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문수는 왜 좌익 운동가가 되었나 1. 소년기 김문수는 1951년 9월 27일생이다.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리에서 4남 3녀 중 여섯번째로 태어났다. 영천은 산천이 아름답고 충절과 인물의 고장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관군과 의병의 연합군이 임진왜란 최초의 공성전 승리를 기록한 곳이다. 6.25 당시에는 낙동강 전선의 최후 보루로서, 영천 전투에서 국군의 패배로 영천이 함락되고 최악의 상황을 맞았으나, 국군의 반격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곳이기도 하다. 영천은 역전의 기운을 가진 고향이었다. 김문수의 증조부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 문집을 내는 등, 김문수의 집안은 유교의 학맥을 잇는 보수적 양반 가문이었다. 증조부 때는 면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유지였지만, 할아버지 대를 거치며 김문수 집안은 몰락해 가는 양반집이 되었다. 얼마를 물려받았던 아버지는 집안일보다는 문중 일과 손님 접대를 우선시하는 양반 고집을 가진 어른이었고, 이재에는 어두웠지만 어진 인품을 가진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 마음이 어진 아버지는 친척에게 보증을 섰고, 이것이 잘못되어 김문수 일가족이 판자집 단칸방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김문수가 열 살이었을 때다. 고등학교 때는 식구들이 대구 변두리로 이사했지만, 거기에서도 문수네 집만이 유일하게 초가집이었다. 이 가난은 소년 김문수에게 열등감이 되었다. 그러나 공부는 잘해서 중학교 때는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전국 명문의 경북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김문수의 경력 중에 특이한 경력이 있다. 김문수는 1969년 고3 당시 3선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다. 당시 전국에서 반대 시위가 봇물처럼 일어나자 김문수는 '사회적 행동'에 나서는 것이 정의로운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실행한 것이었다. 고3생 김문수를 움직였던 원동력은 '정의감'이었다. 정의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 김문수는 그때부터 '열혈 소년'이었다. 김문수의 정의감은 틀림없이 한학을 공부하던 가문의 유교적 가풍에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가난했지만 정직과 인품을 겸비했던 아버지가 무언으로 김문수를 교육시킨 것이 '정의'였다. 이 정의감은 장차 김문수의 인생 고비 마다에서 김문수를 움직이게 하고 판단하는 지침계가 되었다. 대학보다 노동계에 투신하는 것도,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타협하지 않은 것도, 반평생을 고관대작으로 지냈으면서도 김문수가 가난했던 것은 '정의'라는 것을 스스로 실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청년기 김문수는 서울대 상대에 진학했다. 서울대 합격은 가문의 경사이자 고향의 자랑이었다. 더욱이 흙수저 집안이라면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대는 김문수를 고이 놔두지 않았다. 서울대는 장강의 물결처럼 김문수의 운명을 굽이쳤다. 김문수는 서울대에서 두 번의 제적을 당하고, 그가 서울대의 졸업장을 받기에는 24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김문수가 대학 1학년이었을 때 선배들이 강의실로 찾아왔다. 선배들은 서클 회원모집을 위한 유세를 했다. 이때 김문수는 선배 심재권이 주도하는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서클 훈련의 한 과정으로 연구회 선후배 몇 명이 용두동 판자집에서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다. 판자집은 낯설지 않았다. 김문수가 고향에서 유년기를 살았던 집이었고, 소년기 열등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 판자집이 부자들만 사는 줄 알았던 서울에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곳은 대한민국의 가장 '낮은 곳'이었다. 용두동 다음으로 간 곳은 경기도 광주대단지였다. 서울 곳곳에 널려있던 판자촌을 철거하고 철거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단위로 만들어진 철거민 수용소였다. 산을 불도저로 벌겋게 밀어놓고 허허벌판에 텐트들이 좌악 널려있는 포로수용소 같은 곳이었다. 텐트촌은 텐트 하나에 10가구 이상 사는 곳도 많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모습은 청년 김문수의 가슴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청년 김문수는 서울의 양면성을 목격했고,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목격했다. 청년 김문수에게 이것은 "이 사회가 어딘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양반 가문에서 물려받아 소년 김문수를 만들었던 '정의감'은 청년 김문수에 이르러 사회의 어둠을 바라보는 철학이 되었고, 정치인 김문수의 가치관과 소신을 형성하게 하였다. 