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플라톤Platon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Arestoteles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킨다고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형상,Unmoved Mover, Pure Form은 모두 변화하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실재를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방향성과 존재론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통점에서는 감각적 세계 너머의 실재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둘 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감각세계를 궁극적 실재로 보지 않고 그 너머에 더 참되고 본질적인 것이 있다고 보는 점이다. 또 운동과 변화의 원인제공 문제인데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형상이야말로 이 세계의 변화와 운동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본다. 이렇게 둘 다 불완전한 세계를 넘어서 완전하고 영원한 실재를 상정하는데 플라톤의 이데아는 완전한 본질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형상은 완전한 현실태(엔텔레케이아)이다. 이 현실태, 즉 엔텔레케이아entelecheia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가능성으로서의 질료가 형상과 결합하면서 현실성을 획득한 상태를 말한다. 즉 가능태로서의 어떤 물질이 형상을 얻으면서 쓸모있고 유의미한 존재로 된 것인데 이는 플라톤이 이데아와 현실의 물질계를 구별한 것과 달리 형상과 질료의 통일을 추구한 시도였다.
차이점으로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감각세계의 바깥인 초월적 차원이고 감각세계는 이데아의 모사(모형-복제관계)이며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이며 변화는 진리,즉 이데아에서 멀어지는 것이 된다. 플라톤에게서 참된 실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불변의 실재여서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본질인 것이다. 반면 우리가 보고 만지는 감각세계는 항상 변하고 움직이고 사라지며 생겨나곤 한다. 이것은 이데아에서 멀어지는 상태이다. 이데아는 본질이고 완전하고 참된 데 비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는 운동과 변화가 일어나는 세계여서 이는 이데아의 불완전한 복제품 또는 흐릿한 그림자이다. 그러니까 운동과 변화의 세계가 이데아의 본질을 닮으려고 하지만 닮았을 뿐 본질은 아니며 자꾸만 변하다보면 점점 본질인 이데아와 멀어지면서 흐릿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데아는 변치않는 참된 실재이고 최고 원리도 모든 이데아의 원천인 선의 이데아The Idea of Good가 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의 순수형상은 세계 안에서 내재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초월적인 최고 원인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형상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를 의문하게 된다. 왜냐면 아리스도텔레스가 순수형상을 세계 내에 내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원인자로 말하기 때문이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재를 강조하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그는 형상이 개별 사물 안에 내재한다고 보고 그 내재하는 형식을 모든 존재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다고 본다. 책상을 생각할 때 책상임인 그 디자인은 형상인데 나무는 질료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본다. 모든 개별자들은 이 형상과 질료의 결합인데 예로 윤석열이라면 윤석열임, 윤석열다움은 윤석열의 형상이고 그의 물질적 몸 같은 구성체들은 질료가 되는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운동이란 가능태가 현실태로 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 운동에는 목적이 있고 모든 운동은 목적 지향적이다. 그에게서 최고의 원리는 부동의 원동자不動의原動자Un moved Mover인데 이는 순수 사유이고 최고의 현실태이며 순수형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순수형상을 질료는 없고 오직 형상만Pure Form존재하는 존재로서 질료가 없으므로(질료가 있으면 변해야함 ) 변화나 운동이 필요 없는 존재로서 철학적 神에 해당한다. 이 순수형상은 자신을 끊임없이 사고하며 완전한 자로 존재하면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만물을 운동시키는 제일 원인인 완전한 현실태가 된다.
플라톤은 우리가 동굴 안에 갇혀 그림자만 보고 있다면서 동굴 밖의 진짜 세계인 이데아Idea가 진정한 실재라고 하는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데아(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형상)가 세상 안에 있으며 사물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형상을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존재라고 본다. 여기서 형상이란 말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한자로 형상刑象이라고 하면 의식 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상(이미지image)을 말하고 형상形相이라고 하면 그리스어로 eidos이고 영어로는 Form인데 이데아 또는 에이도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形相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형상은 활동적이며 질료는 수동적이다. 형상을 취하여 질료는 현실적인 것이 된다. 예로 대리석이 그냥 질료일 뿐인데 꼴(형상)을 얻어 인간 모양의 상이라든지 하나의 개물個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통일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고 이 때 질료는 가능可能態dynamis인 것이고 형상은 現實態energeia인데 이 때 형상은 질료가 실현하려는 목적이 된다. 이리하여 세계는 가능태인 질료가 목적인 형상을 실현하여 현실태를 얻어가는 발전이라고 생각 되었다. 이 때 발전의 최고 단계 또는 그 목적 자체인 형상은 형상 중의 형상이며 그 이름이 순수형상이고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神인 것이다.
신학적인 조명을 좀 해 보자면 이분들이 모두 궁극적 실재를 찾거나 존재의 본질을 구하기 위해 사유思惟한 것은 중요한 일이기에 이들의 탐구결과를 참고는 하지만 어디 까지나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탐색한 결과물들이기 때문에 지식으로 머무를 뿐 우리의 존재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한계를 갖는다. 인간의 이성은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은 추론推論일 수밖에 없다. 세계를 창조한 주체인 제일원인자의 계시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져 이런저런 지식에 회유당하다가 좌절할 뿐이게 된다. 신학神學이나 신앙信仰하는 행위는 이성을 계시에 복종시켜 창조의 주체가 되신 분을 만나 구원받는 일이다. 그분의 화육化肉Incarnation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 얻게 된다. 기독교인의 고백일 뿐이라고 할지 모르나 존재세계의 본질을 해명하고 우리 영혼이 구원 받고 영생 얻는 길은 기독교의 복음 밖에 없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구원과 참된 형이상학을 얻을 길이 없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구현한 학문의 결과물들은 보편적 지식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참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거쳐야할 관문인 건 맞다. 하지만 이들의 지식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거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혼이 구원 얻어 영생하는 복음과 진리는 없다. 고대인들이 세계를 이해해보려는 각고의 노력이고 그 산물일 뿐이다. 이데아나 순수형상,즉 부동의 원동자 모두 많은 시사점을 주기에 학습하고 참고하지만 계시와는 다른 인간 이성이 추론한 지식으로 머물게 된다. 세상의 지식에 구원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경은 세상 지식을 철학으로 통칭 하면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 아니니라 하셨다(골3:8)
바울이 철학을 말할 당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지배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계시의 수여자로서 이들 철학의 한계와 심지어 해독과 위험성마져 지적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