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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선택(8) - 르네상스 - revivalism(2) |
작성자: 정문 |
조회: 4010 등록일: 2024-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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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에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역사와 서양역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군주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어느날 문둥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교황 실베스테르 1세는 그를 위하여 지극한 기도를 올렸고 문둥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감격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 동방은 자신이 다스리고 서방은 실베스테르 1세와 그 후임들에게 맡긴다는 내용으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을 작성하며 칙령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은 교황은 황제보다 더 우위에 있고, 세속의 황제까지도 교황이 교체할 수 있으며 교황은 종교적 최고 권위와 세속적 권위까지 가지는 것을 의미했다. 기증장에 대한 의심은 누구도 하지 않았고, 황제들이 대관식 때 기증장을 인준하게 했다. 문건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는 이단으로 간주 했으며 세속군주와 교황청이 충돌할 때 기증장으로 인해 교황청의 권위가 우선했다. 교황청 세속권력의 원천이었다.
로마의 공용어인 라틴어가 지배하는 중세에 성경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성직자만 읽을 수 있었으며 소수도 이에로니무스(영어명 제롬)가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 성경만(불가타 성경) 읽을 수 있었다. 교황청의 중세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언어는 라틴어였다. 그러나 르네상스기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낸 복고주의(復古主義)는 라틴어 지식을 점차 그리스어 지식으로 바꾸어 갔다. 고전을 읽고 연구하기 위하여 그리스어를 연구했고 언어학과 고전문헌학이 발전한다.
르네상스의 언어문헌학(言語文獻學)을 확립한 로렌초 발라는 웅변학과 교황과 왕의 서기관을 역임하는 등 명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로렌초 발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에게 주었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을 연구하여 위조 된 사실을 밝혔다. 1440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로렌초 발라의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로마 교황청은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기증장에 쓰여진 7~8세기에 쓰여지던 라틴어로서 기증장이 작성 된 4세기는 허위이며, 기증장에 쓰여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니노플은 기증장 작성 이후에 건설 된 도시로서, 기증장에 지명이 들어갈 수 없는 것 등을 밝혀냈다. 르네상스의 인문학의 가동이 본격화 되는 순간이었다. 분노한 교황은 로렌초 발라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하였으나 곧 풀려나 복권되었지만 로렌초 발라의 논문은 로황청 금서로 지정되었다. 1492년 내우외환(內憂外患)의 바람 잘 날 없는 교황청에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로6세가 교황으로 선출 된다. 선거전에서 사제에게 막대한 금괴를 뿌렸고, 경쟁 후보에 금괴를 안겨주어 선거에 나서지 못하게 했다. 16세에 불과한 교황의 아들이 대주교로 임명 되었고, 온갖 친척을 불러들여 주요 성직자에 앉혔다. 성적타락도 심각했다. 16명이나 되는 사생아를 두었고, 친딸과 근친상간을 벌리고, 교황청에 매춘부를 불러들여 발가벗겨 춤을 추게 만들고, 교황의 정부(情婦)는 백작부인을 비롯하여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끝 없는 교황청의 타락은 끝없는 권위의 추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인문학 즉, 언어학, 문헌학, 역사학이 교황청의 위선을 밝힌 것은 충격이었고 희망이었다. 이성의 인문학에 합리적 사고를 더한 자연과학의 발전도 눈부셨다. 르네상스 기(其) 인류 과학사에 영원히 기록 될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교황청은 창조주의 지음 받은 사람을 만물의 중심이라 생각하였고, 하나님의 장자(長子)인 인간이 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어스에 의해 정리 된 천동설을 교황청에서 그대로 흡수하여 중세까지 이어졌고 교황청은 천동설을 부인하면 이단으로 몰아 죽였다. 그러나 교황청의 천동설은 성경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경 어디에도 천동설과 지동설을 설명하는 부분이 없다.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태양아, 달아 멈추어라”의 여호수아 기도를 근거로 들고 있으나 그것은 인간의 지각(知覺)의 한계(限界)에서 표현 된 것일 뿐이다. 지동설이 확립 된 지금시대에도 관념의 편의상 지구가 움직여도 “해가 뜬다(Sunrise)”라고 하지 “지구가 뜬다(earthrise)”라고 하지는 않는다.
