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토론방 |
|
|
세계관의 선택(21) - Communist revolution 시대의 개막 |
작성자: 정문 |
조회: 2355 등록일: 2025-03-23 |
|
|
|
공산주의 이념과 이론은 인간 이성과 상상력에 기반하여 이것 저것 가져다 섞어 놓은 집 돼지여물통 같은 이론이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논리, 검증 할 수 없는 거대담론, 상상력으로 만든 가상이론에 불과하다. 따라서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치명적 문제점을 감추기 위해 공산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을 가져다 붙인다.
막스는 같은 시대 활동했던 다윈에게 자신의 저서 ”자본론“을 헌정하며 편지를 썼다. 그러나 다윈은 이를 거절했다. "귀하의 저서는 내 연구에 자연과학적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우리는 유사한 방향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이론의 조잡함을 감추기 위하여 다윈의 진화론을 가져다 사회진화의 과정에 있 공산주의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마크크스는 진화론을 훔쳐다 해명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레닌은 허술한 공산주의 이론을 보강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진화론을 가져다 썼다. 세계에서 가장 큰 진화론사 박물관이 모스크바에 있는 이유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의 과도기이며, 결국 소멸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발전하는 것은 생물의 진화처럼 필연적이다“ 사회진화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생물진화의 과정처럼 모순을 극복하고 진화 한다는 궤변이다. 따라서 가고자 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사회진화의 마지막 단계이며 모순을 극복한 천국은 건설 될 것이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진화 과정은 참혹하다. 과거 봉건국가 보다 지독한 독재정치가 펼쳐졌고, 대중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진화론을 가져다 붙인 궤변은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김일성의 ”주체사상“까지 정당화 시켜주는 위력을 발휘했다. 진화론은 공산주의 모순점을 감추는 선전물로 완벽했다. 소련 시절 길거리에 슬로건이 나부꼈다. "우리는 과학을 믿는다. 진화론은 과학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도 과학적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출판 할 때 이미 유럽에는 수많은 공산주의 이론가와 활동가가 넘쳤다. 마르크스의 최대 라이벌은 페르디난트 라살레였다. 국제 인터네셔널을 통해 경쟁관계가 형성되자 마르크스는 서둘러 미완성 된 자본론의 1편을 출판하고 죽었다. 그시대 쟁쟁한 공산 활동가가 넘쳤다. 아나키즘 공산주의 미하일 바쿠닌, 노동자의 철학자로 불린 요제프 디츠겐 등 마르크스를 압도하는 이론가는 넘쳐났다. 국제 인터네셔널울 통해 국제 노동자연대가 결성 되고, 정치세력화 하며 영향력을 넓혔다. 공산주의를 표방한 정당이 정치활동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처절하게 무너진다. 그들은 노동자 단결을 목 놓아 외쳤다. ”잃을 것은 쇠사슬 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국과 가족을 위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다.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시작으로 제1차 인터네셔널- 파리꼬뮨 – 제2인터내셔널-러시아혁명에 이르기까지 25년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 구축한 영향력은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노동자들은 "계급적 적(자본가)"이 아니라 "국가의 적"과 싸웠다. 선진국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바이러스는 가난한 농업국가 러시아로 전파 되었다. 1차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전한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동부전투에서 패배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1차대전에서 1,000만명에 이르는 전자자와 부상자가 발생하며 러시아 경제가 피폐(疲弊)해졌고 전비조달로 막대한 채권을 발행하면서 재정파탄과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국가 기능이 무너졌다. 니콜라이2세가 퇴위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되면서 임시정부인 케렌스키 정부가 수립되었다. 변호사 출신인 케렌스키는 러시아에 공화정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어지러운 국내 상황을 수습하고 각종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 변호사 출신이었던 케렌스키는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의 내부 의견을 무시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1917년 6월공세를 감행하면서 12만명의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여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나게 된다.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게 되면서 군내부에서 반란이 확산되고 그틈을 노려 레닌은 "이 전쟁은 자본가와 귀족을 위한 전쟁이다"라며 선동에 나섰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 퇴역 군인이 주축이 된 소비에트를 이끌고 2017년 볼세비키의 10월 혁명을 일으켜 인류 최초로 공산혁명을 성공시켰다. 레닌은 소수당에 불과한 볼세비키를 이끌고 농민, 퇴역군인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 된 소비에트를 장악하여 세를 불리고 여세를 몰아 볼세비키 혁명을 성공 시킨 것이다.
