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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양반집 자식들 (펌) |
작성자: 나그네 |
조회: 1832 등록일: 2025-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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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동(五鶴洞)은 300년을 내려온 이씨촌(李氏村)이었다. 그 마을에서는 과거에 장원을 한 많은 선비가 배출됐다. 다른 마을에서는 오학동을 양반마을이라고 불렀다. 오학동 역시 프라이드가 강했다. 그 근방에서는 오학동 양반집과 결혼하는 것을 큰 명예로 여기고 있었다. 오학동의 아래에는 '정방'이라는 마음이 있었다. 정방은 오학동이 생기고 100년쯤 후에 생긴 마을이었다. 그곳은 오학동 양반집에서 풀려나 양민이 된 노비 오(吳) 씨들만 모여 사는 촌이었다. 오씨 마을도 차차 번성해서 200백 년 뒤에는 100여 호의 큰 마을을 이루게 됐다. 같은 산줄기를 따라 형성된 마을이지만 오학동 사람들은 정방 사람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학동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정방 사람들이 종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정방 사람들 역시 오학동 사람을 앞에서는 기가 죽었다. 같은 산기슭을 따라 이어진 마을이었지만 두 마을 사람들 사이에 결혼은 있을 수 없었다. 골짜기에 일군 논과 밭의 4분의 3은 이(李)씨들의 소유였다. 그리고 나머지 4분의 1 그나마 북향 쪽의 험한 밭은 정방 사람들이 갈아먹었다. 처음에 골짜기를 개척할 때는 네 것 내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제시대가 되고 법령이 산골까지 전해지자 논과 밭을 나누어 각자 토지조사부에 등록을 하게 됐다. 새로운 문물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 조선에 흘러들어왔다. 도시에서는 상투가 없어졌다. 서당 대신 보통학교들이 섰다. '곤니치와 '사요나라‘ 같은 일본말들이 시골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파른 산 틈에 있는 오학동은 세상과는 차단되어 있었다. 오학동 양반들은 자식들에게 역시 한학을 가르치고 옛날의 예의와 도덕을 가르쳤다. 그래도 예의와 도덕이 인생의 전부라고 그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는 과거(科學)가 없어져서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 게 그들 양반마을 사람들의 전부였다. 오학동 양반들도 시집온 며느리들한테서 신학문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수학이 있다는 것도, 정교한 과학이 아이들에게 교육된다는 걸 전해 들었다. 그러나 신학문에서 윤리와 도덕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신학문을 경멸했다. 같은 골짜기 안에 있는 정방마을은 오학동과는 달랐다. 시집을 갔던 정방마을의 딸들이 외손자를 데리고 나들이를 왔다. 외손자는 학생이었다. 무식한 외할아버지가 계산을 못 하는 걸 보고 외손자는 곱셈과 나눗셈으로 당장 답을 알려주었다. 종의 자손으로 학문이라는 걸 모르고 200백 년을 농사만 지어온 정방마을에 그건 충격이었다. 일제가 새로 만든 보통학교에서는 종의 자식이라고 괄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종의 자식인지 아닌지는 근본을 캐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안에 사립학교를 하나 세웠다. 그리고 신학문을 했다는 사위 두 사람을 불러들여 선생으로 삼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읍내 중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오학동에서 12킬로미터 밖의 평원을 기차가 달리게 됐다. 바람이 운반한 기차의 울음소리는 이따금씩 그 마을들이 있는 골짜기까지 들리곤 했다. 골짜기 위의 산등성이로 올라가면 멀리 수수밭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기차의 검은 연기도 볼 수 있었다. 오학동 양반집의 시집간 딸들도 신학문의 성과라는 그 기차를 타고 친정마을로 오곤 했다. 오학동의 할머니들도 기차를 타고 읍내로 나가 봤다. 신작로라는 게 나 있었다. 예전의 길은 풀이 나 있어서 걷는 맛이 푸근했는데 신작로는 돌덩이같이 딱딱하고 반반해서 피로했다. 오학동 사람들은 문명을 거부했다. 편리함과 빠름은 있지만 윤리와 도덕이 없는 과학을 학문으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기하더라', '교묘하더라' 에서 그들의 인식은 끊겨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들이 기술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기술은 기술이지 결코 학문이 될 수 없었다. 그건 장인이나 공인바치들이나 할 일이었다. 아랫마을인 정방은 달랐다. 200년 동안 종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던 그들 앞에 처음으로 학문의 길이 열렸다. 