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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선택(9) - 동양과 서양의 산업혁명 |
작성자: 정문 |
조회: 4954 등록일: 2024-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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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홍차일 것이다. 전세계의 차는 홍차가 80%이고 그중 60%가 영국에서 소비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한국에서 마시는 녹차 비중은 고장 20%에 불과하다. 그만큼 영국의 홍차 소비량은 절대적이며 영국의 자존심이다. 영국에서 일부 귀족층이 즐긴던 사치품인 홍차가 일반 국민에게까지 널리 퍼진 것은 산업혁명을 통해 소득이 향상 되었기 때문이다. 사치품인 홍차를 구매하여 즐길 수 있다는 풍요의 의미 보다는 소득의 향상으로 인한 생활의 여가(餘暇)를 즐기 수 있게 된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여가의 발생은 반드시 인간에게 시간을 주며 문화 발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국의 홍차 소비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사치스런 차문화를 가진 송나라가 있었다. 송나라 수도 카이펑의 골목 도처에서 차를 누가 더 잘 만드냐를 두고 시합을 하는 투차(鬪茶)가 유행했다. 차도구와 차엽의 품질은 물론 차를 내리는 기예(技藝)까지 겨룰 정도로 사치스러웠다. 이러한 사치스런 소비는 송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소리까지 있고, 원나라 때에는 사치스럽게 즐기는 차문화를 법으로 금하여 간소화시켰다. 삼국지의 유비는 돗자리를 팔아 몇 년간 모은 돈으로 어머니께 값비싼 차를 사드리기 위해 길을 떠날 정도로 차는 고가에 사치품이었다. 그런 사치품을 송나라에서는 시장 골목에서도 흔하게 마시는 기호품일 정도로 송나라의 경제는 부유했다. 우리나라가 손꼽히는 상위 부자국가가 된 요즘, 한끼 식사비와 맞먹는 고가의 커피가 팔리는 골목 골목 커피전문점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에서 영국과 송나라의 차문화를 유추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끊임 없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송나라는 경제적으로는 매우 풍족했다. 그 풍족함을 바탕으로 침략자에게 돈 주고 평화를 샀다. 어쩌면 비겁한 그 살얼음판의 평화 속에서 수도 카이펑의 인구는 130만명에 이르렀고, 흥청거리는 카이펑 시내는 불이 꺼지지 않아 이를 두고 불야성(不夜城)이라고 불렀다, 동시대 영국 런던의 인구는 고작 10만명에 불과했다.
송나라 시대 석탄으로 철을 제련하였고 연간 철강 생산량이 12만톤이 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한 창 일 때 영국의 년간 생산량과 맞먹는 수준이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하여 서인도 제도에 도착한 산타마리아호는 150톤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40여명의 선원이 승선했다. 송나라 시대 화물선은 200~600톤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영국의 산업혁명보다 500년이나 앞선 당시의 경제의 풍요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화약, 나침판, 인쇄술이 송나라 때 발명 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송나라는 500년 앞서 영국의 산업혁명기의 철강생산량에 도달 했는데 마오쩌뚱은 1960년대 동시대 영국의 철강생산량을 넘어서겠다고 홈메이드 제철소 토법고로 (土法高爐)를 만들어 국가를 난장판으로 만든 대약진운동의 그 바보짓을 생각해 보면 역사라는 것이 새삼스럽다. 이러한 송나라의 위세는 11세기부터 약150여년간 일어났던 송나라의 강남개발의 풍요와 산업혁명 직전까지 갔을 만큼 기술적 발전 및 경제적 부흥이 있었던 시대였다. 이시대를 두고 미국 시카고대 윌리엄 맥닐 교수는 극찬 하고 있다. “외세의 침략만 없었다면 송나라는 산업혁명을 이룩했을 것이다” 송나라의 경제적 부흥은 강남개발(江南開發)에서 시작 된다. 친구 따라 강남가고, 흥부가 부러진 다리 고쳐 준 그 제비가 갔던 그 강남이다. 양자강 이북에 집중 되었던 중화대륙의 역사에서 강남개발은 역사의 무대를 2배로 확대시켰다.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 있던 양자강 이남은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따뜻하였다. 북송(北宋)은 강남의 비옥한 토지를 개발했다. 지금의 라오스인 참파국에서 재배하고 있는 벼품종인 점성도(占城稻)를 도입했다. 