그런 김문수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30살의 김문수가 예비 장인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예비 장인이 예비 사위에게 질문했다. "결혼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 "저는 만인을 위해 살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딸 어떻게 먹여 살릴 거냐고?" "만인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이 가족 간수 하나 못하겠습니까" 3. 노동자 김문수가 대학교 2학년이 되어 남들은 '농활'을 떠날 때 김문수는 농촌 대신 공장으로 가는 '공활'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대한민국의 낮은 곳을 더 들여다보겠다는 감상적인 선택이었지만, 이후 '노동계'라는 장소는 김문수를 키워주고 배양하는 김문수의 '본토'가 되었다. 판자촌과 마찬가지로 70년대의 공장은 대한민국의 가장 열악한 곳의 하나였다. 근로자가 700명이 넘는 시계조립 공장이었지만 임금은 턱없이 적고 노동 시간은 턱없이 길었다. 그리고 노동은 무료하게 반복되고 공장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 같은 곳이었다. 김문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과연 내가 이런 공장에서 평생 일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빠졌다. 그때야 비로소 김문수는 노동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자기는 도저히 못 할 것 같은 노동을 묵묵히 참고 견디며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인내와 강인함에 경외감을 느꼈다. 김문수는 노동운동가보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에 눈을 뜬 것이었다. 김문수는 시국의 변화에 따라 제적과 복학이 반복했다. 대학교에서는 정치적인 학생운동보다는 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에 더욱 열성적이었다. 대학에서 제적되면 공장에 취직하고, 공장에서는 노동법 자문과 노조 운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조 운동의 지도자 반열에 오르게 되곤 하였다. 두 번 째 제적이 되면서 김문수의 꿈은 대학보다는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자 했다. 동대문 시장의 재단 보조, 통일상가의 다리미질 시다, 실내 수영장의 보일러공, 벽제의 제지 공장 등은 노동자 김문수의 이력서에 들어갈 목록들이다. 대학과 공장을 반복 하면서 김문수는 공부보다는 자격증 취득에 더욱 힘을 쏟았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자동차 정비, 보일러 기사, 등 김문수는 2년 동안 무려 7개의 국가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던 김문수는 1976년 2월에 한일공업주식회사에 입사했다. 도루코 면도날과 지퍼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동대문시장 재단 보조하면서 월급 1만 원을 받던 김문수는 월급 5만 원을 받는 보일러 조수로 채용된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취득한 땀의 결과였다. 그러나 노동자로 살고자 했음에도, 김문수의 사주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사주와 똑같다는 말이 있다. 김문수는 노동자로 평범하게 살 팔자가 아니었다. 만인을 위해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4. 노조위원장 한일공업주식회사에는 노조가 설립되어 있었으나 노조는 개점휴업 상태였다. 77년 당시 회사에서는 환경관리 2급기사가 필요했다. 합격률이 매우 낮고 따기 어려운 자격증이었다. 회사에서 수험자에게 특별 휴가를 주며 자격증 취득을 독려했다. 한양공대 출신 기사 5명과 김문수가 시험에 도전했다. 시험이 끝나고 보니 한양공대 출신 기사 5명은 전부 탈락하고 고졸 출신 보일러공 김문수만이 시험에 합격했다. 낭중지추, 김문수는 회사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김문수가 서울대 합격생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김문수가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8년에는 노조가 재결성되었다. 회사의 스타였던 김문수에게도 노조 가입을 하라는 노조 간부들의 압박이 밀려왔다. 이왕 할 바에는 제대로 된 직책을 달라고 해서 교육선전부장을 맡았다. 노조가 결성되자 회사의 노조 와해 공작이 시작되었다. 노조 활동원들은 해고되고 일거리는 하청 업체로 돌아갔다. 노조가 다시 와해 직전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김문수가 분회장(노조위원장) 대리를 떠맡아 노조 살리기에 나섰다. 79년 노조 총회에서 분회장 선거가 열렸다. 회사에서는 분회장 대리인 김문수를 제거하기 위하여 노조 간부 대의원들에게 공작을 펼쳐 김문수 낙선 서명을 모두 받아 갔다. 김문수는 가망 없어 보였다. 그러나 김문수는 그의 고향 영천에서 역전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역전의 용사였다. 