레닌의 삶은 배고프고 고단픈 삶의 연속이었다. 1887년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로가 차르였던 알렉산드르3세의 암살 미수사건으로 처형된 후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 봉건 러시아 개혁을 꿈꾸며 카잔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주도 하다 체포 되어 퇴학을 당했다. 이때부터 막시즘에 심취한 레닌은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노동계급 해방 투쟁연합”의 조직원이 된 레닌은 1895년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유배생활 시작하였고, 탈출하여 망명한 후 유럽을 떠돌며 고달픈 삶을 살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으로 잠시 귀국하였지만 또 다시 핀란드로 망명 하게 된 후 10년을 넘게 유럽을 떠돌아야 했다. 20여년간 유배와 망명생활을 통해 공산혁명가를 꿈꾸었다. 레닌은 망명생활을 통하여 막시즘이 실패한 원인을 찾으며 유럽에 펼쳐진 본격적인 신본주의 해체시대를 몸소 체득하게 된다. 유물론적 세계관을 중심에 둔 막시즘에 가장 큰 걸림돌은 신본주의와 기독교적 세계관이었다. 레닌 또한 막시즘이 실패한 원인을 기독교적 세계관에 두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으로 여겼지만 레닌은 한층 더 나아가 종교를 계급해방을 방해하는 노동자의 착취 도구로 보았다. "모든 현대 종교와 교회 조직은 부르주아 계급을 보호하고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도구일 뿐이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을 마르크스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공산혁명의 당위성을 강화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과 인간 사회의 발전을 연구하는 과학의 모든 진보적 성과를 포괄한다. 다윈주의는 생명의 기원과 생물학적 발전을 설명하면서 유물론을 더욱 공고히 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 된 곳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막시즘의 실패를 연구했고 막시즘의 실패 원인을 대중주의에 두었다. 어리석고 우매한 대중을 통한 혁명을 버리고 훈련된 엘리트 혁명가에 의한 전위당 혁명을 제시했다. 레닌은 자신의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공산혁명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버리고. 소수의 훈련된 혁명가 집단에 의한 초엘리트의 혁명론인 전위당론(Vanguard Party Theory)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 대중은 자발적으로는 혁명에 이를 수 없으며, 이들을 계몽하고 조직하여 혁명을 이끌 소수의 정예 혁명가 집단이 필요하다.” 레닌의 전위당은 고도로 훈련된 혁명가 계급이 주축이 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조직되어 그들은 대중을 이끌고 혁명조직을 조직하고, 선전·선동하며, 전략을 수립하고, 실질적으로 혁명을 주도할 전위당을 극단적 엘리트로 채웠다. "스스로 조직하지 않는 계급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혁명적 정당과 혁명적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전위당은 계몽자, 선동가, 조직가, 지도자, 이념수호자가 되었고, 엘리트, 중앙집권, 민주집중제, 조직중심성, 절대충성의 구조로 만들었다. 레닌의 전위당은 공산당으로 이름이 바뀌며 공산당은 니체의 우상 초인을 현실화 시켰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니체의 초월적 의지(의지의 철학)를 가진 초인이 현실 정치에서 구현된 형태가 바로 공산당 전위당(공산당)이다. 니체와 레닌은 공히 의지를 가진 소수 엘리트(훈련받은 혁명가)가 세계를 재창조한다는 극단적 엘리트주의에 함몰 된 초인(공산당)의 노예였다. 그리고 그들은 초인(공산당)이 되는 길을 독점하고 새로운 귀족사회를 만들었다. 레닌은 대중을 싫어했다. 대중은 계몽·조직·지도되어야 할 존재에 불과할 뿐이며 공산혁명에서 대중은 도구화 되어 동원 되었을 뿐이다. 혁명 후에는 전위당을 통해 개조되어야 할 무지하고 어리석은 무리였다. 니체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대중을 ”떼지어 다니는 자들“이라며 경멸했다. 즉 대중을 하나의 무리(Herd)로 보고 대중을 초월한 초인을 통한 교화의 대상 또는 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레닌은 폭력을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주도 되는 혁명의 주요한 도구로 삼았다. 레닌은 국가는 본질적으로 폭력 기구이며, 부르조아의 완전한 제거를 위한 폭력은 정당화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주의의 규정하는 정체성이 되었다. “지배 계급(부르조아)은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가 폭력을 사용하여 국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억압계급에 대항하는 피억압계급의 전쟁은 합법적이고 진보적이며 필연적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생겨난 노동자, 퇴역군인, 농민이 중심이 된 연합회인 소비에트는 정치적 결사체가 아닌 대중조직이었다, 전국조직으로 성장한 소비에트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인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SR)이 존재하고 있었다. 