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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선택(19) - republicanism과 네덜란드 독립 |
작성자: 정문 |
조회: 2039 등록일: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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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교회의 목회자로 활동하였던 존 녹스는 본국인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칼뱅이 지도하던 제네바에 1556년부터 1559년까지 약 3년 동안 머물렀으며, 칼뱅과 긴밀히 협력하며 많은 신학적 영향을 받게 된다. 존낙스는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어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는 장로교(長老敎, Presbyterian Church)를 출발시켰다.
칼뱅은 로마서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단 한권의 성경을 가져야 한다면 로마서를 선택하겠다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로마서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로마서는 세상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있음을 이르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로마서 13장 1절)” . 신앙인은 세상권력에 따를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권력을 부여 받은 권력자는 하나님의 공의(公義) 따른 행사 할 것을 이르고 있다. 중세 봉건시대 왕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왕권신수설로 정당화 하고 있었다. 중세 봉건 왕들은 병자를 불러다 안수하며 자신의 권력이 신으로부터 왔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왕권신수설을 정면으로 반발하는 칼뱅의 개혁신앙에 대한 극심한 탄압은 어쩌면 당연했다. 존 칼뱅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행사 되는 권력, 즉 성경을 역행하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적고 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지만, 폭정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 신자들은 이에 저항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All authority is established by God, but when a ruler deviates from God's law, the faithful have a right and duty to resist.)" 이러한 저항권은 존 녹스를 도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조지 뷰캐넌에 의하여 체계화 되며 국민저항권이 생겨났다. 조지 뷰캐넌의 국민저항권(Right of Resistance)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이념적 기반인 칼빈주의를 계승하고 있다. 칼뱅의 법의 통치(Rule of Law) 즉, 누구든지 법앞에 평등한 통치를 국민저항권에 덧대었다. 첫째 왕권은 국민의 동의에서 유래한다. 둘째 왕은 법에 종속된다. 셋째 불의한 왕에 대한 저항은 정당하다. 성공적인 종교개혁을 일군 스코틀랜드는 칼뱅주의를 대표하며 개혁신앙의 중심지가 되며 영국의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성공 후 20년이 지나고 있을 때 네덜란드 독립을 위한 연합주 7개가 모여 위트레흐트 동맹(Union of Utrecht, 1579)을 결성하고 네덜란드를 식민지배국 국왕인 스페인 펠리페2세를 상대로 충성포기 선언(Plakkaat van Verlatinghe)을 했다. "군주는 하느님에 의해 임명되어 신민들을 아버지가 자식을 돌보듯 보호하며, 목자가 양 떼를 보살피듯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군주가 이를 행하지 않고, 오히려 신민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오래된 자유를 파괴하며, 그들을 노예처럼 대우한다면, 그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라 폭군이다. 따라서 그를 퇴위시키는 것은 정의롭고 합리적인 일이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은 조지 뷰캐넌의 주권재민과 국민저항권이 네덜란드의 펠리페2세에 대한 충성포기서약으로 계승되고 있다. 칼뱅주의 신앙운동은 제네바에서 이웃하는 네덜란드로 확산 되었다. 당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고 있는 네덜란드는 엄격한 카톨릭 정책으로 개혁교회는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종교개혁을 억압하기 위해 이단재판소를 만들어 무자비하게 개혁교회 운동을 탄압했고, 과도한 세금을 징수했다. 스페인의 탄압을 피해 개혁교회 신앙인들은 헛간에 모여 예배를 올렸다. 비밀리에 모여든 그들이 예배를 올린 곳을 “헛간 교회(Barn Churches)”라고 지칭하며 종교탄압을 상징했다.
