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하이데거Heidegger-1976는 《존재와 시간 Zein und Zeit》을 썼는데 그는 존재와 존재자들을 구분한다. 존재자들은 우리가 알지만 존재자체Sein는 모른채 살아간다. 그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하면서 이 현존재인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 즉 존재를 의식하는 자라고 한다. 이 현존재는 세계내의 존재인데,이 말은 인간은 혼자가 아닌 세상에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하면 사는 존재란 뜻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 즉 죽음을 의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소멸이 아닌 실존이 홀로 마주해야할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선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이땅에서의 존재 안에서 끝을 준비하는 것에 집중한다는 자세이다. 죽음은 나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고 누가 대신할 수 없고 피할 수 없으며 언제 올지 모르는 최후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가능성이며 모든 가능성의 한계를 드러내므로 오히려 삶을 진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고 한다. 존재는 시간 안에서 이해된다.시간은 흐름이 아니고 존재의 구조이다. 나는 과거를 통해 이미 어떤 자가 되어 있다. 현재 나는 지금 특정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나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 죽음은 이 미래성의 가장 극단적 형태이고 동시에 자기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계기요 순간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죽음 그 이후에 대해선 침묵한다. 철학은 끝까지 존재에 대해서만 말하고 그 너머는 신학이나 신앙의 몫으로 남겨두겠다는 매너이다. 그는 1976년 5월 26일 86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마지막은 조용하고 평온한 임종이었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시간이란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무대이자 역동성이라고 한다. 이 무대의 끝에는 죽음이란 관문이 놓여 있다. 우리가 그 문을 바라볼 때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마주하게 된다. 존재는 본래 시간적이며 시간은 죽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시간성이야말로 현존재의 존재방식 그 자체이다. 이렇게 시간성과 죽음은 겹쳐져 있다. 시간성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는 구조라는 게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하이데거는 본래 루터신학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죄의식과 유한성 등을 익혔고 경건함과 오직 은혜만 바라보는 신앙을 접했었는데 신앙보다 철학적 실존개념으로 옮겨 오면서 그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은 복음과 멀어지고 성경의 하나님과 무관하게 되어갔다. 이런 결별은 《존재와 시간》을 쓰면서 분명해져갔다고들 말한다. 루터에게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통해서만 구원 받으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은 역사적 사건이자 인간실존에 대한 결정적 계시요 구원의 은혜인 것이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하나님과 관계하게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존재의 본질에 의해 항상 열려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계시나 구원을 불필요한 것이 된다. 그래서 초월적 인격자인 神이 인간에게 말을 건다 거나 계시를 한다는 등을 철저히 배격하는 태도이다.
안티다원이 주마간산격으로라도 철학자들의 저술을 스쳐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철학이나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들 속에 흐르는 무신론적이고 반성경적이며 성도들의 영혼을 황폐케 하는 위험요인을 알려 우리 신앙을 지켜내는데 보탬이 되려는 뜻에서이다. 하이데거가 복음에 뿌리 내릴 여건에 있었음에도 실존적 철학에 몰두하면서 구원의 은혜인 복음을 외면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역사를 배격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생을 마감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철학은 이성이 하는 지적 작업이다. 하지만 그 작업하는 주체인 이성이 단독으로는 실존과 형이상학 모두에서 답을 얻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성의 인식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그 이성 자체가 죄의 지배를 받으며 유한성에 고통하는 주체일 뿐이다. 우리 구원과 존재 문제에 대한 답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뿐이고 다른 길 없으니 천하에 구원 받을만한 다른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피하고서야 (행4:12), 피조물 세계에 다른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것보다 낫도다 (시119:8,9)
안티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