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촌노 김성복이가 죽고 나도 나의 기록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특히 석양에 지는 해는 그야말로 아침에 뜨는 해 보다가 더 아름답게 보여 진다. 사진 작가들을 보면, 아침에 뜨는 해를 촬영하기 위해서 엄청난 공력을 들인다. 안동 촌 노 역시 열세 살 어린 나이부터 카메라를 잡았고, 나의 셋째 형님은 사진을 우리나라의 영업 사진가로는 첫 번째 손꼽히는 분이다. 지금 생존해 계시면 88 세의 연세이시고, 나의 셋째 형님 되시는 분이시다. 그 형님도 초등학교만 마치고서, 사진관에서 사진 기술을 배우신 분이시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사진을 직접 맡아서 현상과 인화를 하신 분이시고, 내외 국빈들이 오시는 자리에서는 형님이 직접 기념 촬영을 하신 분이시고,
스무 살에 서울 경기 파주 미군 부대 앞에서 직접 직원들을 여러 명 데리고, 에스 콰이어란 큰 사진관을 운영하셨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칼라사진을 보급하신 분이시다. 1960 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칼라 사진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고 해서, 오일 칼라란 그림물감으로 흑백 사진에다가 채색을 해서 공급하던 기술도 우리나라에서는 셋째 형님이 가장 먼저 보급을 했고, 액자를 찍어내는 재본 기의 문양을 직접 설계 제본 하여 우리나라 전역에 보급 하셨던 분도 셋째 형님이 처음이시다. 그런 사진 예술이 뛰어난 형님의 영향을 받아서, 나 역시 형님의 기술 덕분에 어린 나이에 사진 기술을 배웠고, 그 당시 흑백 사진의
현상과 수정까지 형님 한태 배웠던 것은 사실이다. 카메라를 내 손으로 잡고 필름을 직접 현상까지 하고 수정과 인화를 할 정도로 능숙했지만, 나는 형님의 길을 가지 않고 부모님을 모시면서 온 세상을 주유하면서, 온갖 잡일로 다져진 사람이다. 사진은 그냥 취미 삼아 즐길 정도였고. 좋은 피사체가 보이면 그것을 나의 사진기에 담아내는 것을 주로 하다가 보니 그것도 어 언 67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나의 손으로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 수십 만 장이 모였고, 이제는 국가 기록원과 경북 문화 기록관에도 등재될 정도의 국가 유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사진도 중요하지만, 동영상은 아마 방송 기자들도 나만큼 촬영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사라져 가는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을 동영상으로 담아둔 것이 3,500시간의 분량이 될 것이다. 내가 촬영한 동영상은 일반 동영상 작가들이 촬영하지도 못하는 기이한 자료들이다. 인간 문화재나, 명인 명 창들과 기인 협객들을 직접 현장까지 찾아가서 예를 들어서, 몇 천만원 짜리 조상 굿이나 신 내림 굿이나 신 당굿이나 중요한 산 신 용신 굿을 촬영 할 적에는 무속인들이 주로 나를 초청해서 자기들의 굿을 직접 동영상에 담기 위해서 초청을 받아서 현장에 가면, 처음 제물을 구입할 적부터 시작하여, 그분들과 같이 상 차리고 부정을 칠 적부터 12 마당 전체를 카메라 두 대로 밧 데리를 교환하여
심지어는 소변도 보지 않고, 24 시간을 논 스톱으로 전체 굿 마당의 영상을 단 한 컷트도 빠지지 않고, 무속인들의 사설 내용까지 저들의 일상생활까지 심지어는 굿 장단의 소란한 소리도 이어폰을 끼워 가면서 모든 것을 촬영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유 무형 문화제나 행사장에서 촬영한 영상들이 쉽게 말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촬영한 것이 3,500 시간의 분량이다. 내가 촬영한 귀중한 자료들은 방송국은 물론이고, 방송국 피디나. 민속 학을 전공하는 학자들과 연출자들과 카메라맨들이 연기자들에게 자기들이 촬영하고 편집하기 좋은 영상을 요구하면서, 그것도 방영이 될 적에는 전체 작품에 있어서
