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 저런 신문을 읽다 보면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기실 모든 일들은 단 하나의 이유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각도 못 하는 여러 요소가 맞물려 일어나는 것이다. 다만 그 시기에는 알아채지 못하고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늘 시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렌즈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세상 모든 일이 단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무수히 많은 일과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세상의 무수히 많은 공간과 시간을 마주할 때마다 그 톱니바퀴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더 견고해지면서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가진 각자의 톱니바퀴는 이렇게 돌고 돌다가 기적처럼 맞물리기도 하고 다시 떨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사실 인생의 톱니바퀴들이 붙었다 떨어졌다 해도 그 끝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또 다른 시작이 되는 계기가 되곤 한다. 그 때문에 우리들의 시간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으로 남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만약 톱니바퀴는 삐거덕거리고 있다고 생각할 논쟁거리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대개 '다름'과‘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차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보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그 연장선에서 어쩌면 후진 정치의 전형인 '적이 아니면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길든 탓일지도 모른다.
가끔 논리를 위한 논리, 즉 이기기 위해 상대를 부정하는 말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온 정성을 쏟는 사람들을 본다. 사실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타협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에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수긍하려 들지 않는 모습이 미학으로 보일 때도 있다. 양보하면 오히려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논리다.
아무리 논리적일지라도 주장은 주관적이다. 그러고 보면 반드시 정치판이 아니라도 사람들에게는 누군가를 따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존재한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추종자에 관한 주장이 강하다 보면 이따금 역설의 역설, 즉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정녕 우리 정치에서 타협은 사치에 불과한 정치 수사학(rhetoric)일까?
역설이란 어떤 주의나 주장에 반대되는 이론이나 말이지만,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라는 경우다. 물론 주관적인 추론(推論)이기 때문에 글쓴이의 생각과 다를 가능성은 있다. 다르다면 큰 결례가 될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