 권력이었다.
그러나 사무라이 즉 칼잽이는 칼을 써야 하는데 그들만의 기준이 있었고 죽음을 넘어서는 비장함은 사무라이의 자존심이었고, 그 죽음에 초연한 사무라이 모습에 서방세계는 동경과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사무라이를 거느린 주군은 비겁함을 가장 수치로 여겼다. 따라서 전쟁과 전투에에서 주군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것이 명예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점령만 하면 승리할 것이 생각했던 사무라이들은 희대의 개좆병신 선조가 똥줄 빠지게 도망간 것을 보고 어떻게 주군이 도망을 갈 수 있는가로 황당해 했다. 임진왜란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 중 가장 큰 피해와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다. 당시 인구 절반이 죽었고 농본사회의 경제 근본인 농지 절반이 사라졌다. 당시 인구 추정치로 보면 150만명에서 200여만명이 죽어나갔다. 빨갱이 공산당이 일으킨 6.25 사변에 버금가는 피해를 남겼다. 그것은 연장질과 칼질 밖에 모르는 칼잽이 연장질 문화의 개쪽발이의 만행이었다. 여하튼 임진왜란 때 붕괴된 경제기반과 생산성은 등신 새끼 고종이 뒈질때까지 회복하지 못하는 개조선 개씹선비의 무능함도 증명해준 전쟁이었다. 얼마나 개좆같이 무능하면 수백년 동안 경제 복구를 하지 못한 것인지 각을 떠서 살가죽을 벗겨도 시원치 않는 개조선 개씹선비새끼들이었다. 하여간 개조선 개씹선비 그 좆같은 것들은 천하에 쓸데없는 개쓰레기 개씹종자들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 한 것은 무너진 개조선 개씹선비의 경제를 일제시대가 시작되며 회복하고 성장하여 일제시대 인구가 2배가 늘어나며 경제가 폭풍성장을 한다.
여튼 칼질과 연장질로 해가 뜨고 해가 지던 사무라이 사회에 그토록 자랑스런 칼질을 한방에 개작살 내는 페리제독의 쿠로후네의 거대한 대포는 사무라이들의 똥줄을 타게 만들었다. 문을 열지 않으면 개작살 내겠다는 페리 제독의 협박을 남기고 1년 후 다시 올 것이며 그때까지 문을 열지 않으면 모조리 개작살 내서 각을 떠서 사시미를 치겠다며 물러갔다.
일본 열도는 패닉에 빠졌다. 동네 양아지 새끼로 칼질이나 하며 패로 모여 연장질로 날밤을 세우던 일본 열도 양아지들은 서러웠다. 사무라이 자존심도 개좆이었다. 대포 한방에 사무라이 연장질이 개작살 날 것을 생각하면 똥줄이 타들어갔다. 결국 그 자존심 강하고 칼질 하는 것이라면 또는 연장질 하는 것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사무라이들은 대포 앞에 찰파닥 엎드려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어떻하면 저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적 거대한 파고를 넘어설 수 있을까를 존립의 문제로 고민했다, 그것은 200여개의 번(藩)으로 갈라진 일본 열도를 하나의 힘으로 모을 수 있는가에 이르게 된다. 즉 200여개의 소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느냐를 고민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심장이었던 프로이센은 하나의 신앙을 통한 사회적 구심점은 가졌지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수십 수백개의 영토로 쪼개져 각기 다른 관세와 세제, 통화가 유통 되었다. 이러한 관세장벽은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에 불어닥친 산업혁명과 중상주의 물결에서 독일은 변방의 낙후된 국가로 남게 했다.
마차에 물건을 실고 해외로 팔러가려면 프로이센의 수십개 국가의 관세장벽에 부딪혀 삥을 뜯겼고 100원짜리 물건이 해외로 팔릴때는 1,000원이 되어 버리는 사실상 국제무역은 붕괴되어 있었고 경제는 몰락해 있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프로이센 주도로 1834년에 관세동맹(Zollverein)이 공식 출범했다. 관세동맹을 통한 경제적 통합은 하나의 경제권을 만들었다. 독일어권 경제는 살아나기 시작했고 상업과 산업활동이 불처럼 일어났다.
