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공격 칼 빼든 이재명 !
이재명 주장 : 미군정과 이승만은 악마 , 반란자들은 정의의 사도
2025.10.19. ‘여순사건 ’ 77 주년을 맞아 이재명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한다 . 여 -순 반란을 주도한 14 연대 (국경 , 국방경비대 ) 소속 반란자들이 정의이고 ,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이 악마라는 요지의 이념전쟁을 부추겼다 . 이승만 대통령은 여수에 주재한 14 연대에 배를 타고 제주도에 출동해서 제주도 양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 14 연대의 일부 애국자들이 이승만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맞서 ” 저항했다는 논리를 폈다 .
이념전쟁이 아니라 이념공격이 있을 뿐
우익이 잠자고 있는 동안 빨갱이들은 부지런히 역사를 왜곡하는 책들을 발간했고 , 서점과 도서관은 좌익들이 부지런히 쓴 왜곡된 역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 . 오늘 10 월 20 일 , 조선일보 김광일 대기자는 “이념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는 헤드라인으로 방송을 했다 . 이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 전쟁은 공격과 방어가 부딪히는 현상을 말한다 . 그런데 해방 직후로부터 빨갱이들의 이념공격은 이어져 왔어도 이를 방어하는 국민은 열 명도 안 되었다 .
지만원과 김대령 박사가 쓴 5.18 책은 광주족들의 방해공작으로 도서관에서 모두 폐기되거나 축출됐고 , 국회도서관은 2 권씩 받게 돼 있는 신간 중 유독 지만원이 쓴 신간은 받기를 거부해오고 있다 . 예전에는 검색어만 치면 떠오르던 이념 자료들 중 빨갱이들에 불리한 내용들이 대거 삭제돼 있다 . 지금은 인터넷 자료가 없는 가운데 빨갱이들이 인해전술로 나서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북조선 인민공화국 역사로 바꾸고 있다 .
빨갱이들의 역사 왜곡이 들통난 사례가 우익의 공격 자산
1990 년대 중반까지 빨갱이들은 1946 년의 9 월 총파업과 대구폭동을 미군정의 학대에 맞서 일어난 의로운 국민항쟁으로 왜곡해 왔었다 . 그런데 1995 년 북조선을 통치하던 소련 군정 사령관 스티코프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꼬리를 내렸다 . 스티코프 총사령관이 남로당 총책 박헌영에게 두 번에 걸쳐 일화 200 만 엔과 300 만 엔을 주어서 배후 조종한 사건이 1946 년의 9 월총파업이었고 , 대구폭동이라는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
빨갱이들이 역사왜곡을 위해 가장 귀중하게 선택한 사건이 9 월 총파업 사건과 10.1 대구폭동 사건이다 . 그런데 이 두 사건이 모두 스탈린 -스티코프가 주도한 사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빨갱이들은 이 두 사건은 쏙 빼놓고 1948 년의 4.3 사건과 같은 해의 10.19 여 -순 반란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 4.3 사건은 이미 노무현에 의해 왜곡되었고 , 여 -순반란 사건에 대해해서는 이제부터 이재명이 대통령 자리를 이용해 왜곡공작을 시작한 것이다 .
이후 ① 여수 -순천 반란 사건 요약정리하고 ② 스티코프 비망록 내용을 소개한다 .
2025.10.20. 지만원
여수 -순천 반란사건 요약
아래는 왜곡의 손톱이 미치지 못했던 시기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한 “여수 .순천 반란사건 ”을 요약한 것이다 .
사건의 성격
군부대에 대거 침투한 좌익세력이 제주도 폭동 진압 증원 차 출동하는 부대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 이에 지방 좌익세력과 동조자들이 가담하면서 무자비한 살상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여수 -순천 지역을 공산화 천하로 돌변시킨 , 건군 사상 그 유례가 없는 [군사 반란 사건 ]이었다 .
반란군 제 14 연대의 프로필
남로당은 제주도 폭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는커녕 토벌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자 초조감을 가지고 있던 차에 때마침 5 여단 예하 여수 주둔의 14 연대 중 1 개 대대가 제주도로 증원된다는 기밀을 탐지하게 되었다 . 남로당은 이 14 연대의 제주도 출동을 저지시킴은 물론 이 부대를 역으로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자는 야무진 착상을 하게 되었고 , 전국의 모든 부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전국적 조직책들에 전군적인 반란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내려 국가를 전복하려 획책했다 . 남로당 군부 적화 특별공작 최고 책임자는 (박정희를 포섭했던 ) 이제복이었다 .