점성도는 높은 수확량에 일찍 수확할 수 있는 조도(早稻)였다. 따라서 이모작이 가능했고, 이앙법까지 도입 되어 단위면적당 쌀생산량은 3배로 늘어났다. 점성도 재배는 많은 물이 필요하였지만 10,800개의 관개 프로젝트가 완료 하며 해결 하였고 3,600만결의 농지가 새롭게 생겨났다. 강남에서의 엄청난 쌀생산량의 중가는 쌀재배를 하지 못하던 양자강 이북에 주로 터전을 잡았던 중국 왕조가 쌀이 주식이 되는 혁명이 일어났다. 수당 시대 건설한 운하를 통해 쌀이 유통 되며 물류혁명도 일어났다. 급격하게 늘어난 화폐 유통량을 감당하지 못하여 어음과 국가가 보증하는 세계 최초로 종이지폐까지 발행 되었다. 농업의 발전은 남아도는 잉여의 쌀을 대신하여 환금성이 높은 상업용 작물이 재배 되어 유통 되면서 상업혁명을 가속화 시켰다. 수, 당시대부터 내려온 국가가 농민에게 경작할 땅을 똑같이 나누어 주는 균전제를 대신하여 강남개발을 통해 새로 생겨난 토지는 사유권이 생겨났고 토지가 매매 되면서 부농이 출현하며 자본축척이 일어났다. 석탄이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민가에서는 석탄으로 난방을 하였고, 석탄시장이 생겨 성업을 이루었고, 석탄을 이용한 철강의 제련, 도자기 제작이 이루어 져 무역과 상업은 번창했다. 수백톤의 거대한 상선에는 철기구와 도자기, 농산물이 가득 실렸고, 동업조합 같은 초기 자본주의 주식회사 형태의 회사도 생겨났다.
주희의 주자학(朱子學)은 점차 영역을 넓혔고, 빌어먹을 그 주자학의 이데올로기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지배질서를 만들었다. 정치, 사회, 경제 문제에 도덕적 판단을 앞세워 선과 악의 그 대단한 주자학적 해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상인은 관리가 될 수 없었고 사익의 추구는 천시(賤視) 받아야 했다. 과거제에 바탕을 둔 관료제는 출범 초 우수한 인재를 뽑아 사용할 수 있었으나 갈수록 심각한 부패는 심화 되었다. 더욱이 실용성을 갖추지 못한 주자학의 현실적 괴리는 현실문제에 대하여 무능할 수 밖에 없었다.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관료와 권력층은 뇌물과 부패로 사치스러움을 유지했다. 현대에도 유교식 관료제가 발달한 사회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고질적 뇌물문화와 부정부패는 주자학의 탐욕을 대변하고 있다. 몇조원씩 부정축재한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관료들을 볼 것이며, 오히려 그들은 중국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뇌물문화를 뿌리 뽑겠다며 설치고 있다. 뇌물 혐의를 받고 있는 누구의 딸은 대놓고 “막나가자는 겁니끼?”라며 국민을 협박하고 있다. 더 비참한 것은 전직 대통령의 딸로서 뇌물을 받아 먹었다는 것에 대하여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지 애비는 삼성이 정유라에게 말 빌려 준 것으로 제3자 뇌물죄라는 지나가는 개도 웃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누명을 씌워 징역 25년의 빨갱이 인민재판을 했는데, 그럼에도 그 딸년의 요사스러운 주둥아리는 참으로 싸가지 없는 말을 씨부리고 있다. 여전히 성리학(性理學)적 경세(經世)를 버리지 못하는 국가적 비극이다. 극심한 부패에 시달린 송나라는 왕안석이 나와 서기법(市易法)과 청묘법(青苗法)을 통해 자본이 영세한 상인과 농민에게 국가에서 저리 대출을 하여 경세를 돌보려 했지만 오히려 관료들은 비싼 이자를 붙여 수탈했다. 눈에 가시가 된 왕안석을 숙청하기 위하여 주자학의 사대부는 당쟁을 일으켰디. 왕안석의 숙청 이유가 큰 가뭄이 발생한 것은 왕안석 신법(王安石 新法)이 하늘의 분노로 샀기 때문이라며 쫒아냈다. 공자에게 천명을 내려준 그 하늘의 이상한 분노라 할 것이다. 국가경영이 과거제로 권력을 잡은 관료들의 놀이터가 되고 법은 공정성과 일관성은 사라지고 관습과 도덕율이 지배하게 되어 송나라는 무너졌다. 오늘날 중국에 남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한 관습과 도덕 관념이 우선하는 것은 송나라 주자학의 망령이 계속 되기 때문이다. 국부론의 저자 아담스미스는 송나라에 대하여 일침(一針)을 가하고 있다. “중국은 사법정책의 집행에서 공정성과 일관성을 상실한 결과, 성장 잠재력을 잃고 정체되고 말았다. 국민들이 재산의 소유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계약이 법률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지불할 능력을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채무를 변제하도록 강제할 수 없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상업과 제조업이 장기적으로 번성한다는 일은 거의 발생할 수 없다.” 문명적으로 서양을 앞섰던 동양이 서양에 뒤져진 시점을 두고 경제사(經濟史)에서는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라고 부른다. 