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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선택( 11)- 조선은 흡혈충 사대부와 양반의 나라 |
작성자: 정문 |
조회: 2706 등록일: 2024-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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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노예사를 연구한 미국의 패터슨(Oriando Patterson)은 한반도의 노예사를 포함하여 “노비제와 사회적 죽음”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그 발표에서 조선의 노예는 노비로 표현하고 있지만 노예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조선을 노비제 사회로 규정했다. 이에 반발한 “반일종족주의” 저자 중 한 명인 이영훈 교수는 패터슨 책에 반발하며 비판적 대응을 위해 과거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를 연구했고 취재차 일행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현지에서 노예제 자료를 수집하고 취재를 하던 중 뉴올리안즈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현지의 백인 부인과 만나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이영훈 박사 일행은 도미의 목적을 미국의 노예제와 조선의 노비제 비교를 위해 미국에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그 백인부인은 이영훈 박사에게 조선의 노비제가 궁금했는지 대뜸 질문 했다. Where were they from? 이영훈 교수는 질문을 받고 대단히 당황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 어떻게 답변을 했는지 내용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국내에서 단 한번도 그러한 질문을 받은 적도 없고, 그러한 문제를 생각해본적 없었다. 독백 삼아 이영훈 교수 자신이 누구로부터 그에 관해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은 적도 없으며, 그러한 질문을 나라 밖에서 처음 듣다니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논문에 까지 남겨 놓은 것을 보면 그 상황이 꽤나 당황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서울대에서 정년 퇴임한 뒤 사재를 털어 이승만학당을 세워 강연 및 집필 활동을 하며 지금은 역사 바로잡기의 전선에서 싸우고 계신 이영훈 교수는 김문수 장관 수준으로 좌익활동을 하다 전향한 보수진영의 아이콘 같은 분이시다.
이영훈 교수를 당황하게 만든 그 질문 “너희가 부렸던 노예들의 출신이 어딘데?”에 당황 할 수 박에 없는 것은, 동족이 동족을 노예로 부려 왔던 것은 의문조차 품을 필요 없이 너무나 당연시 하여 왔던 우리의 역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식은 동족이 동족을 노비로 부리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가질 필요도 없는 오랫동안 형성 된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동족이 동족을 노비로 부린 것은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드문 역사이다.
조선백성 태반이 노비였던 조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족이 동족을 노비로 부린 것은 독특하며 유일하다시피한 역사이다. 그 강성한 로마도 정복지의 주민을 데려다 노비로 부렸고 로마 본토에서도 10% 내외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은 동족 노예의 비율이 40%에 이른다. 참으로 끔찍하고 부끄러운 역사이다. 조선시대 역사적 사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사회적 거악(巨惡)이 당연시 될 수 있었던 그 시대 사회적 가치와 사회적 합의는 성리학과 선비라는 어찌보면 역사의 변종 같은 이데올로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반도의 북쪽에 주체사상이라는 변종의 이데올로기가 있어 대부분의 북한동포를 노예 상태에 놓이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시간에 비례한 역사의 진보라는 단순한 법칙을 역행한 이러한 역사적 변종이 지금도 북녘하늘에서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백성 절반이 노비인데 그 사회가 아름답고 우호적으로 돌아 간다면 이상할 것이다. 고통스런 그 시대를 살아남기 위하여 자기방어가 필요하고 그 자기방어는 집단성으로 굳어지게 된다. 우리는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북한동포와 심각한 정서적 괴리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3만에 불과한 탈북민과 겪어야 하는 정서적 괴리도 서서히 사회적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쉬쉬하고 있지만 탈북민과의 정서적 괴리 및 소통의 부재는 사회적 문제가 되어가고 있고 탈북민의 사회가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안다. 그것이 집단성이다. 하물며 탈북민 문제도 이러한데 통일 후의 정서적 괴리와 집단성을 어떻게 극복하여야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대두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세대는 홍역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길은 시대라서 집단성 극복은 50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다. 성리학과 사대부 질서가 남긴 집단성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도덕이라는 것은 외면화 되어 너와 나의 관계를 설정하고 하여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실천적인 외향적인 활동이다. 