벨기에서 태어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는 칼뱅의 개혁교회 신앙을 받아 들여 유럽 전역을 돌아 다니며 칼뱅주의 신앙을 전파했다. 벨기에로 돌아 온 귀도 드 브레는 목회활동을 이어가다 스페인의 카톨릭 통치에 박해를 받아 도망다니며 숨어지냈다. 1561년, 귀도 드 브레는 스페인의 개혁신앙에 대한 극심한 탄압에 저항하며 벨직 신앙고백을 선포한다. "우리는 한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은 단순한 영이시며, 영원하시고 불가시적인 분이시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완전히 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모든 선의 풍성하심 자체이십니다.“ "성경은 신앙과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충분히 가르치며, 사람의 어떠한 가르침이나 전통이 이를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의 신앙고백은 네덜란드 전역으로 퍼졌다. 네덜란드 전역은 신앙의 자유를 외치는 개혁교회 신앙인들에 의해 중세 가톨릭의 성상 파괴 운동(아이코노클라즘,Iconoclasm)운동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펠리페 2세는 귀도 드브레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귀도 드 브레의 순교 후 개혁 신앙인들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에 파견 하여 피의 의회(Council of Troubles)를 설치하여 무작위적인 탄압에 나섰다. 피의 의회는 네덜란드 대표적인 귀족 지도자 이며 칼뱅주의자인 몬트 백작(Count of Egmont)과 호른 백작(Count of Horn)을 체포하여 처형 하였고, 12,000명을 체포하여 1,000명 이상을 공개 처형 했다. 마침내 시작 된 독립전쟁 중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에서 가장 번영한 무역 중심지인 네덜란드에 가혹한 세금 수탈과 경제활동을 봉쇄하거나 제한했다. 이에 맞서고자 개혁신앙인들이 몰려 있는 네덜란드 북부가 중심이 되어 네덜란드 7개 주가 모여 위트레흐트 동맹(Union of Utrecht)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벌렸다. 7개 연합주 중 홀란트(Holland)는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중심지로서 네덜란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같은 주요 도시가 포함 된 지역으로서 네덜란드의 국부로 불리는 칼뱅주의 개혁교인인 윌리엄 오렌지공이 독립전쟁을 지휘했다. 그리고 선언했다. "우리는 폭정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신성한 의무다." 독립전쟁에서 바다의 거지들(고이센, Geuzen)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군은 해상에서 육상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정치적, 군사적 무장단체였다. 한 때 세계 바닷길을 장악했던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스페인을 상대로 남해 해전 (Battle of Zuiderzee)을 승리로 이끌며 해상 주도권을 확보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치열하게 싸웠다. 고이센의 힘은 신앙에서 나왔다. "우리는 가톨릭의 교황보다 이슬람의 술탄 치하에서 사는 것을 택하겠다."
고이센(Geuzen)은 프랑스어 "gueux(거지들)"에서 유래한 말로서 스페인의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던 상인들이 탄원서를 올리자 스페인 관리는 그들을 거지 라고 조롱했다. 그들은 그 조롱을 저항의 상징으로 삼아 거친 옷을 입고 바다로 나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바다로 나온 그들을 스페인은 ”물거지떼“라고 조롱했다. 스페인의 종교적 탄압으로 네덜란드를 떠나 독일, 잉글랜드,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피난민 교회를 세운 네덜란드인 종교난민들은 피난민 교회를 통해 네덜란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칼뱅이 조직한 유럽의 피난민 교회의 의사 결정기구인 시노드(Synod)를 통해 네트워크화를 구축하여 유럽의 모든 피난민 교회가 네덜란드 독립을 도왔다. 시노드(Synod)로 네트워크화 된 유럽의 피난민 교회들은 자금과 물자, 정보 전달을 통해 네덜란드 독립운동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많은 개혁교회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후방에 투입 되어 지원활동을 하였다. 전선에 참여하지 못한 피난민 교회는 여론전을 통하여 네덜란드의 독립 지지를 이끌어 내며 서신과 문서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스페인의 억압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조성하였다. 엠덴 시노드(Synod of Emden)는 칼뱅주의 교회 최초의 네덜란드 개혁신앙 네트워크로 조직 되었고, 피난민 교회와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이센과 개혁교회는 네덜란드 독립운동에서 긴밀히 연결된 동맹 관계였으며 개혁신앙의 이념과 교리를 바탕으로 고이센의 군사적·정치적 활동을 도우며 종교적 자유를 위해 싸웠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고이센과 피난민 교회는 신앙의 동맹으로서 네덜란드 독립을 이끌어 냈다. 특히 고이센은 시간이 갈수록 개혁교회 신앙인으로 채워져 사실상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개혁교회와 중세 카톨릭의 전쟁이었다.