신학문을 하면 종의 자식이라도 관리로 출세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출세의 길이 열리는 바람에 그들의 향학열(向學熱)은 불타올랐다. 그렇지만 수백 년 동안 봉건사상에 젖어 있는 그들이었다. 오학동 사람들을 만나면 허리를 굽히고 길을 비켜주었다. 감히 맞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도 이제부터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눈빛이 비치고 있었다. 오학동 노인들의 점잖은 걸음걸이를 본뜨는 정방의 늙은이들도 몇 있었다. 어느 봄날 마을 대청소의 날이었다. 일본 헌병대는 마을마다 일정한 날을 정해 청소를 시키고 그 상태를 점검했다. 오학동의 촌장 격인 노인은 긴 담뱃대를 물고 머슴들에게 청소를 시키고 있었다. 거미줄도 다 치우고 뜰의 돌 부스러기도 모두 치웠다. 방 안의 이부자리며 옷들도 모두 내어놓고 방 안도 먼지 하나 없이 쓸어내었다. 노인은 몸소 돌아다니며 부족한 곳이 없나 살폈다. 일본 관리가 와서 봐도 흠잡을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집안을 다 돌아본 노인은 사랑으로 들어와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헌병들이 검사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긴 봄날이 저물어 갈 무렵이 되어서야 헌병 하나와 그 보조원이 칼 소리를 철럭거리면서 대문을 힘 있게 열고 들어왔다. 벼슬에는 머리를 들지 못하는 습관을 가진 노인은 물고 있던 담뱃대를 황급히 놓고 뜰로 뛰어 내려갔다. 헌병과 보조원은 노인을 본체만체 집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일본인 헌병이 웃으면서 보조원에게 말하면 보조원도 일본어로 뭐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때 노인은 보조원이 정방마을에서 술집을 하는 최가의 아들인 걸 발견했다. 반갑고 안심이 됐다. "아, 자넨가?" 그 순간 노인은 눈과 뺨에서 불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으며 거꾸러졌다. 동시에 허리로 배로 사정없이 구둣발이 날아왔다. "이 자식이 벼슬을 한 관리를 보고 무엄하게 뭐라고 했어?" 헌병보조원이 된 정방마을 최가의 아들은 계속 발길질이었다. "나리, 살려 줍쇼." 노인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볐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학동 마을 친척들이 모두 헌병보조원에게 사정 사정을 하며 매달렸다. 다음날 오학동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헌병보조원은 무서웠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정방마음의 최가는 무섭지 않았다. 종 출신인 최가는 아직도 오학동 사람들을 보면 허리를 굽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의 자식이 오학동에서 가장 존경받는 노인을 폭행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오학동은 하인들을 시켜서 그 최가를 불러왔다. 오학동의 노인들이 앉아 있는 사랑채 뜰에 최가는 황공히 읍을 하고 서 있었다. "이놈, 네 죄를 모르겠느냐?" 오학동의 노인 하나가 소리쳤다. "소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요?" 최가가 당황한 얼굴이었다. "저놈을 살이 터지도록 때리거라." 노인들이 하인에게 명령했다. 오학동 노인들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형벌이 실행되었다. 이미 양반은 개인적인 체형을 가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들은 상놈이 하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한 짓이 어떤 보복을 받는지 알리고 싶었다. 낮부터 시작한 매는 어둡기까지 계속됐다. 최가는 거의 반죽음이 되어 들것에 실려 갔다. 이제는 법률의 시대였다. 폭행에 관여한 오학동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이 모두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들은 법원으로 넘어가 상해죄의 공동정범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뿐 아니었다. 정방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오학동 사람들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골짜기의 위아래 마을에서는 낡은 세력을 꺾으려는 새로운 세력이 헌병보조원이라는 형식으로 들어왔다. 오학동 사람과 정방마을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있으면 이상하게 책임은 오학동 사람에게 돌아가곤 했다. 200여 년을 두고 수모에 또 수모를 받고 내려오던 정방의 종의 자식들은 새로운 학문을 흡수하고, 그 학문으로 자기네의 자식을 헌병보조원으로 만든 덕에 그 수모를 면하게 됐다. 새로운 학문의 힘은 무서웠다. 정방마을의 공부하러 간 자식들은 군청 서기, 면서기, 군청 서무주임으로 출세해서 돌아왔다. 군청 서무주임이 오학동 마을을 시찰하러 온다는 통지가 있던 날이었다. 벼슬과 권력에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오학동 노인들은 마을의 가장 깨끗한 집을 택하여 온갖 음식을 준비하고 서무주임 영감을 기다렸다. 