독일은 전쟁 중인 러시아의 교란을 위해 밀봉열차(Sealed Train)에 레닌을 태워 러시아로 귀국하게 도왔다. 레닌은 소비에트 내의 급진세력을 모아 소수 정치집단에 불과한 볼세비키당을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전위당으로 탈바꿈시켜 소비에트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2017년 4월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다. 레닌은 볼세비키를 통해 대중 선동에 나섰다. "임시정부를 전복하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제국주의 전쟁을 중단하라!"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사회주의 체제 수립!" ”은행과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는 농민에게!“ "세계 혁명" 열광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끌고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공격했다. 한번의 실패를 딛고 마침내 10월 혁명을 통해 인류최초의 공산혁명 볼세비키 혁명을 성공시켰다. 혁명 후 레닌은 프로파간다를 통해 소수의 혁명가 집단이었던 볼세비키가 무자비한 숙청에 나서게 했다. 대중은 토지분배로 현혹했고 군사지도자 트로츠키, 조직관리자 스탈린, 경제담당 부하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으로 구성 된 전위당내의 친위대를 통해 다수당인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을 해체했다. 지도자인 율리우스 마카로프 등 지도부 인사 대부분이 체포 당하거나 암살 되었고 살기 위해 많은 많은 인사가 해외로 망명했다. 심지어 1917년 11월에 치루어진 선거를 통해 사회혁명당이 다수당이 되었음에도 선거결과를 파기하고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적색 테러(Red Terror)를 통한 암살, 비밀경찰(체카)를 통한 무자비한 살해는 러시아를 공포로 몰아 넣었다. 레닌은 혁명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며 마침내 레닌의 1인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소수의 훈련된 혁명가에 의해 대중을 선동하는 또는 제압하는 방법으로 레닌은 철저한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이용했다. 선전 선동, 세뇌, 사상 주입, 체제 광고 등으로 번역 되는 프로파간다를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것은 레닌이다. 요제프 괴벨스(나치 독일의 선전장관)는 소련 공산당의 선전방식을 깊이 연구했고, 거기서 많은 전략적 요소를 가져와 히틀러의 절대 독재를 완성시켰다. 괴벨스는 말했다. "우리는 볼셰비즘에게 선전의 기술을 배웠다.“
당대의 연설가로 빠지지 않고 뽑히는 인물이 레닌과 히틀러이다. 레닌은 혁명적 구호를 현실적 언어로 대중을 파고 드는데 탁월했다. 히틀러는 넘치는 카리스마로 군중의 감정을 자극하여 대중을 움직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들의 대중 연설이 탁월했던 이유는 시대를 대표하는 프로파간다였기 때문이다. 레닌의 프로파간다는 시대를 뛰어 넘어 심리적 조작, 대중 조종 , 선전 미디어의 중요한 전술이 되었고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선전 전략"은 모든 선전 선동 도구에 주효했다. 신문, 잡지, 라디오, TV, 포스터와 이미지, 영화와 연극, 대중연설, 집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등 시대를 아우르는 프로파간다는 여전히 좌익들의 주요한 투쟁수단이다. 그들은 단순화, 반복, 감정자극, 공동의 적 만들기, 지도자 신격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대중을 우매하게 만들고 엘리트의 세상을 만든다. 결국 인간 이기심은 혁명의 목적을 잡아먹고 오로지 권력을 위한 권력만 남게 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어질 뿐이다. 레닌은 막시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통찰했고, 대중을 파악했다. 대중을 장악할 수단으로 프로파간다를 선택했고 인류 최초로 공산혁명을 성공시켰다. 레닌은 프로파간다에 가장 탁월한 신문을 혁명동지로 삼았다. “신문은 단순히 집단 선전가, 선동가일 뿐만 아니라 집단 조직가다.” 공산주의 탄생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마르크스가 아닌 레닌이다. 막시즘을 현실화 시킨 레닌은 공산혁명의 모든 전략 전술을 실체화, 구체화 하여 실현했다. 볼세비키 공산 혁명 이후 모든 공산주의 혁명, 권력구조와 국가시스템, 독재구조는 레닌의 볼세비혁명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레닌의 소수 전위당 중심의 엘리트주의 혁명 이론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는 모든 공산혁명의 실천적 장치가 되었다. 전위당론은 공산당의 존립기반이 되었으며 레닌의 이론적, 사상적 토대는 공산주의 혁명의 근간이 되었다. 레닌의 조직이론에 따라 모든 공산조직의 근본이 되었으며 전위당, 민주집중제, 혁명 전략으로 대표 되는 공산국가의 정체성을 남겼다. 마오쩌뚱, 호치민, 김일성, 카스트로, 체게바라, 안토니오 그람시 등 모든 좌익들의 공산혁명의 이론적, 사상적 스승이 레닌이다.