베스트 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고 80년간 이어진 독립전쟁에서 마침내 네덜란드는 칼빈주의 건국이념에 기반한 최초의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 군주제를 폐지하고 국가 수반을 두지 않은 공화제로 독립한 네덜란드의 통치기구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한 7개주는 그대로 지방 자치주가 되어 자치권을 행사하고 7개주가 모여 연합회의 (States General)를 구성하여 외교, 군사, 재정 등 국가적 사안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중앙 통치 기구로 기능했다. 인류 최초로 군주제가 아닌 국민의 의사결정으로 나라가 통치 되는 공화국의 탄생이었다. 민주주의 탄생과 정치사에 가장 큰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네덜란드 독립 당시 고작 인구 160만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였음에도 공화제를 통한 국가 건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경제적으로 번영한 나라로 기록되는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열어 간다. 제노바의 칼뱅주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 나“라는 개인주의 신앙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나 사이는 개입할 수 없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세워진 네덜란드는 개인에 따른 인간존중은 보편적 규범이 되어 네덜란드 사회에 자리매김하였고 개인의 사고와 행동 양식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광범위하게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모든 사회규범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서 개인의 책임과 자유에 바탕한 스스로의 삶이 존중 받는 현대 자유 민주주의 출발이다. 국부 이승만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유언이 된 그 소망 자유의 나라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 칼뱅주의에 기반한 네덜란드 법의 통치는 정당하고 공정한 경제활동을 보장했고 상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되었다. 칼뱅은 상행위에 있어 잠언 11장 1절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는 말씀에 기반한 상인의 정직과 신뢰를 중시했다. "부정직한 상거래는 단순히 이웃을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창조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모독이다. 정직한 저울과 공평한 추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
1596년 여름, 네덜란드인 선장 빌렘 바렌츠는 무역상에게 위탁 받은 화물을 싣고 교역로를 찾기 위해 북극해에 진입했다. 그러나 뱃길을 잃고 선장과 17명의 선원은 동토에 올라 배의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짓고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며 겨울을 보냈다. 식량이 떨어져 북극곰과 여우를 사냥해 허기를 달랬다. 괴혈병에 시달리며 쇠약해진바렌츠 선장과 몇몇의 선원은 숨을 거뒀다. 50일 뒤 러시아 상선에 구조될 때 생존자는 12명이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감동했다. 위탁받은 화물에는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는 옷과 약품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화물에 손을 대지 않고 고스란히 네덜란드로 운반해 고객에게 넘겨 주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선장과 선원들이 죽어 가는데도 고객들의 화물은 건드리지 않았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고객의 화물을 더 귀중히 여긴다는 것을 증명했다. 목숨 걸고 신용을 지킨 네덜란드 상인은 바다의 마부가 되어 세계 무역을 장악했다. 신용과 정직의 상징인 네덜란드 상인들은 세계를 무역으로 네트워크화 시켰다. 막대한 부가 네덜란드로 들어오며 황금시대를 열었지만 그들은 금욕적인 생활과 성실함, 근검하며 검소한 생활을 놓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세계사적으로 두가지의 의미를 남겼다. 첫 번째는 네덜란드의 경제적 부흥과 황금시대는 서양의 경제력이 동양의 경제력을 압도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고, 두 번째는 네덜란드의 공화국 모델이 미국과 영국에 많은 영향을 주면서 현대적 자유 민주주의를 출발 시킨 것이다. 독립전쟁 후 유럽의 가장 부유한 스페인은 네덜란드 상선의 입항을 막으면서 네덜란드는 살아 남기 위하여 세계로 나가 항로를 개척하며 무역에 뛰어 들었다. 우리나라가 먹고 살길이 없어 60년대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은 세계로 나가 장사를 시작하며 오늘날 세계6대 무역대국이 되었듯이 인구 150만명의 약소국 네덜란드는 세계의 항로를 개척했다. 