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박정희를 기다리며.. 1964년 12월 초 어느 날,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뤼프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탄광 지대인 루르 지방의 뒤스부르크에 도착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독일의 탄광과 종합병원에 파견되어 이국땅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한국 광산 근로자와 간호사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행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애국가 1절이 끝나기도 전에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들은 “.... 이윽고 연단에 올라온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이 못살고 가난해서...”라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장내는 온통 통곡의 눈물바다로 변했다”라고 그때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힘이 없는 설움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받았던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소련의 민간인 여객기에 대한 미사일 공격에도 항변다운 항변 제대로 못 했던 것도 모두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 아니었던가? 국가 비전 제시는 다름이 아니다. 박정희의 고독한 눈물의 뒤안길에서의 절치부심은 곧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고삐를 당기는 자극제가 되었고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초석을 깔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서독에서 박정희가 흘렸던 눈물은 힘없는 나라의 설움과 이국만리 탄광촌에 자식을 놓고 오는 비통하고 애끓은 국민 가장의 마음이었다.
그 성격은 다르지만, 통곡의 눈물바다는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반도 서해에서 재현되었다. 서해 북방한계선 대청도와 눈물의 연평도,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 등 북한군에 의해 도발된 이른바 제2연평해전(서해교전)은 서곡에 불과했다.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초계정 천안함이 적의 도발로 해군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는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서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이제 서해는 통곡의 눈물바다로 전락하여 버렸다.
통곡의 눈물바다, 그랬다. 문제는 그 눈물이 '못살고 가난해서'가 아니라 이번에는 원통했기 때문이다. 훈련소에 갓 들어온 신병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전술 원칙이 있다. ‘먼저 보고 먼저 쏘라’ 는 것이다. 먼저 보고 먼저 쏘지 않으면 먼저 죽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술의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2002년 6월 29일, 김대중 정권 해군만은 예외였다. 당시 우리 군의 교전규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먼저 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챈 북한군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먼저 쏘아댔다. 먼저 쏘는 적의 포탄에 다리가 잘려나가고 팔이 떨어져나간 후에야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아들, 해군 병사들을 누가 죽였는가?
각설하고, 광산촌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눈물을 쏟자 70세의 뤼프케 서독 대통령은 “울지말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시라”며 손수건을 꺼내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정희는 실행하고 선진조국의 초석을 깔았다. 그런데 희생으로 지킨 영해를 노무현은 “NLL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하질 않나, 문재인은 2019년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사건 처럼 북한 인권 문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어쩌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비겁한 나라가 되었단 말인가?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박정희는 패배주의에 젖은 대한민국의 방향을 틀었다. 박정희처럼 당당하게 혁명 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이다.
오늘은 제10회 서해 수호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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