이세상에 나 혼자 산다면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든 노상방뇨를 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너와 나가 같이 쓰는 길이기 때문에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면 아니되고 노상방뇨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외면화 되어 행위 지어지는 것 이것이 도덕인 것이다. 그래서 외면화 된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 선(善)이다. 하지만 성리학은 외면화 되어 실천되어지는 도덕을 내면화 하는 것을 군자라 가르친다. 성리학에서 성(性)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며 이 본성에는 이미 도덕적 원칙이 내재 되어 있기 때문에 선한 본성을 유지하고 발현하는 것이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우주의 이치와 자연 법칙인 리(理)는 인간이 따라야 할 도덕적 기준이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기 때문에 "리"를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도덕적 성숙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망할 놈 주자(朱子)는 도덕은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 나온다고 했다. "배우는 자는 본래 선한 마음을 함양해야 하며, 외부에서 오는 이치로 가르침을 받아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學者須是要涵養本然之善心,而非以外來之理敎爲善)“ 너와 나, 우리와 저들과의 관계에서 도덕을 내면화 하는 것은 지독한 언어도단이다. 도덕의 내면화에 있어 저마다 가진 주관, 동기, 의도, 경험, 가치관 등의 변수는 어떻게 할 것이며 또한 도덕성의 측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이다. 개인적인 사변(思辨)은 그저 개인적인 영역일 뿐이다. 성리학의 주관적 세계관에 불과한 도덕의 내면화는 지극히 개인적 사변(思辨)에 불과할 뿐이다, 개인의 사변이 도덕화 되고 신념화 되면서 도덕성 경쟁을 하게 된다, 세상의 그 어떤 정의(正義)도 각자의 관점에서는 다르게 보인다. 그 어떤 정의도 개인의 주관적 도덕성 보다 우월한 도덕은 없다. 성리학의 이러한 도덕의 내면화는 필연적으로 독선(獨善)이 될 수 밖에 없다. 조선이 해가 뜨는 날 보다 많을 정도로 당쟁을 벌린 것은 도덕성 싸움이었다, 그것도 성리학적으로 내면화 된 주관적 도덕을 놓고 싸운 것이며 한편으로는 주관적 독선의 충돌이었다, 도덕성이 독선이 되면 나보다 열등한 도덕적 존재가 위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토록 처절하게 물어 뜯고 죽고 죽이며 사대부(士大夫)가 당쟁을 벌려야 했던 처절함이 곧 열등한 도덕적 존재가 내 위에 서는 꼴을 볼 수 없는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성리학이 유산으로 남겨준 집단성이 있다. 여의도 국회의 국개들, 한치 건너 두치 밖에 되지 못하는 잡견들이 입만 벌리면 민주주의와 인권을 나불거리며 개싸움으로 도덕성 경쟁을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 가치와 인권의 가치를 지키는 개(犬)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똥바가지에 대가리 처박고 짖어되는 糞犬 밖에 보이지 않는다. 성리학적 도덕의 내면화에 충실한 문재인씨와 이재명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리학의 도덕적 내면화가 남겨 준 집단성의 또 하나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땅병“이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참을 수 없는 땅병의 첫마디가 대부분 과거의 서운한 일을 떠올리며 그 못된 놈, 그 나쁜놈으로 시작한다. 시기와 질투로 아픈 배도 도덕성이 원인이다. 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의 대한민국에 측정할 수 없는 거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들에 대한 공격은 오직 하나 도덕성 흠집내기 뿐이다. 위안부 데려다 앵벌이 시키고, 북한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서 도덕성을 공격한다. 성리학이기 때문에 그 뻔뻔함이 가능한 것이다.
게바구니라는 것이 있다. 어느날 뻘밭에서 게를 잡는 어느 여자가 뚜껑이 없는 바구니에 게를 잡아 넣고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뚜껑이 없는 바구니에 왕성하게 활동하는 게를 잡아 넣는 것이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바구니에 뚜껑을 닫아야 게가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 여인이 답했다. “조선에서 잡히는 게는 바구니에 같이 넣어 놓으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서로 서로 잡아 끌어 내려 한 마리도 바구니 밖으로 나오지 못해요!” 아마도 우리의 집단성 나아가 국민성을 꼬집는 알레고리가 아닐까 싶다. 인간사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끄집어 내리려는 것은 어디서나 있는 인간의 본성이지만 유독 유교적 가치가 지배했던 국가의 역사가 심했던 것은 나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여튼 게를 잡을 때 뚜껑 없는 바구니라도 모든 게가 성리학적 도덕을 내면화 하면 가득 담아 두어도 안심해도 된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 Categorical Imperative)은 성리학의 도덕적 내면화의 정반대에 서서 도덕적 외면화를 주장하고 있다. 도덕성은 각 개인의 주관적 내면적인 것이라도 그것은 이성에 의해 외부적으로 정의된 규칙을 따라야 하며, 조건적이거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아야 하며, 특정한 결과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서양을 지배한 히브리즘(Hebraism)은 유대 기독교에서 사상적 출발을 하고 있다. 