또는 유럽의 기적(European miracle)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대분기는 16세기 이후로 보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유와 원인를 들고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산업혁명(産業革命, Industrial Revolution)이다. 영국의 헨리8세는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로마교황청과 관계가 좋았다. 헨리8세는 스페인 출신의 캐서린 아라곤의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귀족출신의 지적이고 매력적인 앤 볼린과 사랑에 빠졌다. 앤 볼린은 왕비 캐서린 아라곤의 시녀였었다. 앤 볼린은 헨리8세에게 캐서린과 이혼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캐서린 아라곤과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청에 헨리8세는 교황청과 단절하고 수장령을 내렸고, 헨리8세가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어 성공회(聖公會)가 출발 한다. 성직자 임명과 교회재산관리까지 모두 거머 쥔 헨리8세는 왕비 캐서린 아라곤을 내 쫓는다. 장차 도래할 거대한 불행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헨리8세와 결혼한 앤볼린은 엘리자베스1세를 출산하고, 성공회가 영국에 정착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종교개혁의 지지자들 영향력을 확대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헨리8세는 이혼을 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자 간통, 근친상간, 반역 등의 누명을 씌워 앤볼린을 참수형에 처한다. 헨리8세가 죽고 여왕이 된 메리1세는 어머니 캐서린 아나곤의 복수에 나선다. 자신의 어머니가 쫓겨나고 만들어진 성공회에 대한 복수에 나선 메리1세는 스페인의 카톨릭 왕 필립 2세와 결혼하며 카톨릭 국가들과 동맹을 강화하고 280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을 잡아다 화형에 처하며 로마 카톨릭 국가로 회귀했다. 국민에게 카톨릭 개종을 거부하면 이단으로 몰아 대중을 모아 놓고 공개화형으로 처형 했으며, 켄터베리 대주고 토머스 그랜머 같은 고위 인사도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가혹한 종교탄압과 처형으로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렸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은 존녹스는 종교개혁가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 한 후 칼을 차고 종교개혁운동을 하는 조지 위샤트를 따라 다니며 호위했다. 존 칼빈은 조지 위샤트가 카톨릭 신도에게 붙잡혀 처형 된 후 프랑스군에 끌려가 갤리선의 노예가 되어 노를 젓다 영국 국왕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궁정 설교자가 된 존 녹스는 메리1세의 등극과 종교탄압을 피하여 제네바의 존 칼빈에게로 가서 공부했다. 메리의 탄압을 피해 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으로 망명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이들의 신앙운동은 청교도 운동의 출발이 되었다. 그들이 세운 피난민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된 존녹스는 그들과 함께 종교개혁을 고민하였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존녹스는 종교개혁을 이어갔다. 스코틀랜드로 돌아 온 그는 시민전쟁을 통해 프랑스 세력을 물리치고 교회 개혁을 주도하며 1560년 종교개혁법을 통과 시키며 장로교 교리를 확산 시키며 개혁교회의 전통을 확립했다. 스코틀랜드에 개혁교회(改革敎會,Reformed Church)의 장로교(長老敎, Presbyterianism)가 뿌리 내리면서 영국의 변방에 불과한 스코틀랜드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문화 융성으로 이어졌다. 국민 모두가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장로교의 지역공동체 내에 학교와 도서관을 세우고 모든 아이들을 데려다 교육 시켰고, 모든 주민은 자유롭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을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장로교의 교육 철학과 노력은 영국의 변방에 불과한 척박한 스코틀랜드를 지식강국으로 변화시켰다. 