제 14 연대에서 이제복의 지령을 받은 사람은 조직책 지창수 상사 , 그는 연대 인사계였다 . 그리고 같은 연대의 김지회 중위와 홍순석 중위가 반란군 지휘관으로 나설 것을 모의했다 . 김지회 중위는 육사 3 기로 대전차포 중대장이었고 , 홍순석 중위는 육사 3 기로 순천에 주둔하는 부대의 중대장이었다 .
제 14 연대는 1948 년 5 월에 여수읍 신월리에서 창설되어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고 , 연대장은 박승훈 중령이었다 . 박승훈 중령은 일본 대좌 출신으로 일본육사 27 기였다 . 이 연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광주에서 창설된 제 4 연대로부터 불온하고 말썽 많은 이른바 문제 장병들을 차출받아 창설되었기 때문에 군 내부에 침투한 공산분자들의 선동에 쉽게 동조할 수 있는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 통상 각 부대는 인력을 차출 받았을 때 부대에서 가장 말썽을 잘 부리는 문제아들만 추려서 내보낸다 . 더구나 제 4 연대는 광주에서 창설되어 광주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호남 출신 장병들이 주를 이루었다 .
여수지역 상황
1948 년 10 월 19 일 , 14 연대 제 1 대대가 제주도로 출발하기 위해 여수항에서 선적 작업을 하고 있었다 . 그리고 다른 한편 출동대대를 위한 환송 회식이 장교식당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 지창수 일당은 이때를 거사 시점으로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루었다 . 19:00 경 회식이 끝나자 연대장은 참모들을 인솔하고 여수항에 나가 선적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 출항 예정 시간은 24:00 시였다 .
지창수는 김지회 중위와 다시 모의한 끝에 부대출발 직전에 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 제 1 대대는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고 잔류부대인 제 2 대대는 이들을 돕고 있었다 . 지창수는 연대 내의 좌익세포 40 여 명에게 사전 계획대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게 하고 20:00 시에 비상 나팔을 불게 하여 출동대대인 제 1 대대 병력을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 그리고 이래와 같이 선동하였다 .
1) 지금 경찰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온다 . 경찰부터 타도하자 !
2)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
3)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달성하자 .
4) 지금 북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 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
5)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한다 .
3 명의 병사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가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 연병장은 순식간에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고 모든 병사들은 겁을 먹고 맹종할 수밖에 없었다 . 지창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리를 쳤다 .
“탄약고를 이미 점령해 놓았으니 각자 탄약고로 가서 실탄을 최대한으로 휴대하라 , 모든 장교들을 즉시 사살하라 ”
이로써 출동병력은 단번에 반란군으로 변하여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 여수항에 있던 연대장은 난동이 일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부연대장인 이희권 소령을 먼저 들여보낸 뒤 자기는 환송 차 선착장에 나온 제 5 연대 참모장 오덕준 중령과 함께 영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
이때 그는 사방에서 총성이 들리고 자기 휘하의 부대가 반란군이 되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 연대장은 사태수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어느 여관에 은신하였다가 후에 구출되었으며 , 여단 참모장 오덕균 중령은 즉시 해군경비정을 타고 목포를 경유하여 육군본부로 가서 사건의 진상을 보고했다 .
반란은 주동자들의 생각보다 아주 쉽게 성공했다 . 이때 연대 부근에서는 남로당 핵심 분자 23 명이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합세했다 . 반란군 2 개 대대 병력은 차량으로 여수 시내로 돌진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봉산지서를 습격했다 . 이를 계기로 시내 도처에서 경찰과의 접전이 있었지만 경찰은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
모든 경찰지서들이 습격당하고 경관들이 사살당하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여수시는 반란군의 천지가 되었다 . 이때 좌익 단체 및 학생 600 여 명이 인민공화국 만세와 인민해방군 만세를 부르며 반란군을 환영했다 . 1948 년 10 월 19 일 , 20:00 부터 20 일 01:00 까지 5 시간 동안에 발생한 일이었다 .
