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
샤르트르Jean Paul Sartre-1980는 『존재와 무』를 썼는데 이 때의 무無는 단순한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부정否定을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향해 아니다! 할 수 있는 존재란 뜻이다. 즉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자유를 열어가는 자란 의미인데 예로 나는 공무원이다 했을 때 그 공무원임이 나를 가둘 수 없고 공무원임에 국한되지 않는 자유 즉 다른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는 존재란 뜻이다. 나는 더 나은 자신으로 얼마든지 현재의 나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부정 속에서 자유롭다는 얘기이다. 가난해도 부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현재의 가난한 나를 부정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건데 이러한 샤르트르의 부정, 즉 무는 인간을 영원히 자기를 부정하면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샤르트르는 신神 없는 자유를 전제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생성되는 존재이고 현재의 자신을 무화(부정)시킴으로 자유를 창출한다는 얘기인데 여러 사람을 방황하게 만드는 이론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말하는 무는 자유를 만드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단절된 피조물의 실존적 방황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무는 자유의 근거가 아니고 타락과 소외의 결과이다. 인간은 창조자와 관계를 잃었을 때 무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존재인데 샤르트르는 이를 그럴듯한 말로 미화시키고 있다. 그가 『존재와 무』에서 “무의 심연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만들어야 한다.” 고 했는데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영혼의 괴로운 독백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가 무신론을 주장하면서도 결국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영혼의 독백일지도 모른다. 그가 인간의 의식이 세계에 대해 아니다! 할 수 있는 능력,즉 자기 존재와 세계에 대해 거리 두는 힘, 즉 부정의 능력을 마치 구원의 길인양 말하지만 이건 앞서 말했듯이 그저 평생 방황하다가 끝나게 만드는 선동이다. “나는 교사다 하지만 단지 교사만은 아니다” 이렇게 자신을 넘어서고 현재 상태를 부정하며 가능성을 여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부정속에서 인간이 자유로워진다는 샤르트르의 생각은 무책임한 토크이다. 이 부정은 고통을 연속시키는 행사일 뿐이다. 누가복음 16장의 탕자처럼 되라는 얘기이다.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아직 되지 못한 나를 향해 스스로를 몰아가라는 얘긴데 피곤한 토크이다. 결국 샤르트르의 무는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도 인정하지 못하게 해서 안식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게 하는 것으로 결국 허무주의Nhilism의 변종이다. 세계는 의미도 목적도 없는 존재, 즉 즉자존재即自存在(의식이 없는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며 인간은 그 세계 내에서 의미를 창출해야만 하는 대자적 존재對自的存在 (의식이 있는 존재)라는데 피곤한 얘기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는 아무리 대자적 존재 값을 하려 해도 결국 허무와 무의미를 이겨낼 수 없다.
샤르트르의 말대로 하자면 그 대자적 존재인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부정(무화)을 반복할 뿐 결코 자기가 되고 싶은 존재에 도달 못한다. 이는 불교에서 아상我相을 없애라고 무한 재촉하는 걸 닮은 꼴 아닌가 싶다. 결국 샤르트르가 추구하는 자유(부정을 통한 무한 행진)는 뿌리 없는 자유이고 구원 없는 존재의 고독 속에 있는 그림이다. 그가 추구하는, 자유를 만드는 무(부정)는 죄의 그림자이고 하나님을 떠난 탕자의 방황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간은 별별 얘기 떠들어도 유한자이고 피조물이며 한계상황에 허덕이는 실존일 뿐이다. 샤르트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을 수용하고 구원 받은 영혼이었다면 이런 무책임하고 피곤한 이론장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존주의니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느니 하는 모두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셀프 잘난 척 하고픈 욕망의 투사일 뿐이다. 샤르트르의 존재론엔 구원의 복음이 없다. 아니! 복음을 대적하는 무신론의 잔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본향으로 한 숙명적 존재이다. 지구라는 작은 별에 내던져진 실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존재의 고통과 무의미 허무를 이겨낼 재주가 없다. 허무조장 학설에 휘둘리지들 말기를!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5,6)
안티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