레닌 혁명론의 핵심은 어리석고 무지한 대중을 끌고가는 엘리트이다. 대중은 스스로 혁명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전제하에 공산혁명은 소수만이 이끌 수 있으며, 다수는 따라야 한다는 폭력과 독재의 정당성, 중앙집권제를 통한 권력의 집중화, 전위당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하여야 하는 민주집중제는 렌닌으로부터 시작 되었고 여전히 모든 공산주의 국가를 설명할 수 있는 교과서적인 이론이다. 레닌의 공산혁명 모델은 모든 공산주의 혁명의 원형이 되었다. 한사람의 의지가 모든 사람에게 유토피아를 열어 줄 수 있다는 교만 즉, 공산주의 교만, 초인의 교만은 인간이 어떻게 최고의 지옥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충분하게 보여 주었다. 니체의 초인처럼 레닌에게 깊은 영향을 준 또 한명의 인문학자가 있었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는 19세기 러시아에서 태어나 이상적인 혁명가의 상을 남겼다. 라흐메토프"(완벽한 혁명적 인간)을 규정 된 체르니셰프스키의 우상은 대중을 이끄는 또 다른 한명의 초인일 뿐이다. ”역사는 지식인 엘리트가 이끈다“ 과학혁명을 통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중심에 있었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제임스 와트, 아담스미스는 굳건한 신앙심에 섰던 사람들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사제였으며, 뉴턴은 과학 논문보다 신학 논문이 많았고, 인문학서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본론을 쓴 아담 스미스는 옥스퍼드 신학대에서 성직자 후보생이 되어 공부했고 독실한 장로교도이며 칼빈의 후예이다. 시장 작동의 메커니즘을 지속하게 하는 즉, 시장질서의 윤리적 기초를 제공하는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은 시장의 ”도덕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 도덕적 감정론은 인간이 가진 한 없는 이기심을 인간의 내면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로서 시장을 바라보게 하는 규율을 말한다. 그 규율이 신학과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실을 간과하고 시장질서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理性)을 신격화(神格化)한 계몽주의자 또는 인문학자들은 과학혁명과 자본주의를 낳은 저들의 신본주의 세계관은 외면했고 그들이 남긴 결과물만 보았다. 그들은 인간이 스스로 천국을 건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신본주의 해체의 시대 19세기를 지배했다. 공산주의는 그렇게 그들의 천국건설이라는 교만에 의해 탄생 된 것이다. 국가의 흥망사는 어느곳을 보더라도 외부적 침입에 의한 복속과 독립을 반복하며 정체성을 만드는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즉, 전쟁에 의한 뺏앗고 뺏는 권력이동의 형태를 가진다. 한반도 역시 이주한 이주세력에 의해 국가가 생겨나고, 경쟁 속에 전쟁을 통해 복속하고 국가가 흥망하는 구조는 비슷하다. 고구려와 백제랑 치열한 전쟁 끝에 상대국을 멸망시키고 통일신라가 탄생하고, 통일신라를 멸망시키려는 견훤과 왕건의 전쟁은 50여년간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전쟁 속에 한반도에 고려가 유일한 국가로 자리 잡았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50년간 전쟁을 벌린 역사가 국가의 흥망사이다. 그런데 조선의 건국은 한반도의 국가 흥망사에서 예외적인 내부 쿠테타로 일어난 일반적이지 않은 건국이었다. 또한 봉건주의를 대체할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이 동원 된 이념전쟁이기도 했다. 조선의 건국이전 한반도는 다양한 가치가 상존했다. 주류는 아니었지만 신라시대 때 처용가의 신화를 통해 이슬람교가 들어와 있었고 이슬람인 석상이 있기도하며, 유물을 통해 기독교의 분파의 하나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Nestorian Christianity)의 십자가가 발견 되고 있다. 