반란군은 이들에게도 무기와 탄약을 지급하고 그들을 앞세워 20 일 오전 9:00 시에는 관공서 , 은행 등 주요 정부 시설들을 점령했다 . 그리고 그동안 체포한 경찰관 , 기관장 , 우익단체 요원 , 지방 유지 등을 반동분자로 몰아 경찰서 뒤뜰에서 총살해 버렸다 . 인민대회를 개최하고 시민들을 협박하여 강제 동원하였다 . 이러한 난동은 남로당 여수군당이 지휘했다 .
순천시 상황
여수를 완전히 장악한 반란군 2 개 대대는 10 월 20 일 09:30 분 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이동했다 .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14 연대 예하 2 개 중대는 홍순석 중위의 지휘하에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순천경찰서는 한편으로는 여수와 광양 사이의 도로에 경찰 1 개 소대를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천교 제방에 주력부대를 배치하여 대적했지만 그들은 반란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 더욱 한심했던 것은 국경 (국방경비대 )이 너무나 급한 나머지 광주에 있는 제 4 연대로부터 1 개 중대를 뽑아 순천교 및 순천역에 배치했지만 , 이들 광주출신 군인들 역시 14 연대 반란군을 보자마자 그들과 합류했다 . 중대 내의 좌익계 하사관들이 중대장을 사살하고 반란을 반대하는 일부 사병들을 모두 사살해 버렸다 .
10 월 20 일 , 17:00 경 , 반란군은 순천시 전부를 다 장악하고 , 좌익분자들은 물론 여기에 더해 선동된 학생들을 무장시켜 이들로 하여금 반동분자들을 색출케 하여 인민재판이라는 미명을 내걸고 500 여 명을 학살했다 . 그리고 순천에서만 400 여 명의 경찰관들이 반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이들에 붙잡혀 학살당했다 .
민심은 동요되고 소박한 주민들은 정말로 공산정권이 출현한 것으로 착각하여 반란군에 가담하는 자들이 속출했고 이로써 무장 폭도들의 수는 수천에 이르렀다 . 순천을 장악한 반란군은 순천 근교의 고흥 , 벌교 , 보성 방면으로 진출하여 경찰서들을 점령했다 .
반란군의 만행
강렬한 적개심을 품은 14 연대 반란군들은 여수 현지에서 활동하던 좌익들과 합세하여 시내 곳곳에서 잔혹성을 선보였다 . 자정 무렵부터 여수는 인공기가 높이 게양된 그야말로 인민공화국 천하가 되었다 . 읍내 거리에는 ‘인민대회 ’를 20 일에 개최한다는 포스터가 나붙었고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 ’ 명의로 ‘제주도 출동 결사 반대 , 미군의 즉각적이면서 완전한 철수 , 인민공화국 수립 만세 ’를 요지로 하는 성명서가 발표됐다 .
남로당 여수읍당에서는 재빨리 읍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뒤 여수 내의 경찰과 그 가족 , 우익 인사들과 그 친지들을 색출하는 데 착수했다 . 여수에서는 21 일까지 약 800 명이 붙잡혀 여수 경찰서 뒷마당과 중앙동 로터리에서 처형됐다 . 특히 경찰이나 우익 청년단체 단원들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은 참혹하게 사살하는 과정에 잘 나타나 있었다 .
하루도 쉬지 않고 ‘인민재판 ’이 열렸고 , 재판이 열릴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즉석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처형됐다 . 일부 여순경들은 신체 일부를 심각하게 절단당하거나 훼손당한 채 죽어갔다 . 그 모습이 너무나 참혹해 수습을 위해 현장에 들어선 사람들이 한동안 넋을 잃었다 .