여전히 네덜란드는 우리보다 앞선 세계 5대 무역 대국이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세계 곳곳에 거점을 세워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모든 문호를 막고 중국에만 의존한 조선은 중화라는 틀에 갇혀 역사적 퇴행을 면치 못할 때 네덜란드 상인은 일본에 데지마 항구를 열고 교역을 시작했다. 일본은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최신 학문과 기술, 정보를 받아들여 난학(蘭学, らんがく, Rangaku)으로 발전하여 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등 다양한 분야가 발전했고 일본 근대화를 위한 소중한 경험과 지식으로 쌓여 마침내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호를 타고 표류한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을 비롯한 상인 64명을 포로로 간주하여 억류하고 노동에 동원 되는 등 학대를 하였고 하멜의 동료 대부분의 영양실조와 질병에 죽어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하멜일행은 조선에서 지독한 학대를 받으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본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하멸표류기“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고 굶주림에 동료가 똥을 주워 먹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떤 동료들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더 이상 식량을 구할 수 없을 때 인분을 주워 먹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마저 잃는 모습을 보였다." 탈출한 하멜과 8명의 일행은 일본 나카사키에 도착하여 본국으로 송환 되었다. 하멜은 조선의 엄격한 신분 제도와 권위주의를 비판했고 권위주의에 신음하는 백성은 참을성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가렴주구의 혹독한 세금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조선 백성들은 수확물의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다. 관료들은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때로는 이를 사적으로 착복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금 부담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빈곤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 "가난 때문에 세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잔혹한 매질을 당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정강이뼈가 부러질 때까지 몽둥이로 맞았다. 많은 사람이 이 형벌로 인해 생명을 잃었으며, 살아남더라도 걷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과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나뿐 나라 일본 때문인지 조선의 끔찍한 봉건사회를 혁파하지 못한 민족성 탓인지 제대로 판단 할 수 있을 때가 왔으면 좋겠다. 1602년 네덜란드에서 세계 최초로 주식회사(Joint-Stock Company)인 동인도회사(VOA,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설립된다. 불과 인구 150만명에 불과한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최초로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문을 열은 증권거래소에서는 동인도 회사의 주식이 활발하게 거래가 되었고 신분에 상관 없이 국적에 상관 없이 투자가 가능한 투자자라면 누구나 상관 없이 주식을 사고팔 수 있게 개방적으로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는 운영 되었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주식뿐만 아니라 채권 등 다양한 국제 금융 상품이 거래되면서 국제적인 금융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독립전쟁 때 미국의 독립군은 부족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 채권을 발행 하여 판매 함으로서 가난한 식민국은 전비를 마련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해상무역은 태풍과 선박의 난파, 해적과 같은 수 많은 위험, 불확실과 맞서야 하는 어쩌면 도박과 같다. 따라서 수많은 투자자의 십시일반 모아 발행된 주식을 사고파는 투자방식은 불확실성과 위험을 분산하여 다수의 투자자가 자본에 투자함으로서 이익과 위험을 분산하는 구조이다. 특히 해상무역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위험과 불확실성을 분산시킬 수 있어 많은 이윤을 가져다 주었다. 네덜란드가 독립할 당시 인구 160만 정도에 불과했지만 네덜란드 상선 20,000여척이 세계 바다를 지배했으며 유럽의 전체상선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인과 아이, 여자를 제외한 남자는 모두 무역을 위해 바다 위에 떠 있거나 또는 무역과 관련된 일을 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동원한 군함이 대략 1,000여척 정도였고 이순신 장군 함대의 전성기 군함은 100여척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상선 20,000여척의 규모가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네덜란드가 그 많은 상선 보유국으로서 무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상선건조 자본을 암스테르담 증권시장을 통해 조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세계의 무역을 장악한 것은 세계 곳곳의 무역기지가 네트워크화 되면서 정보를 장악했으며, 바다와 세계의 네트워크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상선 건조 기술의 혁신이 있어 가능했다. 