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도올 슨상의 만해 한용운 사랑이 아주 지극하고 한국 불교를 상징하는 인물처럼 물고 빨아 주고 있다. 도올 특유의 교만하며 늙은 목소리로 직접 님의 침묵을 낭송하며 물고 빨고 있다.
하지만 만해 한용운은 도올이 그토록 자랑하는 한국 선불교 입장에서 빨아 줄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한국에 선불교 즉 짱깨불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있다고 치고 선불교 입장에서 한용운을 고승의 반열이나 불교학의 발전, 수행의 본보기가 된다거나 하는 수준은 아닐 것 같다.
그저 시인으로 또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이었거나 불교 개혁을 외친 개혁 호소인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다. 워낙 조선놈의 민족성이 역사 날조나 왜곡에 특화 되어 있고, 특정 인물 부풀리기, 거품 채우는 탁월성 덕분에 한용운이 고승처럼 위대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딱히 욕먹을 짓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물고 빨아줄 정도의 인물도 아니다.
다만 “조선불교유신론”을 써서 일본불교를 도입하여 시스템화, 종단화, 세속화, 대형화, 대처승제도, 승녀의 육식 허용, 불교대학 설립, 근대학문(철학과 과학 등)의 불교와 융합, 불교의 사회운동 참여, 사회적 포교의 확대 등 한국 불교를 일본식 불교로 거듭날 것을 외친 것은 맞다.
그리고 한용운은 미신과 잡신에 절여지고, 비맞은 중놈처럼 조선의 선불교(禪佛敎)의 개사기질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선불교의 개 풀뜯어 먹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몰아 내는 대안으로 일본불교로의 개혁 운동을 부르짖은 것은 한용운이 맞으며 나름대로 업적도 크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 개혁 운동은 “조선 불교 유신론”을 써서 선언은 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거나 사회적 운동, 불교계 각성운동이나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외 민족대표 33인 중 1명, 교과서에 실리는 “님의 침묵” 시집 낸 것, 대중 포교용 교재로 불교의 교리와 수행을 쉽게 풀어쓴 책인 불교대전 정도의 저서가 있다.
여튼 한용운은 미개한 문명이며, 개수구 똥냄새 나는 짱깨 선불교를 쓸어내자는 개혁적인 면에서는 높이 처줄만하다. 다시 말해서 문명개화의 문명시대의 도래에 맞춰 개조선 개씹선비의 한반도에서 똥냄새나는 짱깨 문명과 문화를 불교계에서 쓸어 버리자는 개혁정신은 높이 사줄만 하다는 뜻이다. 그 방법론으로 진보한 일본불교를 통해 하자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주장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선진화되고 도덕적인 일본의 개화된 문명으로 악마의 세상인 개조선 개씹선비의 짱깨 문명을 몰아 내자는 것은 올바른 개혁운동이었다.
초기 불교 경전(팔리 경전 등)에서도 점복, 주술, 제사는 엄격하게 출가자가 삼가야 할 행위로 규정하고 있고, 불교 계율(율장, 比丘戒)에는 무당 행위나 점술, 요술, 점복, 부적, 귀신 숭배는 출가자가 금해야 할 잡업(雜業)이다.
국가 이념으로 고려는 호국불교, 호법불교를 선택한다. 즉, 호국(護國)과 호법(護法)은 부처의 도덕과 가치로 국가 이념을 삼아 국가 정통성을 삼은 것이다. 고려 때 샤머니즘은 배척 되었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때론, 불가에서 샤머니즘이 파고들자 국사였던 혜심은 불가에 샤머니즘이 침투하는 것은 즉, 무당적 신앙을 “외도(外道)”라고 일갈 했다.
그러나 조선의 개국은 불가의 생존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고려에 산재한 1300개의 사찰은 세종대에 이르러 36곳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고, 8만에 이르던 승녀는 수백명 또는 수천명만 남고 숙청 되었고, 사찰의 모든 토지와 재산은 몰수되었고 도심지와 마을에서 쫓겨나 산속에서 산적처럼 살아야 했다.
승려는 한양 땅을 밟지 못하게 하였고, 승녀의 신분은 백정과 같은 천민으로 신분이 격하 되었다. 장례식이나 제례에는 참석할 수 없었고 생업(농업·상업·기술직)에도 종사할 수 없었다.
결국 개조선 개씹선비의 시대 불가는 먹고살기 위해 또는 생존을 위해 샤머니즘과 타협한다. 산속으로 쫓겨난 불가는 고려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찰 내에 전각을 짓고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을 지어 산신령을 섬기고 나반존자를 수호신으로 만들고, 북두칠성도 섬겼다.
사찰은 무당들의 기도처가 되었고 기복과 사후구제, 점치고, 푸닥거리하는 산신당이 되었다, 승녀도 민가로 내려가 기도를 가장한 푸닥거리판을 벌렸다. 백중제와 천도제, 49제를 통해 생업을 이어야 했다,
구한말 희망 없는 세상에 고종과 민비는 샤머니즘을 국교로 삼아 궁궐 한가운데서 푸닥거리 잔치판을 벌리고, 무당이 하는 말은 다음날 어전회의가 열리고 고종의 입을 통해 어명이 되었다.