고려시대 이슬람식 기도와 예배가 기록으로 전해지고 상당한 이슬람인이 고려를 드나들었다. 불교와 유교 등이 주류 사상으로 한반도를 지배했지만 이념적으로 다양한 기회가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은 모든 이념은 삭제 되고 오로지 성리학만 국가 이념이 되는 이념독재의 시대가 펼쳐진다. 부처가 있는 곳을 청소한다는 청비령(淸庇令)을 내려 1500여개에 이르렀던 고려의 사찰은 200여개만 남고 모두 강제철거 되었다. 모든 백성은 성리학의 교조아래 복종해야 했고 지독한 신분제 질서에 복종해야 했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은 잡은 이성계는 사대부의 도움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사대부의 권력욕에 꼭두각시가 된 이성계는 유교 탈레반 정도전의 모든 설계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고작 3~4%에 불과한 사대부는 모든 권력과 기득권을 장악하고 토지와 경제력을 장악했다. 토지는 왕의 것 즉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토지의 수조권(收租權, 조세를 거둘 권리)만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은 세금을 내고 토지를 국가로부터 빌려서 경작할 수 있는 경작권만 주었다. 조선은 건국 후 성리학 탈레반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점차 강화시키며 중앙집권화 시켰고, 지독한 국가주의적으로 개편되어 사대부의 나라를 완성한다. 사대부는 조선을 건국하며 프로파간다를 통해 백성을 현혹했다. 백성의 수에 맞춰 토지를 공평하게 나눠주겠다며 계민수전(計民授田)을 외쳤다. 그러나 과전법을 실시하여 관료에게는 수조권을 백성에게는 경작권만 주었다. 인간이 이를 수 없는 허상의 성리학적 높은 도덕과 화려한 구호, 정치적 감언이설로 프로파간다는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인간 평등의 이념이 있는 불교는 사교(邪敎)화 되었고, 출신성분을 따져 개돼지로 살아야 하는 신분의 굴레는 독재와 탄압이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성리학적 질서는 일반 백성은 통치의 주체가 아니라 교화의 대상이었고 지식있는 사대부만이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만용이 하늘을 찔렀다. 즉, 깨끗한 선비가 백성을 교화함으로서 대동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교만이 조선을 지배했다. 공산주의를 낳은 교만의 계몽주의 원조는 조선이라고 자랑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건국은 봉건제에서 성리학적 관료국가로의 이념혁명이었고, 백성 절반이 노비가 되어야 하는 신분제 굴레의 통치제도가 확립되는 체제혁명이었다. 두 번다시 반복 되어서는 아니 될 지옥은 그렇게 건설 되었다. 성리학이라는 지옥, 공산주의라는 또다른 지옥이 합쳐진 것이 북한이다. 그래서 북한은 공산주의에서도 가장 악질적이며 지독한 국가시스템이 된 것이다. 볼세비키 혁명과 조선의 건국은 너무나 닮아 있다. 인간 의지에 의한 천국건설, 쿠테타에의한 혁명의 확대, 계민수전, 토지개혁, 대동세상, 소수에 의한 엘리트 혁명, 신분제 세상, 교화의 대상 국민, 절대복종의 민주집중제, 4%의 공산당원과 사대부만 권력을 가져야 하는 시스템 등 볼세비키 혁명은 600년 앞세 조선에서 먼저 일어난 것이다. 결국 권력을 위한 권력의 독재만 있어야 하는 조선과 소련이었다. 이 모든 비극은 인간의 선한마음이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공부를 하고 머리가 좋아진들 한뻠에 불과한 스마트을 통해 볼 수 있는 지식의 만분지 일도 못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좀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선비가 그토록 물고 빨았던 성리학의 미개함, 좌익이 그토록 모시는 인본주의 공산당 선언이 한덩어리 똥만도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