네덜란드는 기존의 상선을 월등하게 뛰어 넘는 혁신적인 플뤼트선(Fluyt)을 개발한다. 플뤼트선(Fluyt)은 선체가 좁고 길게 만들어져 화물 적재량을 늘렸으며 같은 무게의 화물을 싣고서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운항이 가능했다. 인력 또한 기존의 상선보다 같은 화물을 싣고 최대 5분의 1의 인력만으로 운항이 가능했다. 300톤의 화물을 옮기는데 기존의 상선은 50여명이 필요했지만 플루이트선은 10명에서 15명이면 충분했다. 따라서 화물비를 파격적으로 줄었고 게다가 2배 이상의 빠른 속도로 바다를 지배 하며 플뤼트선은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기술혁신의 상징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중국과 인도가 자리 잡고 있는 동양은 어느시대나 서양의 경제력을 압도했다. 중국 명나라는 당시 세계 최대의 경제권이었고, 인도는 직물 생산과 무역을 장악했다.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서양은 자신들보다 잘사는 동양을 부러워 했고, 심한 경우는 마르코폴로의 ”동양견문록“과 같은 거짓된 기록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상업 자본주의와 해상 무역으로 황금시대를 개척함으로서 서양의 경제력이 동양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세계 역사에서 서양이 패권을 장악하는 출발점이었다. 당시 네덜란드 일인당 소득은 중국을 몇배 압도 하였으며, 동양이 주도했던 세계 경제의 무게 중심은 완전하게 서양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칼뱅주의 상징이다. 즉 세상은 창조, 구속, 섭리, 심판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으며 전적타락으로 하나님과 단절 된 인간은 오직 절대자 은혜의 구속사적 구원을 향한 개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위해 살아야 함이 칼뱅주의이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나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로마서 11장36절)" 네덜란드 건국은 하나님의 뜻이며, 칼뱅주의 사상 위에 세워졌고 이러한 신앙 체계는 네덜란드 사회의 전반적인 가치관과 제도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네덜란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개인의 구원이라는 차원을 넘어, 하나의 보편적 사회적 규범으로서 네덜란드 사회에 자리 잡아 개인의 사고와 행동 양식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광범위하게 규정했다.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견인한 가치는 성경속 청지기 정신과 직업소명, 금욕적 자본축척을 하나님 절대주권을 위한 삶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그 무슨 일이든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는 직업소명(Vocation) 정신은 갑판의 나무를 뜯어 불을 피워 추위를 견디며 굶주려 죽어 가면서도 끝내 고객의 화물은 손을 대지 않았던 빌렘 바렌츠의 직업정신을 낳았다. 세계무역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가 생겼음에도 증권시장을 통한 재투자로 사회적 부를 늘리고, 일자리를 만들었다. 금욕적인 삶을 통해 쾌락을 멀리하며 성실하고, 근검하며 절제했다. 사치와 화려함을 피하고 단순하고 절제된 생활 방식을 위해 검은옷만 입어 검은옷은 네덜란드 상인을 상징했다.
칼뱅주의가 건국이념이 된 최초의 국가 네덜란드 독립과 황금시대(Dutch Golden Age)는 너무도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국가 시스템으로 인류 최초로 공화제가 채택 되었고, 체계화 된 시민사회가 시작되었으며, 상업자본주의를 만들어 번영하였고, 기술혁신으로 지구를 네트워크로 경제공동체로 묶었으며, 서양이 동양을 누르고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였다. 공화국으로 독립한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오렌지공 1세의 증손자인 윌리엄 오렌지3세는 영국의 왕으로 스카우트 되어 명예혁명을 일으켜 의회 민주주의가 출발하는 권리장전을 선포함으로서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정착시켰다. 네덜란드 공화제 국가시스템은 미국 건국의 롤모델이 되었으며, 네덜란드 레이덴에 위치한 분리주의자 청교도들이 모여 세운 피난민 교회(Leiden English Reformed Church) 신앙인 102명이 미국의 필그림스파더스가 되어 지금의 미국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Plymouth) 항구에 도착하며 장차 도래할 거대한 변혁의 추를 미국으로 옯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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