교회법 박사학위를 가진 카톨릭 사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교황청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음을 밝혔다. 명동성당 본당 신부님이 교황청을 이단으로 선고하는 충격과 같은 것이다. 이탈리아 알프스를 넘어온 르네상스 물결이 아카데미를 점령하고 있을 때 폴란드에서 태어난 코페르니쿠스는 4곳의 대학을 다니며, 신학, 의학, 경제학, 천문학, 법학 등을 공부했다. 뛰어난 언어적 재능은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했다. 그리스어에 정통하여 번역활동을 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경제학자이기도 했다. 귀금속의 화폐가치는 이를테면 금화 또는 은화 등의 가치는 시장에서 교환 또는 거래 될 수 있는 재화의 교환가치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밝혔다, 시장경제가 발전한 지금의 시대에 화폐공급이 늘면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은 사실은 당연한 사실로 알고 있지만, 금화는 금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 고유가치를 항상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당시에는 파격과 같은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이 쓰여지기 300여년전 화폐의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밀턴프리드먼을 비롯한 통화주의자通貨主義者)들의 시조(始祖)라고 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운행 예측과 천동설을 뒷받침하는 아리스토의 이론과 잘 맞지 않음을 발견한다. 또한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던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왕이 만든 행성목록표와도 일치되지 않음을 알아냈다, 이에 의문을 가진 코페르니쿠스는 마침내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다. 다행히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담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출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교황청으로부터의 화(禍)는 피했지만 지동설을 증명 하지 못했다.
잊혀질 뻔한 지동설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개량하여 목성, 태양 등을 관찰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이 잘못 된 것과 인류 최초로 태양의 흑점을 관찰했다.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갈릴레이는 지동설로 인해 두 번이나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다. 성경해석을 독점한 교황청의 죽창들은 인민재판이었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망원경을 직접 개량하여 목성과 토성 등을 관찰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망원경은 태양의 흑점까지 발견했다. 그로부터 150년 후 조선의 영조는 청나라에서 들여온 망원경을 받아 들고 이름부터가 건방지고, 태양을 본다는 것은 임금의 뜻을 엿보는 것이라며 즉석에서 내동댕이쳐 부서 버렸다,
만류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이 신학자였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는 물리학자, 수학자, 정치인, 과학자, 종교학자였다. 뉴턴은 과학 분야보다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의 신학 관련 문헌을 남겼다.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많은 신학자와 사상가들과 교류하였다. 뉴턴의 기록 중 과학과 수학에 관한 단어는 100만 단어에 불과하나 신학에 관한 단어는 140만 단어에 이른다, 그는 신을 믿은 이유를 남기고 있다. "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근본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쓴 것으로 믿는다. 나는 매일성경을 공부한다(I have a fundamental belief in the Bible as the Word of God, written by those who were inspired. I study the Bible daily)" 만류인력을 발견하고 미적분학을 최초 고안한 고금의 3대 수학자, 여전히 뉴턴역학은 우리를 지배하는 등 아이작 뉴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인으로 꼽힌다. 만류인력의 법칙의 발견은 기계론적 우주관을 낳았고 그 때까지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데아(idea)였던 엔텔레케이아(entelecheia) 즉, 목적론적 우주관은 깨졌다. 세계관의 혁명은 뉴턴 사후 50여년 지나 제임스 와트에 의해 증기기관이 만들어지면서 산업혁명이 시작 된다. 갈릴레이가 죽은 후 1년 후에 태어난 아이작 뉴턴을 역사는 “마지막 르네상스인” “최후의 연금술사”로 기록하며 과학혁명의 꽃이 그로부터 만개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으며 타임지는 이 사실을 적고 있다. “우주에서 위대한 설계를 찾는 그의 과학적 탐구는 고대의 가설들을 뒤엎었다” 우주를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시계처럼 맞물려 돌아간다는 기계론적 우주관은 세계관의 혁명이었고 계몽주의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담스미스로 이어져 국부론에 “움직이는 천체가 자연의 일정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경제도 같은 것이다” 라고 적으며 경제학(經濟學)의 출발을 알렸다, 인류를 전근대의 농업사회를 벗어나게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산업혁명은 경제학의 기반 없이는 불가능했다. 또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류에게 예측이라는 선물도 주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연구하는 경제학의 기반은 그렇게 형성 된 것이다. 이성과 합리적 사고, 인문학과 과학 앞에 교회의 신권(神權)은 심각하게 흔들려야만 했다. 더욱이 교황청의 목불인견(目不忍見)의 타락상과 혹세무민(惑世誣民)은 교황청은 존립(存立)의 기반(基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종교(宗敎)의 종말(終末)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은 신(神)에게 있었다. 