장로교가 강조한 성경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은 문맹 퇴치와 문해 능력을 향상시키는 결정적 기여를 하여 본토 잉글랜드는 국가적 차원의 스코틀랜드 문해율을 따라 잡는데 1세기 이상 걸리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빵짐 점원, 시장 상인, 노동자까지 읽고 쓸 수 있었다. 영국 국왕이 된 찰스 1세는 성공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끊임없이 개혁교회를 표방하고 있는 성공회를 향하여 무늬만 개혁교회일 뿐 교황청과 다를바 없다고 공격했다. 찰스1세는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 임명하였고 과거의 전통적 예배 방식을 고집하며 성례전과 같은 가톨릭적 요소들을 강화했다. 청교도는 강력하게 반발하였지만 찰스 1세는 공동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을 만들어 공식 기도문화 하여 예배시간에 낭독함으로서 교황청의 정형화 된 미사처럼 예배의 표준을 정했다. 찰스1세의 일련의 조치는 누구나 성경에 따라 언제나 개인적으로 절대자와 소통할 수 있으며 그 소통의 도구인 기도를 국가가 정한 기도문으로 대처한다는 것은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1637년 에든버러의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성공회 사제 제임스 해네이(James Hannay)는 예배 중 공동기도문을 읽는 중 시장의 노점상인 제니 가데스(Jenny Geddes)는 자신이 앉아 있는 세발의자를 사제를 향하여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이 더러운 의자에서 나를 대면하지 말라!” 예배에 참석한 군중들은 분노하여 저마다 가진 소지물을 던졌다. 시장 노점상이었지만 제니 가데스는 앵글리칸 관습(Anglican practices)에 따른 성공회 교회의 전통적 예배 및 교리와 관행에 분노한 것이다. 즉, 개혁교인으로서 교황청의 예배형식과 성체성사, 교회조직 및 교리, 여전한 전근대적 카톨릭의 영향에 저항하고 나선 것이다. 제니 가데스의 저항은 스코틀랜드의 국가언약(Scottish Covenants)으로 이어져 모든 스코틀랜드 국민이 서명하며 장로교적 신앙과 자율성을 지키고, 교회의 권리를 보호하며, 성경에 따른 신앙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했다. 또한 제니 가데스 사건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두차례에 걸친 주교전쟁(Bishops' Wars)을 일어나게 되었고 전쟁에서 스코틀랜드가 승리하며 그들의 신앙을 지켰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1643년 웨스트민스터 국가언약 (Solemn League and Covenant of 1643)을 통해 장로교 신앙의 종교적 자유를 얻었다. 찰스1세는 영국의 청교도와 전쟁을 벌렸다. 왕당파(Royalists)의 지지를 받은 찰스 1세는 의회파(Parliamentarians)의 지지를 받은 크롬웰에게 패배하며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으며, 이는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공개 재판을 통해 처형된 사건으로 기록된다. 칼빈은 제네바 시장으로 재직하며 시민사회를 만들었고 제네바는 현대 시민사회의 표준이 되었다. 칼빈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절대 권력이나 전제 정치는 위험하며 권력은 법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고 했다. 시민은 정부에 복종해야 하지만, 시민의 기본권을 빼앗는 정부에 저항할 것과 시민사회의 중요한 수단으로 법치를 두고 법은 공동선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존녹스를 도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공의회 의장이 된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은 법에 따라 국민 복지에 반하는 왕은 폐위할 수 있으며, 국왕은 법 위에 있지 않음을 말했다. 그의 말은 찰스1세가 처형 된 것을 예언 한 것 같다. "국민은 그들의 복지에 반하고 왕국의 법을 위반하는 왕을 폐위할 권력을 가진다. 국민이 일어나 폭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정당하며, 왕은 법 위에 있지 않다.(The people have the power to depose a king who acts against their welfare and violates the laws of the kingdom. It is lawful for the people to rise up and remove a tyrant from power, for the king is not above the law.)