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이상스Jouissance
성폭행에 저항하다가 혀를 깨물어 60년간 가해자로 있었던 여인의 얘기와 프랑스에서 아내에게 엽기적 행위를 한 남편이 20년 징역형 받은 기사를 보면서 에로스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한다. 인간은 즐거움,즉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프랑스 철학에서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단어가 쾌락이나 즐거움을 뜻하는데 단순한 기쁨이나 즐거움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정신분석학 같은 데서 중요하게 다뤄지며 자크라캉Jacques Lacan이 이를 중요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주이상스는 일상적 쾌락pleasure을 넘어서는 강열한 경험까지를 포함한다. 특이한 것은 우리가 느끼는 쾌락과 달리 고통과도 연관 짓는다. 아울러 사회적 규범,법, 도덕 등이 억제하거나 금지하는 욕망을 초과하는 행위와도 연관시킨다. 이런 금지된 것을 넘어설 때 오는 즐거움과 동시에 불편함과 고통을 수반하는 심리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주이상스가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 경험과도 연관되지만 여기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여러 측면을 포괄하면서 인간욕망의 본질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라캉은 인간의 언어가 욕망의 구조로 돼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주이상스 역시 언어적 상징체계와 얼켜져 있으면서 욕망을 드러낸다고 본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욕망을 표현한다. 하지만 언어로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주이상스는 항상 결핍을 동반한다고 본다. 과거 한신대의 장일조 교수는 《욕망과 충족의 변증법적 체계》라는 저서를 냈었는데 인간의 삶은 욕망과 그 욕망의 충족을 위해 변증법적 활동을 하는 거란 내용이었다. 인간삶을 욕망으로 단순화시킨 점은 있지만 중요한 통찰이었다. 이 주이상스는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억압과 규율의 한계를 마주하는 데서 오는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말한다. 금기를 깨는 즐거움과 그 금기 파괴에서 오는 처벌의 두려움이 공존하는 심리이다. 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같은 철학자는 주이상스를 정치적 맥락에서 논의하는데 집단적 저항에서 오는 쾌락과 처벌의 양극적 심리를 다루는 것으로도 알려진다.
여기에서 자크라캉과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라는 철학자 간의 주이상스에 대한 견해들의 차이를 (알려진대로) 좀 스쳐본다면, 라캉의 주이상스 개념은 인간존재의 복잡한 욕망과 결핍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개념이고 바타이유는 주이상스를 더 직접적이고 에로틱한 경험으로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주이상스 개념은 쾌락과 고통이 결합된 경험,즉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중요시 한다. 에로티시즘과 죽음의 욕망,자기파괴적인 자살의 충동 등이 주이상스를 형성한다고 본다. 그러니까 바타이유는 인간의 성적 충동과 사회적 금기가 주이상스의 중요한 동기라고 보면서 이러한 욕망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한계를 초과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긴다. 즉 바타이유는 주이상스를 에로티시즘,고통,금기를 넘어서 자기파괴적 본능까지를 포함하는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라캉은 주이상스를 심리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다루면서 욕망과 언어의 관계를 중심했다면 바타이유는 주이상스를 에로틱한,육체적이고 금기적인 경험으로 다루며 그것이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충동과 자기파괴와 연결된 것으로 본다.
Kant는 제3비판서인 《판단력 비판》에서 美를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조화에서 오는 즐거움으로 설명한다. 대상을 순수하게 바라볼 때 느끼는 무조건적이고 자유로운 기쁨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는데 칸트는 워낙 경건한 사람이어서 이성의 지배하에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성적쾌락은 순수이성의 명령과 무관한 감각적 욕망이어서 통제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칸트는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은 성적 쾌락본능이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질 것을 경고하면서 인간이 쾌락본능에 지배당하는 것을 경계한다. 칸트는 계몽시대의 정점인 이성의 사람이었기에 당연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은 욕망의 도구적 성격이 강하고 욕망을 구현하는 동기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성의 한계를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의 윤리를 형식주의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삶에서 아름다움 , 쾌락, 즐거움의 추구는 삶의 중요한 동력임에 틀림 없다. 문명과 문화의 콘텐츠가 이것의 추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 더하여 초월의 본능,즉 종교적 욕망을 도외시할 수 없다. 인간 자신이나 자연에게서 느끼는 美나 쾌락은 그 자체로서 영속성이 있을 수 없다. 그냥 스쳐가는 감각작용의 산물일 뿐이다. 허무를 수반하는 순간의 즐거움일 뿐이다. 이렇게 육체적 쾌락본능, 특히 에로틱리비도가 한편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케 하는, 문명과 문화의 동력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파괴적 힘으로 작용해 고통을 수반한다. 야곱의 외동딸 디나는 저녁시간 잠간동안의 외출이 큰 비극을 불러 일으켜 수많은 생명이 살상당했다.(창34) 다윗왕의 큰아들 암논은 이복여동생 다말을 성폭행 한 값으로 죽임을 당했고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그 일로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 일으켜 큰 재앙을 만들어 낸다.(삼하) 이렇게 에로스는 생명과 쾌락을 만들어 내는 동력이면서 비극의 원인자로서의 작용 또한 서슴치 않는다. 주이상스, 에로스 ,리비도 이 모두는 인간삶의 동력이면서 또한 고통을 유발하는 에네르기아인 셈이다. 인간은 이 모순적 실존을 삶으로 구현해야 하는 고달픈 순례자일까!
안티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