산업혁명의 변방국이었던 독일은 산업혁명의 후발주자로서 산업혁명을 압축하는 창조성을 발휘했고 마침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국가로 성장했다. 더욱이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출현은 독일을 통합하고 하나의 국가로 국력을 응집하는데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으며 보불전쟁을 통하여 나폴레옹에게 당한 치욕을 갚았다. 그리고 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이 되었다. 산업과 경제, 군사력까지 마침내 유럽의 패자로 들어선 독일의 압축 산업혁명은 후발 산업국인 미국, 일본, 한국의 롤모델이 되었다.
무식한 놈들이 대가리 빠가새끼들인 조센징 학자나 박사, 교수 나부랭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가 일본을 따라 한 것이라는 무식한 개소리를 하고 자빠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로 가서 파독광부를 만나고 아우토반에 내려 고속도로를 보고 직접 고속도로를 스케치한 원본이 수천장이다. 그리고 건설한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작을 알렸다.
하여간 천재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 하는 조센징 학자 나부랭이 무식한 새끼들 어느 시발새끼들이든 내 앞에 오면 단 10분이면 아구창 개똥으로 만들 정도로 나는 20년 넘게 박정희 대통령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꼴에 주접 떠느라 군사정권이네 유신헌법이네 민주화네 개씹소리 해대는데 그런 것들 나는 지나가는 개똥구멍에 들러 붙은 기생충만도 생각하지 않는다. 제대로 아는 새끼 한마리를 보지 못했다. 하여간 무식한 새끼들이다. 아직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른다. 그분이 품었던 가슴을 나는 헤아리지 못한다.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고 건설한 대한민국의 6대 주력 산업으로 처먹고 살면서 배은망덕하는 씹새끼들이 넘친다.
독일이 산업혁명 후발국임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에 “압축성장(Compressed Growth)”을 이룰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단순한 기술 모방이 아니라 루터의 종교개혁이 심어놓은 신앙적·윤리적 토대 덕분이었다. 이를 단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루터의 종교개혁과 직업소명론
루터는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단순히 수도사나 성직자만이 아니라, 농부, 상인, 장인, 학자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개조선 개씹선비가 장인을 개 돼지 취급하며 피를 빨아 먹을 때 노동의 신성화와 직업윤리가 독일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다. 이는 ‘성실한 노동’, ‘정확함’, ‘양심적 생산’, ‘책임감’이 일상화 되었다.
2. 신앙적 양심이 만든 사회적 신뢰
루터파 지역은 계약의 신성성을 강조했다. 이는 곧 법치와 준법정신, 사회적 신뢰(capital of trust)로 발전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내면적 양심이 곧 기업과 공공의 질서를 지탱하는 윤리적 기반이 되었고 독일의 은행, 보험, 공증제도 등도 이런 신뢰 기반 법문화에서 발전했다.
3. 장인정신과 기술교육
루터적 소명윤리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태도를 모든 직업에 확산시켰다. 중세의 길드(Guild) 전통과 결합해 장인정신으로 정착하며 직업학교(도제교육)와 기술대학으로 이어지는 독일식 기술교육 체계의 뿌리가 되었다.
4. 국가 윤리의 확립
루터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영역, 국가는 질서를 유지하는 영역으로 보았다. 즉 하나님의 섭리 안에 국가와 질서를 모두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 그래서 성경적 세계관으로 독일 헌법을 제정 되었고 모든 국가 윤리의 틀이 되었다. 독일헌법에는 교회세를 규정하고 국가가 이를 징수하여 교회의 운영 및 목사의 월급까지 주어 목사는 국가의 공무원으로 봉사하게 되어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독일 공공윤리의 뿌리가 되었고, 국가와 국민의 윤리적 토대를 마련하여 주었다.
종교개혁의 주요한 정신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 개인간의 소통 즉 누구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만인제사장설이다. 따라서 개인주의가 성숙하게 뿌리를 내렸고 이것이 독일의 시민의식과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극도로 혐오하게 만드는 사회적 윤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미국의 페리 제독에게 무참하게 까인 열도의 사무라이들은 생존과 존립의 문제를 걸고 일본 열도를 하나로 묶을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막부체제를 혁파하고 모든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통치권을 넘겨 단일통치 국가로 혁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막부와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꼬여 있는 200여개의 번의 이해관계가 문제였다. 국가 혁신의 이해는 같이 했지만 천황을 높이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파와 문호를 열고 외국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하자는 개국개화(開国開化)파로 나누어 싸웠다. 국가운영의 이념을 두고 다투는 중에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사쓰마(薩摩, 지금의 가고시마)와 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의 두 강력한 번(藩)이 막부와 대립하게 된다.