히브리즘의 도덕은 인간의 사변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 계시와 명령을 종교적 함의로 보지 않고 그것을 빙자한 인간의 인위적 규범이라 할지라도 성리학처럼 인간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규범이 아니라, 인간이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를 통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도덕, 즉 도덕적 실천의 외면화라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내가 줄일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장 35절~36절)."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물과 옷을 준 적 없고, 병 간호나 또는 옥바라지를 한 적이 없었음에도 그리 말하는 예수님께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태복은(25장 40절)” 헐벗고 굶주리는 지극히 작은자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도덕의 외면화는 서양의 도덕을 대변한다. 성리학의 주관적 세계관에 기반한 개인적 사변(思辨)의 내면적 도덕은 외면화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강압과 폭력을 동반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개인적 사변의 결과물인 도덕을 외면화 하여 보편성을 가질 수 없고, 그것에 순응하게 만들려면 또 다른 개인의 내면화 된 도덕과 충돌하여야 한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신념과 신념의 충돌이 된다. 신념과 신념의 충돌은 역사적으로 피를 뿌려왔음을 보아왔다. 조선의 당쟁이 그토록 처절하게 충돌했고, 집요하였으며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조선의 당쟁은 단순하게 정치적 세력의 충돌로 인식하여 왔다. 그러나 당쟁은 그리 단순하며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를 놓고 싸우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조선 백성을 통치한 것은 왕권(王權)이 아니었다. 국민을 절반으로 갈라서 왕권이 다스리는 백성과 신권(臣權)이 다스리는 노비(奴婢)가 있었다. 지배자는 왕과 신하였고 국민은 백성과 노비였다. 조선의 노예비율은 대략 40%정도 이거나 그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경제사학자(經濟史學者)는 이영훈 교수이다. 특히 조선 시대와 근대 한국의 경제사에 대한 그의 권위는 독보적이다. 그의 권위를 빌어 조선의 국민 절반은 노비였다. 반일(反日) 코인이라면 집도 절도 버리는 대한민국 좌파가 반일종족주의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최고 권위의 경제사학자 이영훈 교수의 반박할 수 없는 자료와 통계가 반일종족주의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훈 교수의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의 한국경제사를 넘어서기 까지는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독보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노비 40%와 양반 노주(奴主), 서자와 얼자 등을 따지면 정확하게 조선국의 국민 절반을 양반이 통치했다. 조선시대 노비는 역모 이외에는 그 어떤 이유로든 노주를 고발할 수 없었고, 노비의 생계는 노주에게 있었으며, 노비의 생사여탈권은 노주가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노비의 통치자는 양반이었고 사대부(士大夫)였다.
양반과 노비는 군역의 의무가 없었다. 국방의 의무가 없었다. 국방과 안보는 국가에서 가장 큰 지출이 필요한 공공재이다. 그 공공재를 왕과 절반의 국민이 부담하여야 했다. 따라서 세금 한푼 내지 않는 양반과 사대부가 경제력을 장악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국가의 상징적 존재인 왕은 국가 재정과 궁중 재산을 관리했지만, 그 자산은 쓸곳이 넘쳐나는 국가와 왕실을 위한 공적 재산이었다. 사대부는 개인 소유의 대규모 토지와 소작료 수익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이는 사유재산이며, 특히 농본제(農本制) 국가에서 생산의 원천인 국가보다 많은 토지를 소유했고 토지 경작을 위한 가노(家奴)와 외거노비(外居奴婢) 같은 무상 인력을 가지고 농사도 지었으며, 소작농에게 경작을 맡길 때에도 최소비용의 최대 수익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며 경제까지 장악했다. 양반과 사대부는 국가에 대한 그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오직 군림 할 수 있는 권력만 가지고 있었다. 사대부는 국민 절반을 노비로 할당 받아 사유재산화 하였고, 국가를 지탱하는 국방과 납세의 의무를지지 않았다. 사대부는 조선에 기생하는 거대한 기생충이었다. 인류 역사상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가 없는 귀족이 다스린 역사사의 국가는 없었거나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양반은 흡혈충 중에서도 그 정도가 가장 악질이다. 사대부 권력의 원천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을 통한 국가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서 신분제 질서가 계율인 성리학은 노비와 경제력, 권력과 세력을 보장해 주었다. 또한 극소수의 양반만의 리그인 과거시험을 사대부가 틀어쥠으로서 헤게모니를 지켜줄 군병(軍兵)은 무한공급 되었으며, 파당을 지어 관료를 네트워크화 하여 정보와 법률, 제도를 장악했다. 전국 각지의 지방에서 지역경제를 장악하고 서원과 향교를 세워 교육과 학문을 독점하고, 유생과 인재를 모아 언로를 장악했으며, 학문을 독점하고 권위화 하여 그 권위를 통해 고도로 훈련 된 성리학 탈레반을 양성했다. 조선 500년사에 최소한 사대부의 권력과 권위에 도전할 세력은 없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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