여수에서 피바람을 몰고 왔던 반란군의 소식을 들으면서 순천의 경찰들은 어떤 준비를 했을까 . 순천의 경찰들은 반란군이 진입하기 전에 수감 중이던 좌익 혐의자들을 미리 집단 살해했다 . 자신들의 동료와 친지들이 죽어 넘어진 상태에서 행해진 경찰의 보복이었으니 그 참혹함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반란군의 물결을 경찰이 당해 낼 수 없었다 . 순천을 점령한 반란군과 좌익들 역시 경찰과 그 가족들을 색출해 잔혹하게 살해했다 . 반란군과 좌익 인사들은 한층 더 조직적인 방법으로 우익 인사 색출 작업에 나섰다 . 그때에 선보였던 인민재판은 6.25 남침 시 인민군에 점령된 모든 지역에서 같은 방법으로 자행됐다 . 여수에서는 1,700 명의 사상자와 9,800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 순천에서도 400 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
정부의 토벌작전
이에 정부는 10 월 21 일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하고 토벌사령관에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제 2 여단 및 제 5 여단을 지휘토록 함과 동시에 10 월 23 일부로 여수 -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 토벌에 동원된 병력은 10 개 대대와 1 개 비행대 (경비행기 10 대 ) 및 함정들이었다 .토벌작전이 시작되자마자 반란군은 산으로 도망가 공비가 되었다 . 10 월 23 일 순천과 광양에 있던 발란군은 구례방면으로 쫓겨나 백운산으로 그리고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
이로써 반란군은 9 일 동안의 난동을 끝으로 모두 험한 산으로 쫓겨나 공비가 되었고 , 이후부터의 토벌작전은 지리산 , 백운산을 향해 전개되었다 .
2025.10.20. 지만원
스티코프 비망록
요 점
소련은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박헌영을 동시에 움직여 북한을 조기에 장악하고 이어서 남한까지 장악하기 위해 조선공산당에 반미투쟁 방법과 시기를 지시하고 자금까지 지원하였다 . 1946 년 9 월 총파업과 10 월 1 일 대구에서 시발된 ‘10 월 폭동 ’도 소련이 직접 지휘했다 . 1948 년 4 월에는 김구와 김규식 등 수많은 인물들과 단체장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이들로 하여금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방해하도록 회유한 것도 소련이었다 .
중앙일보는 1995 년 05 월 09 일 , 북한정권 수립기에 북한의 최고실권자였던 스티코프가 작성한 일기를 정리해 내놓았다 . 이 비망록은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한 蘇 군정이 북한을 이미 완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은 데 이어 남한 정세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
1946 년 9 월 좌익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全評 )」가 주도한 9 월 총파업 때 북한의 소 -군정이 2 백만 엔을 , 뒤이어 발생한 10 월 폭동 때는 3 백만 엔의 자금을 지원한 것은 『스티코프 비망록 』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 이는 당시 남한 정세에 소련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이제까지 9 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 10 월 폭동에 대해서도 일부 학자는 조선공산당의 개입사실까지도 부인해 왔다 . 그러나 비망록은 9 월 총파업이 조선공산당 (남로당 전신 )의 지시 차원을 넘어 소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고 , 10 월 폭동에도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소군정까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조선공산당과 소련의 개입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불식시킨 셈이 됐다 .
9 월 총파업은 46 년 7 월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대한 종래의 우호정책을 철회하고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강력히 전개하기 위해 채택한 ‘신 전술 ’의 구체적인 행동 표현이었다 .
‘신 전술 ’이 채택된 같은 달 중순 [전평 ]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 전술 ’ 지령에 입각해 46 년 10 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 그러나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이 계획을 바꿔 총파업을 9 월로 앞당길 것을 지시했다 . 김남식 (金南植 .평화연구원 ) 연구위원은 『조선공산당이 미군정 운수부가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한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 』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
스티코프 비망록 내용
그러나 비망록은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 총파업 일정을 앞당긴 결정은 바로 소군정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 비망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
『46 년 9 월 9 일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 .』
이에 대해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 』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 비망록에는 스티코프의 이런 지시가 9 월 11 일과 16 일 두 차례에 걸쳐 내려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
그러나 전평 지도부의 긴급회의가 9 월 10 일 소집돼 총파업을 9 월로 앞당길 것을 결정한 점으로 미뤄 볼 때 아마도 스티코프의 지시는 박헌영이 이 문제에 대해 질의한 9 월 9 일이나 아니면 9 월 10 일 이른 아침에 하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 계획대로 총파업은 46 년 9 월 23 일 부산철도 노동자 7 천여 명이 일급제 반대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불을 댕겼다 .
다음날 서울을 비롯한 全 철도종업원 4 만 명이 , 9 월 25 일에는 출판노조가 , 연이어 전신관계 종사자들이 동조파업을 단행함으로써 파업여파는 각 부문으로 확산됐다 . 총파업 기간에 대한 비망록 내용 중 주목을 끄는 대목은 蘇 군정이 총파업이 최고점에 달한 9 월 26 일과 28 일 두 차례나 파업투쟁 방향을 지시한 점이다 .