민가의 무속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무당의 푸닥거리는 천연두도 몰아내는 세계 최강의 기도발을 자랑했고, 수천명의 무당이 장안의 여론을 주도했다. 종두법의 국내 도입으로 밥줄이 끊긴 무당들은 임오군란 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살린 인물로 기록 될 천연두를 몰아낸 지석영의 종두장이 불태웠다.
구한말 왕도 백성도 샤머니즘에 미쳤고 무당의 푸닥거리는 국가 이념이었다. 도성을 출입할 수 없는 승녀들도 무속으로 혹세무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당화 된 절간은 머리 깍은 중들의 푸닥거리하는 산당이었고, 점괘를 잡는 신기의 영험함이 도력의 크기였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청년 한봉완은 1905년 머리를 깍고 불가에 입문한다. 훗날 만해 한용운은 그렇게 불가에 입문했지만 푸닥거리로 연명하는 불가에 환멸을 느끼며 나날이 타들어가며 가슴은 숫덩이가 되었다.
그래 부처가 없는 절간에 무슨 미련이 있으리오!!
개명한 세상 일본으로 가자. 일본은 불교가 문명개화의 추동력이 되었는데, 동본원사 부산별원(東本願寺釜山別院)에서 개화승 이동인은 스승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에게 배우고 밀항하여 일본에서 조선 개화의 꽃이 되어 김옥균을 비롯한 선각자들을 키웠는데 나도 일본으로 공부하러가자 저 문명한 세상으로 가자 그것만이 나의 이 뜨거운 가슴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불가에서 개명한 세상 일본으로 가려는 청년승과 모여 한용운은 일본으로 갔다. 일본의 유수한 종단의 조동종 대표 히로쓰 세쓰조의 추천을 받고 조동종대학(지금의 고마자와대학)에 입학했다. 일본 불교학과 인도철학, 그리고 개명한 서양학문을 접하며 한용운은 문명개화의 천지개벽에 충격을 받았다. 특히 일본 근대 불교학과 불교를 통한 사회개혁론에 심취하며 한용운을 승녀 보다는 사회개혁가로 성장했다.
한용운의 일본에서의 유학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 받는 기회가 되어 12수의 한시를 조동종 기관지에 발표하며 개화 된 문명의 네트워크에 이름을 올렸다. 귀국한 한용운은 일본 불교계 학인들과 교류하며 조선 불교의 근대화 방향을 모색한다.
귀국 3년 후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 유신론”을 출판한다, 만해 한용운은 무식하며, 위선적이고, 미신잡술에 빠진 조선불교를 매섭게 공격한다,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찬 당시의 조선불교의 허상을 낱낱이 까발렸다. 집을 떠나 청정한 승려 생활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 하는 출가수행, 결혼과 재산 소유는 원칙적으로 배제하는 무소유와 청정율, 사회제도 개혁보다 마음 닦음과 깨달음 중시 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정면으로 두들겨 팼다.
불교가 본래의 철학적 깊이와 수행 전통을 잃고, “무속화된 의례 종교”로 전락하고 무당 푸닥거리와 점괘나 집는 무속적 요소를 걷어내고 불교를 합리적, 철학적, 실천적 종교로 국민 계몽운동과 사회 발전에 나서라고 했다.
일본에서 불교는 메이지 유신 시대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조선은 사찰을 첩첩산중을 쫒아내고 탄압했지만 일본은 마을공동체의 중심에 사찰이 존재했다. 사찰 부속의 테라코야(寺子屋, 사숙)는 교육의 중심지가 되어 상인, 농민, 여성,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교육을 받을 수 있어 에도시대 세계 최고의 문해율을 자랑하며 문맹을 퇴치했고 복지와 구휼의 중심에서 사회 소외층을 구제하였으며 사찰 호적을 통해 마을의 주민등록 사무소 역활을 하며 출생, 사망, 혼인 기록을 보관하며 행정력을 제공했다.
윤리 교육을 통해 마을 분쟁을 예방하고 도덕적 규범을 제공하여 마을 공동체를 이끌었다. 즉 일본의 사찰은 행정, 교육, 복지와 구휼, 도덕과 윤리규범의 제공 등 사회개혁의 중심에 불교가 있었다.
일본 유학을 통해 불교의 사회적 운동과 기여를 몸으로 체득한 한용운은 조선불교를 향해 “불교는 절 안에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라고 외친 것이다.
즉 절간에 앉아 목탁이나 두드리며 선문답이나 하며 비 맞은 땡중처럼 중얼거리지 말고 불교의 윤리와 가치를 사회속에 심어 사회개혁에 나서라는 것이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의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 도올 슨상은 전설속 고승의 선어록(禪語錄)이나 공안(公案)처럼 게거품 물고 신격화 하던데 간단히 말해서 도올의 부풀리기, 개구라 아니냔 말이다,
한용운은 외침은 일본 불교는 사회적 가치와 이념 제공으로 국가 및 사회개혁에 큰 힘이 되었는데 조선불교는 절간에 앉아 푸닥거리나 하며 뭔 개지랄 하고 자빠졌냐며 질타한 것이다,
한용운은 일본 유학생활을 통해 신진화 된 일본불교를 도입하여 승녀도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 대처승제도의 실시, 승녀의 육식 허용, 대중 포교, 근대식 불교의 개혁, 불교 대학 설립, 종단 및 제도의 개혁 등을 외친 것을 도올 슨상이 구라치면 안되는 것 아니야!!!