이 때 일본을 구원한 영웅이 나타난다. 사카모토 료마는 당대를 아울렀던 검객이었다. 즉 당대에 칼질을 가장 잘하는 연장질의 대가였다. 형수 가랑이에 칼질이나 하려는 찢재명 같은 등신새끼는 감히 이름도 내밀지 못하는 고수였다.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칼질의 고수였던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 출신으로 수십년간 전쟁을 벌린 견원지간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이끌어 냄으로서 마침내 개수구꼴통질을 하고 자빠진 막부를 몰아낼 동력을 만들어냈다.
사초동맹(薩長同盟, 1866)으로 명명 된 이사건은 일본 근대화의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으며 사초동맹으로 막부는 개작살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백기투항을 함으로서 대정봉환이 이루어졌고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돌아갔다. 마침내 200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경쟁과 분열, 전쟁으로 얼룩진 칼잽이들의 역사가 사라지는 일본 열도 최대의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또한 하나의 국가로서의 일본(日本)의 출발이기도 했다.
일본 역사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을 일구어낸 통합의 화신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이 이루어진 2달 후 교토의 오미야 여관에서 암살 당했다. 여전히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통합과 혁신의 상징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최고의 부자 손정의(孫正義)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며 그의 초상화는 손정의 회장 사무실에 걸려 있다. 영웅이 사라졌지만 유신3걸에 의해 사카모토 료마의 유업은 이어진다. 내정 개혁을 담당한 오쿠보 도시미치, 정치 개혁을 담당한 기도 다카요시, 군권을 장악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모두 비슷한 나이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의 미천한 신분이었고 사초동맹을 맺은 조슈번과 사쓰마 출신이었다. 조슈번과 사스마번의 하급 무사들은 기존의 모든 칼잽이들의 모든 기득권을 해체했고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의 주력이 된다.
대정봉환을 통한 통합과 국가명 일본의 출발은 독일이 관세동맹을 통해 하나의 경제권으로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것과 동일한 길이었다.
연장질과 칼질만 배운 칼잽이들이 만개의 칼을 들고 연장질을 해도 페리 제독의 함포 한방이면 개좆이 되는 사무라이의 힘은 개똥구멍에 들러 붙은 기생충만도 못한 한심한 존재였다. 칼잽이들은 국가를 어떻게 혁신하여야 하는지를 방향 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냥 칼찬 사무라이, 연장질과 칼질에 특화 된 칼잽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유신3걸 칼잽이 세명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미국과 유럽을 순회할 사절단을 만들어 변화하는 세계의 모습과 서구세상을 직접 보며 배우기로 했다.
130만엔의 이라는 막대한 돈을 이와쿠라 사절단을 꾸리는데 쏟아 부었다. 그돈은 국가예산 1%에 해당 했다. 107명의 사절단으로 채워진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등 12개국 100여도시를 1년9개월간 방문하였다. 유신 3걸 중 사이고 다카모리만 국내에 남아 내정을 돌보기로 하고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 장차 일본을 대표할 인재들이 모두 이와쿠라 사절단이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모든 국가를 사절하였지만 일본의 혁신과 개조는 독일에서 찾게 되었다, 독일을 찾은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압축성장 경험을 가르쳐 주었고, 산업화에서 뒤쳐진 국가가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는 100년이상 영국의 산업혁명에 뒤쳐진 일본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독일의 압축성장임을 깨닫게 된다. 경험을 전수하는 비스마르크에게 오쿠보 도시미치는 미친 듯이 독일을 배워 반드시 독일과 같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독일을 스승삼아 철저하게 국가 개조에 나셨다. 국가 주도하에 장관 월급 몇배를 상회하는 돈을 지불하며 독일 기술자를 불러 모아 철도를 건설하고 공장을 건설했다. 근대식 방적공장에는 사회지도층 자녀를 솔선하여 일을 시켰고,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국가 우편망을 완비했고, 화폐제도 개혁, 전신부설 등 일본의 모든 것을 독일식으로 뜯어 고치고 개조했다. 무엇 보다도 대대적인 국민교육에 나서 남녀 모두 90% 이상이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일본은 그렇게 근대화에 성공했고, 산업화도 이룩했다. 경제는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부국이 되었으며, 항공모함을 자체 건조하는 과학기술대국으로, 세계 3대 군사강국이 되었다.