특히 「체포된 좌익활동가들의 석방 」등 정치문제를 요구조건 속에 포함시켜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은 총파업을 정치투쟁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또 蘇 군정이 파업투쟁 자금으로 2 백만 엔을 긴급 지원한 사실 역시 파업투쟁을 고취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
총파업이 각 지역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10 월 1 일 대구에서는 1 천여 명이 식량 배급을 요청하며 시위를 벌였다 . 파업노동자 등의 가세로 시위가 점차 확대되자 경찰은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 . 이 와중에 시위군중 한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다음날 흥분한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극렬 행동을 서슴지 않자 美 군정 당국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출동시켜 소요를 진압했다 .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시위는 대구 인근 지역으로 번졌고 급기야 11 월 중 순까지 경북전지역과 경남 . 강원 . 전남 등지에서 계속됐다 .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 . 철도가 파괴됐으며 우체국 등이 방화돼 통신망이 두절됐다 . 왜관에서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수명의 경찰관이 학살됐다 . 그러나 시위는 美 군정과 경찰 , 그리고 우익단체들의 적극적인 진압노력으로 11 월 중순을 고비로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
이제까지 일부 학자는 10 월 폭동에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해 왔다 . 그러나 비망록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蘇 군정까지 10 월 폭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비망록에 따르면 10 월 폭동이 시작된 그 다음날 스티코프는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3 백만 엔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
그리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 (趙斗元 )은 폭동이 진행 중인 10 월 21 일 蘇 군정에 대해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 이런 사실들은 10 월 폭동 역시 조선공산당이 상황 전개에 따라 蘇 군정과 교감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남노당이 소군정의 지시와 함께 자금지원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중앙일보가 1994 년 12 월 입수한 ‘레베데프 비망록 ’과 95 년 5 월 입수 ·공개한 ‘스티코프 비망록 ’ 등에서 이미 밝혀졌다
레베데프 비망록
요 점
해방 후 소련은 북한은 물론 남한까지도 소비에트화 시키기 위해 소군정 최고사령관 ‘스티코프 ’ 대장 -레베데프 소장 -김일성으로 이어지는 지휘라인을 형성했다 . 이들은 김구 김규식 등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이들로 하여금 남한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저지하도록 회유하면서도 과연 김구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불안해했다 . 평양 4 월 연석회의는 스티코프가 지휘했다 .
중앙일보는 1994 년 11 월 15 일 “레베데프 비망록 ”을 입수하여 정리했다 . 비망록을 작성한 레베데프는 소장으로 1945 년 8 월 말부터 소련점령군사령부의 정치사령관을 역임했고 , 47 년 중반부터는 민정사령관을 겸임하면서 북한정권 탄생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이 비망록은 48 년 4 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가 소련측의 각본에 따라 개최된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남북연석회의의 주도자와 조정자가 소련 측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
비망록에는 소군정이 소련군 극동 (極東 )사령부 정치위원이자 스탈린의 북한문제 전권대사격인 스티코프 대장 (大將 )의 재가를 받아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겠다고 발표하고 연석회의에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불러 들여 ▲남한의 총선 반대와 분쇄 ▲유엔 한국 (韓國 )임시위원회 조선 (朝鮮 )에서 추방 ▲소 .미군 철수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남북총선거는 외국군 철수 후 실시 등 ‘한반도의 소비에트화 ’를 위한 4 가지 지침을 관철토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
비망록에 의하면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명령계통은 당시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치위원이었던 스티코프 -레베데프 -김일성으로 이어지고 , 주요 결정은 스티코프와 레베데프간의 협의를 거쳐 김일성에게 지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소련측과 김일성 등은 일련의 소비에트화 과정을 통해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제반 준비를 끝낸 후 , 자신들이 수립할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김구와 김규식을 회유하려고 했음이 밝혀졌다 . 이를테면 그들에게 일정한 직위를 부여하는 대가로 그들의 참여하에 헌법을 통과시킨 후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
레베데프는 김구가 남한의 단독선거를 막는데 과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도가 어느 정도인지 등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
2025.10.20. 지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