10 분의 1 도 방송에서는 방영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들은 전혀 조작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오리지널 영상이란 것이다. 무 편집에 사실적인 기록 영화로 보면 맞을 것이다. 그런 기록들이 이제는 나의 서재에서 모든 자료들을 그 어떤 보상도 없이 우리의 살아져 가는 민속 문화와 무속 문화 유 무형 문화재들의 실체들이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해져서, 후인 들이 우리의 살아 있는 진솔한 역사들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분들과 연구하는 분들께 널리 보급되어 알려지길 바랄 뿐이다. 예를 들어서, 신 내림의 굿을 하는 마당에서 연기하는 무속 인들은 신이 접신 되어 자기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조 차. 본인들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사실일 가 ? 아니면 속임 수일 가 ? 하는 것조차, 사전에 세밀하게 조사를 하고 앵글을 돌리면서도 그것의 사실 유무를 알아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집중해서 촬영을 한다. 내가 동영상이나 사진을 촬영 할 적에 어떤 하나의 귀중한 피사체를 발견하면, 두 시간 세 시간은 물론이고, 몇 날 몇 일을 두고서 다시 현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하여 어디에서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촬영했다는 것을 상세하게 나는 기록한다. 그래야만 기록물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여기서 80 리 되는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덕왕사 절에
원각 스님이 어렵게 구해서 재배한 밤에 피는 연꽃[천연기념물]작품 한 개를 촬영 할 적에 우리 집에서 32 키로의 멀고 먼 길을 새벽 1시에 출발해서 날이 샐 때까지, 그 한 작품의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 밤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억지로 이정표를 찾아서 밤이 새도록 산길을 해 맨 적도 있었고, 태백 산에 십 년에 한번 핀다는 꽃을 촬영하기 위해서, 태백산을 하루에 두 번이나 바위 산에 등산 자일을 걸치고, 목숨 걸고 그 꽃을 촬영 한 적도 있었다. 모든 작품은 사진 작가들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지방에 언제 어느 시각에 무슨 꽃이 피고, 행사를 하는 가에 매일 기록을 해두고, 정보를 얻어서
출사를 간다는 것이다. 어떨 적에는 중요한 사진을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에 필름을 끼우지 않고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한 적도 있었다. 서암 스님의 다비식 때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사진 카메라와 동영상 두 개를 가지고서, 연속적으로 촬영을 하다가 보니, 여덟 시간 동안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소변도 한번 누 지 못할 정도로 긴장된 시간이 바로 사진 작가들의 끈기와 고집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찍을 것은 다 찍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디카 사진을 처음으로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 행사장에서 10 일간 안동 시청에 2 동의 부스를 지원 받았고, 남어지 10일간 소요되는 전시장 행사 비용과 액자 나누어주기 선물 700 만원은
내가 부담하면서, 디카 사진을 직접 전시장에서 인화하는 과정을 손동출 교수와 故 박진수 후배님과 같이 전시를 하였고, 문화관광부장관님과 우리 전시장을 찾은 분들이 거의 8 만 명이 넘을 정도로 대 성황을 이루었고, 나는 생활 영상지에 디카 사진을 출품하여, 최 우수상과 우수상 장려상등을 여러 번 수상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비싼 필 카 카메라가 주를 이루던 시기에, 나는 가장 먼저 값이 싼 디카 사진 카메라로 디카 사진 기술을 습득했고, 어떻게 보면 내가 가장 디카를 처음 알린 것으로 본다. 이제는 필카는 모두 살아지고 디카의 세상이 되었고, 휴대폰에도 일억 픽셀이 넘어가는 고품질의 디카가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술들이 자고 새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나의 카메라에 출연했던 인간 문화재나 기능 보유자 무속 신앙의 명인 명 창들이 세상을 떠나신 분들도 많이 있다. 그 분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영상들은 이제 국가 기록원이나, 경북 문화기록관에 여러분들이 인터넷이란 활성화된, 공간에서 가만히 앉아서 김성복의 작품을 보실 것으로 믿습니다. 사람은 시간이 되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지만, 우리들이 남긴 글과 그림 사진들은 우리들 곁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