김문수는 당시로선 선례가 없던 800명의 조합원 총회를 열었다. 노조 간부들이 반발했지만, 김문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총회에서 분회장 선거를 강행했다. 700명이 투표자 중에 반대표는 단 2표였다. 한일공업주식회사의 분회장 탄생 스토리는 당시노동계에 김문수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나 시절은 하 수상한 한 때를 달리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가 발생하고 김문수는 요시찰인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80년 2월 김문수는 사복형사 2명에게 연행되었다. 학생 운동권에 만연해 있던 빨갱이 학생들을 색출하는 작업이었다. 당시 14명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는데 2명을 제외하고는 불기소 처분되어 49일만에 석방되었다. 49일간의 구속은 운동권과 노동자들에게 지도자로서 김문수의 위치를 확고히 해주었다. 회사에서도 영웅 대접을 받았고, 40개 노조가 있던 금속노조 남서울지부에서도 김문수의 위치가 강력하게 부각되었다. 전화위복, 김문수는 역전의 명수였다. 5. 가슴이 파란 우익 운동가 1980년 5월, 광주사태가 터졌다. 5.18광주사태는 노동계에도 폭풍을 몰고 왔다. 요시찰 대상 노조 간부는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그중의 극렬 분자들은 삼청교육대에 보내졌다. 김문수도 실업자가 되었고, 숨어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험악한 시절에도 김문수는 역전의 한방을 터뜨린다. 같은 노동운동의 동지였던 설난영의 집에 몸을 숨겼다가, 이전에 김문수의 청혼을 거절했던 설난영과의 사랑을 쟁취한 것이다. 김문수는 우리가 흔히 막연하게 지칭하는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학생운동이나 정치운동과는 거리가 먼 노조 간부로서 노동운동가였다. 그러나 5.18광주사태 이후로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의 구별이 어려워졌다. 이들은 5공화국의 반대자들로서 5공화국에 대항하면서 본의 아니게 한 팀으로 뭉쳐지기 때문이다. 이들을 뭉뚱그려 '운동권'으로 총칭하게 된다. 80년대의 운동권에는 대표적으로 ML계와 NL계가 있었다. ML계가 마르크스 레닌을 추종하는 '민중 민주'였다면, NL계는 김일성 노선을 추종하는 '민족해방'계였다. NL계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사파(주체사상파)다.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서 권부 깊숙히 파고 들어 나라를 절딴내는 놈들이 바로 주사파, 이놈들이었다. 다행히 김문수는 NL계도 아니었고, NL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김문수는 소년 시절에 형성된 정의감을 원천으로 인생을 살았다. 청년기에는 낮은 곳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회 개혁에 대한 고민, 그리고 봉기로 체제를 바꾸겠다는 80년대 박해의 시대를 지나서, 90년대에는 우파로서 대반전을 이루게 된다. 좌파의 모순, 좌파가 보여주는 시대의 모순에 눈을 뜬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김문수는 우파 정치인 중에서 가장 선명한 색깔을 자랑하고 있다. 애초부터 김문수는 좌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80년대에 운동권들과 한통속으로 휘말리면서 좌파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80년대 김문수를 제외한다면 오히려 김문수는 우익 진보에 가까웠다. 김문수는 많은 독서량을 자랑한다. 감옥은 독서하기 좋은 곳이다. 독서량이 많은 사람은 좌익이 되지 못한다. 김문수의 독서는 주로 역사 서적과 고전이었다. 철학에 빠진 사람은 좌익이 되고 역사에 빠진 사람은 우익이 된다. 김문수가 박정희를 위대한 영웅으로 숭상하는 것도 독서 덕분이다. 역사를 알면 박정희를 숭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은 역사에 무지하여 박정희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한다. 제주4.3사건을 공산당(남로당)의 폭동으로 규정하는 것도 국힘당 의원 중에서 김문수가 거의 유일하다. 제주4.3을 폭동으로 규정하려면 역사 지식도 있어야 하지만, 용기도 있어야 한다. 좌익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가난한 민족을 보며 혁명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했다. 김문수도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정의감을 키우고 혁명을 꿈꾸었다. 이제 김문수는 선거로서 그가 꿈꾸었던 혁명을 이루려고 한다. 한강 다리에서 난관에 부딪혔던 박정희처럼 김문수도 그의 길이 난관에 막혀있다. 그러나 박정희처럼 김문수도 역전의 드라마를 쓸 줄 아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김문수의 역전 드라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김문수의 우익 드라마를 쓰고 싶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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