불가에서 전해지는 원효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가 원효가 남근을 상징하는 밤나무를 두들기며 민가를 다니며 설법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원효는 출가 후 문무왕의 동생인 요석공주와 정을 통해 아들 설총을 낳았다.
원효가 남근을 상징하는 밤꽃향기 그윽한 밤나무를 두들기며 민가를 돌아다닌 것은 불교라는 허울 뒤집어 쓰고 고상 떨지말고 고승이라고 건방떨지 말고 백성의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한용운도 출가 후 중의 신분으로 결혼하고 딸도 낳고 살았다. 그 의미를 나는 굳이 해석하지 않겠다. 내게는 실력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여하튼 불교임네, 더러운 세상 등지고 출가했네, 수행함네 건방떨지 말고 실천적 불교로 살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래서 중도 고기도 먹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일본 불교 처럼 세속화 하여 일본처럼 개혁하라는 한용운의 메세지임은 틀림이 없다.
불가의 소리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이지만 여하튼 한용운이든, 원효든 있어 보이는 척 사기치며 비맞은 중놈처럼 선문답으로 건방떨지 말라는 뜻으로 보인다.
여하튼 만해 한용운은 일본불교를 들여와 생활 속 실천불교를 만들고자 불교개혁에 나선 개혁가임은 틀림이 없다.
개혁교회 신앙인이 불교 깐다고 지랄떨지 마라. 수십년간 불가에 있다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불교를 까도 되는 까방권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 종단은 맥이 끊겨 사실상 멸종 되었고, 만해 한용운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통해 일본 불교 시스템을 그대로 들여다 조선에 흩어진 불가를 모아 조계종을 만들었고 그 조계종이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 조계종이다, 한용운도 그 조계종에서 활약한 개혁승이었다.
도성안에 발도 붙이지 못한 승녀들에게 한양 출입을 시켜주고 서울 한가운데에도 사찰을 만들수 있게 해주고 계급해방을 시켜준 일제에 당시 불교계는 두손을 들고 환영했다. 일본 유학승들이 모여 동국대하교 전신을 만들고, 활발하게 불교를 부흥시켜 오늘의 대한민국 불교가 존재하는 것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 도올의 학자적 양심이다,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을 통해 일본 불교의 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와 전국에 30본산 제도를 도입하고 사찰을 계열화 하여 본산 – 말사(본원 – 분원) 시스템이 자리 잡고 큰스님 – 분원 주지 체계가 자리 잡았다. 이것이 대한불교 조계종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다.
사찰령 이후 일본의 동방대학, 용곡대학을 모델로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중앙학림(中央學林)이 만들어지고, 일본에 유학파 승녀들이 교수진, 지도자로 활동하며 불교학(경학, 선학, 율학)과 근대 학문(철학, 문학, 역사)까지 가르친 것이 해방 후 중앙불교전문학교가 되고 그것이 동국대학교가 되어 한국 불교학의 중심이 되었다. 한용운도 중앙학림에서 불교학과 불교철학을 가르친 교수 였다.
중앙학림의 초대학장 강대련, 학감 김하산. 중앙학림에 일본 불교 교학을 도입한 백초련, 오리산 등이 모두 일본 유학파 승녀들이었다, 동국대를 만든 중앙학림은 결국 일본 유학파 네트워크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당시 근대적 불교학(佛敎學, Buddhist Studies)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는 일본의 불교학 교재가 없었다면 동국대학교도 존재할 수 없었고, 여전히 동국대 불교학과 커리큘럼은 인도학, 산스크리트·팔리어, 불교철학사 등 일본 학계가 먼저 정립한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일본의 참고문헌이나 번역서, 연구서 없이는 일본 학계 성과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방대한 불교학 연구(원전 교정, 사전, 주석서)를 축적했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 학계에서 일본 자료를 거치지 않고 연구하기 불가능한 현실이며, 선진 일본 불교를 조선에 이식한 공로를 놓고 따질 때 한용운의 업적은 결코 작지 않음을 우리 도올 슨상이 알았으면 좋겠다.
질떨어지고 무식한 싸구려 반일팔이에 한용운 같은 분을 팔지 말고 한용운이 일본불교를 도입하여 지금의 한국 불교를 만든 공로를 연구하는 것이 도올의 학문적 능력을 키우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도올이 권력 앞에 알랑 떨지 말고 품위도 갖추고 교양도 높이고, 학문적 업적도 쌓고, 팩트의 역사 앞에 진실하며, 뱀과 같은 차거운 이성으로 철학자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도올이 무슨 철학자일까?
불교 철학자일까, 씹선비 성리학 철학자일까, 미개한 짱깨 철학자일까, 아니면 서양철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도대체 도올의 철학적 정체성이 뭐야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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