“ 개혁교회 운동과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정신은 하늘이 내린 개인(個人)을 보호 하는 법률적 장치가 마련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잘못한 왕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찰스1세는 법의 심판을 받고 처형 된 것이다. 이러한 법치주의(法治主義) 확립은 영국을 세계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의 성공을 아담 스미스는 공정(公正)한 법(法)에 두고 있다. “영국에서 선진적으로 상업의 자유와 형평성 있는 사법 집행 제도가 정착됨으로써 경제적 측면에서 경제 주체들에 의한 근면과 생산적 자원개발 노력을 자극할 수 있었으며, 이 점이 유럽국가 중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의 토대로 작용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류의 삶에 거대한 긍정적 변화를 가져온 혁신이었다. 아놀드 토인비는 산업혁명을 두고 "역사는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고 말했다. 개혁교회를 바탕에 둔 스코틀랜드의 교육혁명은 초등교육의 글래스고우 대학과 에딘버러 대학이 유럽의 학문중심지가 되게 하였고 에딘버러 대학생의 절반은 귀족이 아닌 중산층의 자제들이 다녔다. 이러한 교육 혁명은 아담 스미스, 데이비스 흄, 제임스 와트, 조지 스티븐슨, 토마스 턴불, 찰스 맥킨토시, 존로지 비어드, 로버트 오언과 같은 당대의 인재들을 길러냈고, 이들의 절대적 기여로 영국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에 스코틀랜드가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과 자본주의 영원한 교과서 국부론을 쓴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이다.
인간은 변덕스럽고 괴팍스러운 불과 바람, 물과 햇볕과 같은 자연적인 에너지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에너지를 생산, 통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인간은 보다 정교한 에너지 생산, 통제 기술을 발전 시켜왔다. 지금은 에너지를 초 소형화하여 스마트 폰 배터리를 들고 다니고 있다. 인간이 에너지를 통제하게 된 시작은 산업혁명의 증기기관의 발명이다. 스코틀랜드의 열렬한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난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산업혁명은 시작 되었다. 이미 영국에서는 증기기관이 발명 되었으나 효율이 낮아 상용화를 시킬 수 없었다.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을 응축기를 통해 효율을 높이고, 증기기관의 회전속도를 높이는 조절장치를 개발하였고, 증기기관을 회전운동으로 변환 할 수 있도록 개발하여 증기기관을 상용화 시켰다. 프랑스의 칼뱅주의를 따르는 개신교인들은 극심한 탄압에 시달렸고, 전쟁도 불사했지만 결국 루이 14세의 포르탱블로 칙령으로 위그노가 되어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그 중 일부는 방직업이 발달한 영국으로 건너와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영국으로 건너온 드니파팽은 영국으로 건너와 초기형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효율이 낮아 실용화가 되지 않은 것을 이를 개량한 것이 제임스 와트였다. 위노그가 되어 유럽을 떠돌다 영국으로 온 증기기관 엔지니어 제임스 드니와, 열역학 엔지니어 앙리 루이 등도 증기기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담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며 국부론을 집필했다. 그는 자유 시장경제와 경제적 자유, 보이지 않는손, 분업과 전문화, 자본축척과 경제구조, 노동가치와 부의 분배 등 현대 경제학의 뼈대를 만들었다.
미국이 독립하던 해에 출간 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한 국가의 부의 원천은 즉, 재화의 총합은 그 사회의 노동, 생산성, 자본에 의하여 결정 된다는 경제 이론은 산업혁명의 갈 길과 방향을 알려 주었고 여전히 현대 경제학의 틀을 이루며, 국내총생산(GDP)과 국민총생산(GNP) 같은 경제 지표의 토대가 되고 있다. 송나라 도자기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던 유럽 사회가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것은 종이 한장의 차이였다. 공자(孔子)를 불러내어 덧칠 하여 이데올로기화 한 주자학(朱子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를 불러내어 심판대에 세우고 발가 벗겨 매질 한 르네상스의 차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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