국가 개조의 과정에서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다. 각 번의 모든 군대를 해산시켰다. 특히 칼잽이의 나라의 사무라이들은 반발했다. 전쟁은 칼잽이 사무라이의 전유물이었고 사무라이로서 두자루의 칼을 항상 차고 다니는 것은 자존심이며 특권이고 칼잽이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국민개병령으로 사무라이의 전유물인 전쟁은 일본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군인으로 전장터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정체성과 특권, 권위를 모두 빼앗긴 사무라이들은 분노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는 극에 달한 분노에 떠는 사무라이의 뿌리를 뽑기 위해 또 다시 명령을 내렸다.
사무라이의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과 사무라이들이 자존심과 신분을 위해 두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하는 폐도령을 내렸다. 개조선 개씹선비에게 내린 단발령은 애교였다.
유신3걸중의 한명인 마지막 사무라이 사이코 다카모리는 4만명의 사무라이를 모아 오쿠보 도시미치와 전쟁을 벌렸다. 그러나 백만자루의 칼이 있은들 한방의 대포에 개작살 나는 전쟁이었고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는 활복하였다. 잘린 사이고 다카모리의 머리를 받아든 정부군 지휘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염불을 독송하며 저승길을 배웅했다.
비극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난 일년 후 오쿠보 도시미치는 여관에서 암살을 당했고 비정한 권력투쟁 속에 기도 다카요시도 병을 얻어 죽어 일년여 동안 유신 3걸은 모두 죽어 북망산을 향해 갔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의 혁신을 위해 독일을 철저하게 베꼈다. 천황의 제복도 독일 제복을 그대로 만들어 입혔고, 천황과 정부각료는 연미복을 입고 궁중파티를 열고 독일의 민속음악 왈츠를 가져다 엔카를 만들고 독일인을 배우겠다며 가짜 수염을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일본군대는 철저하게 독일군을 그대로 베꼈다. 정치, 사회, 군대, 질서 등 국가 시스템을 그대로 베꼈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독일에 1년 6개월간 유학을 하며 공부하고 독일 헌법을 그대로 베껴 일본 헌법을 만들고 초대 수상이 되었다.
독일을 따라하겠다며 연미복을 입고 우스꽝스런 파티를 벌리는 것을 보고 유럽은 일본을 동양의 원숭이(Monkey of the East)라고 조롱했다. 유명한 언론에서는 풍자화가 그려졌고 그 풍자화 밑에는 원숭이 민족(The Monkey Nation), 모방의 제국(The Copycat Empire)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 말은 단순한 인종차별을 넘어서, “문명은 모방으로 얻을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원숭이가 되어 철저하게 모방했고 결국 그들은 세계 3대 열강의 반열에 오르며 질서가 잡힌 근대국가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일제시대 더러운 개조선 개씹선비의 문명개화에 많은 영향과 선한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만들어진 독일의 기독교 문명을 모방한 일본은 지금도 세계에서 시민의식과 질서를 상징하는 국가가 되었다.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질서와 공중도덕이 가장 우월하게 자리 잡은 나라로 독일과 일본을 꼽는다.
기독교 문명을 그대로 베낀 일본이었지만 그 정체성의 본질인 기독교는 자리 잡지 못했다. 세계에서 신이 가장 많은 국가로 일본과 인도를 꼽는다, 사람보다 많은 신들의 나라 일본은 결국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만들어 충성하는 광기 속에 기독교 문명의 패자 미국으로부터 두방의 원자폭탄을 맞고 광기는 사라졌다.
국부 이승만께서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것을 예견하며 그 이유로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믿는 미신과 광기를 들었다. 그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고 대한민국은 건국하며 국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국가의 문을 열었다. 그 기도문은 대한민국 공문서 1호로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의 영웅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후키자와 유키치, 시부사와 에이치, 이토오 히로부미,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등 그들에게 국가 정체성을 기독교 문명의 모방이 아니라 실체를 품었더라면 일본의 모습은 아름다워 졌을 것이다, 일본의 한계는 거기까지 였지만 칼찬 원숭이에서 일본인이 되는 문명개화를 일군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일본을 개화시킨 기독교 문명은 일본의 오늘을 있게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체성을 품었다면 일본은 달라졌을 것이며 지금 보다는 만배는 좋아졌을 것이다.
일본에는 전국에 기독교식 웨딩을 올리는 교회가 수백곳이 넘는다. 웬만한 도시에는 예배는 없지만 결혼식만 올리는 십가가 걸린 교회가 정체성 없는 기독교 문명을 내려다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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