르네상스기 만개한 인문학은 대학(大學)을 통해 발전하고 퍼졌다. 인문학과 자연철학, 의학과 법학 등 다양한 분야가 영역을 찾았고 이러한 대학의 르네상스적 학구 분위기가 시대를 주도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대학 중 하나이며 명성을 자랑했다. 인문학이 대학교육을 점령한 르네상스기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존 위클리프는 출중한 능력을 인정 받아 졸업 후 옥스퍼드 대학교수가 되었다. 명성이 높아지며 궁정에 초빙 되어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 사제로 서임 되었다. 교황청은 구원을 위한 면죄부판매와 성경해석을 독점한 세속적 이익을 탐닉하였고 한편, 대중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교황청은 미사의 성찬 전례 때 구원을 위해 주는 떡과 포도주는 축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변화 된다는 화체설을 권위의 상징으로 삼아 대중을 잠재웠다. 화체설을 부인하면 화형(火刑)에 처해졌고 그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은 스콜라 철학에 의해 다듬어져 1215년 라테라노공의회에서 교리화 한 것이다. 또한 지옥(地獄)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대중에게 천국(天國)으로 갈 수 있는 연옥(燃獄) 이라는 정거장을 팔아 혹세무민 했다. 존 위클리프는 교황청의 화체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위클리프의 비판에 잉글랜드의 왕족과 귀족 등의 기득권층이 등을 돌리게 되면서 궁정 사제를 그만두고 왕실에서 나와야 했다. 그리고 교황청은 그를 이단으로 지목했다. 위클리프는 성경해석권을 독점한 교황청을 향해 교황은 성경의 권위 위에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의 표준이며 교황 제도와 권위는 성경상 전혀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성체성사의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체적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미신행위에 불과 하다고 비판했다. 교황청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다, 위클리프는 교황청이 성경을 독점하고 라틴어 이외에는 그 어떤 문자로 해석하거나 쓸 수 없게 한 것에 반발하여 누구라도 대중은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성경 말씀을 세계의 모든 언어로 번역하여 성도들이 직접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의 문을 열은 단테가 신곡을 토스카나어로 집필한 것은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대중이 읽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였다. 르네상스의 지식의 확장, 지식의 혁명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존 위클리프는 영어성경을 번역하며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성경이야말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 줄 것이다. (This Bible is for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and for the people.)” 너무나 익숙한 문구(文句)일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이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전몰장병들을 추념하여 행한 연설 중에 그대로 인용한 문구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와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주권재민(主權在民)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문구이다. 위 문구를 인용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영어 연설 중 가장 위대한 연설로 꼽히고 있다. 위클리프의 성경번역은 물론이고 번역 된 성경만 소지하여도 화형에 처하는 시대였다. 당시 위클리프를 따르는 중하층민들이 모여 위클리프의 복음을 전하려는 롤라드파(Lollardry, Lollardism)가 생겨난다, 그들은 영어성경을 소지할 수 없어 성경을 쪽본으로 쪼개 소지하고 다녔고, 그 조차 위험하여 쪽본 성경을 외우고 다녔다. 외운 성경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길거리에서도 중얼 거렸다. 그 모습을 네덜란드어로 표현하여 롤라드(lollaerd) 즉, 중얼거리는자 라고 불렀다. 중하층민의 롤라드파를 가난한 사제들로 불렸다. 그들은 영국 시골로 파고들어 영어 설교를 하고 다녔다. 라틴어로 집전 되는 중세 교회에서 농민과 국민은 설교내용을 알 수 없었고, 성경내용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롤라드파는 영어 연설을 통해 성경 속의 가르침을 원전 그대로 전해주며 농민들의 영성을 깨웠다. 롤라드파는 위클리프의 교황청 비판을 전했고, 이러한 교황청에 대한 롤라드파의 공개비판으로 대중에게 교황청의 민낮이 그대로 드러났다. 또한 그들은 성경 위에 서있는 교황을 버리고 오직 성경에 대한 믿음 만이 진리라고 전했다. 롤라드파는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설교했고 영국 국민 두 명 중 한명은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위클리프가 죽었어도 롤라드 운동은 더욱 활성화 되었고 이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위클리프가 죽은 44년 후 교황청은 그에게 24개의 죄를 뒤집어 씌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며 시체를 태웠다. 교황청은 그의 뼛가루는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그러나 그 뼛가루는 바다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흘러갔고 롤라드파 운동 역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르네상스 인문학의 최고의 지성 에라스무스는 롤라드파의 운동을 두고 “정복되었으나 소멸하지 않는 부흥운동”이라 했다. 롤라드파의 운동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면 많은 영향을 미쳤고, 청교도운동에도 영향을 주어 미국의 건국정신(建國情神)으로 이어진다. 롤라드파의 카톨릭 사제 존 볼은 영국 전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연설했다. "아담이 쟁기질하고 이브가 물레를 돌렸을 때, 신사는 누구였습니까? 