오학동을 찾아온 서무주임 영감을 노인들은 당장 알아보았다. 정방 마을에서도 가장 천대받던 집 아들이었다. 오학동 노인들에게 그건 충격이었다. 그들은 조선조가 망하면서 벼슬이란 없어진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벼슬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기네가 아직껏 사람으로 보지도 않던 정방마을의 종의 자식들이었다. 그 종의 자식들이 어떻게 벼슬을 했을까? 그것은 신학문을 하기 때문이었다. 오학동 사람들의 인생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벼슬을 단념하고 자식들에게 농사나 가르친 것은 결코 벼슬에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벼슬은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학문이 높아도 조선 사람에게는 벼슬의 길이 없는 줄만 알았다. 한낱 기술에 지나지 못하는 줄 알고 무시했던 신학문에 벼슬길이 있다는 게 그들에게는 의외였다. 오학동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욕망이 일어났다. 종 출신인 정방마을보다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공부만 하면 정방마을보다 훨씬 윗자리를 차지할 것 같았다. 오학동에서도 아들들을 군청 소재지에 있는 학교로 보내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군청 주사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거기다 일본 유학을 보내면 군수 자리도 넉넉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학동 사람들은 종의 자식들에게 수모를 받는 게 치가 떨리도록 가슴 아팠다. 오학동의 부모들은 학비를 아끼지 않고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시간이 가면서 군청이나 면사무소의 관리를 하고 있는 종의 자식들은 오학동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종의 자식들이지만 정방마을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벌었다. 자식 학비를 대자니 팔기 싫어도 오학동의 땅들이 하나하나 그들에게 팔려나갔다. 어느새 정방에 살던 종의 자식들이 골짜기의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지주(地主)로 바뀌어 있었다. 남은 오학동 사람들도 수리비, 측량비, 세금 부담으로 가난해지다가 정방마을 지주의 소작인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다. 오학동 사람들은 일본으로 유학 간 자식들이 출세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오학동을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전에는 종이라고 무시하던 정방마을로 소작 짐을 지고 가는 오학동 노인들의 얼굴에는 하늘을 원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그들에게는 무의미했다. 오학동의 젊은이들은 정방의 늙은이들에게 '주인님', '나으리', '영감'이라는 존칭을 썼다. 오학동 노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멀리 일본까지 유학을 보냈던 아들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10여 년간 오학동 어버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논밭을 팔아 학비를 보내줄 때의 기대와 자식들이 배워가지고 온 현실은 너무나 커다란 차이가 났다. 자식들이 배운 학문은 공산주의였고 그들은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김동인(金東仁)이 쓰다 만 소설 원고는 여기까지였다. 미완(未完)의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나는 그가 식민지 사회를 리얼하게 표현한 그림을 본 것 같았다. <친일마녀사냥 2권> 엄상익 p786-792 글 제목을 ‘남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양반집 자식들’이라고 붙인 이유는 조선시대 말엽부터 해방 전까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 북부 조선은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없는 평민사회였고 서울 경기, 충청, 영남, 호남 등의 남부 조선은 조선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있던 상대적으로 전근대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북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는 별개로 남부 조선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은 양반집안, 부유층의 자제들이 많았다. 해방 후의 이른바 빨갱이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출신계층의 자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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