태초부터 모든 사람은 본성상 동일하게 창조되었으며, 우리의 속박과 예속은 못된 사람들의 부당한 억압으로 말미암아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종을 두셨더라면, 종 될 자와 자유민을 정하셨을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여러분이 원한다면 속박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자유를 회복할 수 있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때가 왔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권고합니다.“ 존 볼의 설교는 인두세에 신음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영성을 깨웠다. 잉글랜드 남쪽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농민봉기에 리처드 2세가 피난할 정도로 영국을 흔들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다시는 인두세를 걷지 못하였고 급격하게 농노제(農奴制)가 쇠락하며 사라졌다. 존볼은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지고 온몸이 4등분 되었지만 그가 남긴 자유와 평등은 근대 시민사회 출발을 재촉했다. “종교개혁의 아침의 별”이 된 존 위클리프는 르네상스기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최고의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지식(知識)은 확장 되어 대중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은 유럽 전역으로 퍼지며 마침내 종교개혁과 시민사회를 탄생시켰다. 영어 성경 번역은 윌리엄틴들이 이어 받아 교황청의 눈을 피하여 유럽 각지로 도망다니며 성경을 번역하다 네덜란드에서 교황청에 붙잡혀 화형을 당했다, 윌리엄 틴들의 성경번역은 완성 되지는 못했지만 영국의 제임스 1세가 그의 유업을 이어받아 자신이 임명한 학자들에게 지시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킹제임스성경을 만들었고 그 성경의 표현 70%를 윌리엄 틴들의 번역본에서 가져왔다. 영국 왕 리처드 2세가 보헤미아의 안나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많은 보헤미아의 학생들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와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배웠다. 그들은 조국과 프라하 대학으로 돌아가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을 전파했다. 또한, 안나 공주의 측근에게 전해진 위클리프의 쪽본 성경이 얀 후스에게 전달 되었다.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교회와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체코어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했다. 그는 성경번역으로 교황청에 의해 화형을 당했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또한, 얀 후스를 따르는 후스파(Hussites)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체코어 예배를 올렸다.
교황청의 벌게이트성경(불가타성경)은 4세기경 이에로니무스(영어명 제롬)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 된 교황청의 무오류의 성경이었다. 벌게이트 성경에 쓰여진대로 미켈란 첼로는 모세의 머리에 뿔이 돋아 난 조각상을 만들었다. 즉, 최초로 쓰여진 그리스어 신약성경에는 출애굽기 34장에 모세는 십계명을 받고 시내산에서 내려 올 때 얼굴에 광채(광배, 헤일로)가 났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불가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이에로니무스는 광채와 어근이 비슷한 뿔로 오역하여 모세의 머리에 뿔이 나 있었다라고 번역 된 것이다. 르네상스 최고의 인문학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카톨릭 사제 이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번역하며 교황청에서 1000년 이상 사용한 벌게이트 성경의 중대한 오역들을 밝혀낸다, 교황청 권력의 상징인 성체성사 등의 의례, 면죄부 판매, 축일, 단식 등은 그 어떠한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밝혔다, 그중 교황청과 카톨릭 성직자의 권위에 치명적 타격을 주는 고해성사(告解聖事)의 번역이 잘 못 되었음을 밝혀낸다.
벌게이트성경 마태복음 4장 17절에 쓰여진 세례자 요한이 세상을 향해 외친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라”를 “고해성사 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왔느니라”를 오역한 것이다. 고해성사(告解聖事)는 카톨릭 성직자에게 고해(회개, 참회, 고백, 용서, 화해) 함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지은 죄를 용서받는 권능은 교황청 권위의 상징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죄사함은 신의 영역이며 신의 권능을 탐한 것이다. 인문학의 이성, 합리적 과학적 사고는 교황청의 전근대성을 공격하며 맹렬히 도전했고, 코페르니쿠스, 에라스무스와 같은 카톨릭 사제, 뉴턴과 같은 신학자 등이 최고의 인문학자, 과학자가 되어 르네상스를 주도하며 그들에 의해 교황청의 민낮이 드러난 것은 인문학은 어쩌면 신의 선물이었다. 종교개혁의 심장이었던 마틴 루터와 존 칼뱅은 가장 실천적인 인문학인 법학(法學)을 공부한 인문학자들 이였다,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성경에 근거 없는 성례를 성경화하는 해석은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동원 되었고 천동설은 교황청의 권위를 위해 필요하였을 것이다. 천동설은 교황청을 짓는 벽돌이 되었고, 성체성사는 교황청의 뼈대가 되었으며, 고해성사는 교황청의 지붕이 되었다. 개혁교회(改革敎會, Reformed Church) 운동은 너무나 단순했다. 성경이 대중에게 읽힘으로서 성경에 따른 신앙생활과 권위를 찾는 운동이었을 뿐이다. 성경에 잘못 붙은 인문학을 떼어냄으로서 성경(聖經)의 신성(神性)을 회복하는 운동이 종교개혁이었다. 그 종교개혁이 오늘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로 이행 될 수 있게 길을 내려는 시간이 르네상스였다. 그 르네상스의 시작은 그리스-로마의 고전(古典)을 마중물 삼은 복고주의(復古主義, revivalism)였으며 그 복고주의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냈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복고주의를 통한 진보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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