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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선택(7) - 르네상스 - revivalism(1) |
작성자: 정문 |
조회: 4383 등록일: 2024-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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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주자(朱子)가 태어난지 125년 후 이탈리아에서 단테가 태어난다. 단테는 신곡(神曲)을 써서 르네상스의 문을 열고 있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언제나 현대사회와 연결되는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혁신과 혁명, 진보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다. 인간성(人間性) 회복의 시대, 이성(理性)의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아름다운 건축이 이는 예술의 시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낭만이 넘치는 복고주의(復古主義, revivalism) 시대, 영혼의 갈증을 적시려 한 철학과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 시대, 과학의 시대 등 르네상스의 수식어(修飾語)는 진보(進步)와 긍정, 아름다움과 자유의 상징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폭발적 성장을 하는 것을 “~~의00의 르네상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에 반하여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부른다. 종교의 권위에 짓눌려 인간본성이 탄압 받던 시대, 마녀사냥과 같은 종교적 살인으로 공포통치가 이루어지던 시대,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으로 죽이려 한 이성과 과학이 부재한 반문명의 시대 등 항상 르네상스의 반대에 서있는 부정적인 시대로 비추어진다.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에 이름을 날린 인문학자, 예술가, 철학자 등은 넘쳐난다. 그 시대를 견인한 그 지식인들은 메이지 유신을 이끈 지사(志士)들처럼 역사적 사명과 의식을 가지고 그 시대를 견인하거나 또는 동질의 목표를 가지고 활동 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대에 대한 지배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분야 어느 시기에 유행(流行)한 어떠한 사조(思潮) 정도는 어느시대에더 찾아 볼 수 있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시대이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가 돋보여 보이는 것일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 대기근과 흑사병이 유행하며 유럽 인구의 절반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으며, 이슬람 해적단은 유럽을 노략질 하여 매년 수십만명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고,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간 전쟁을 벌렸고, 각지에서 벌어지는 마녀사냥 속에 면벌부 판매 되고, 군지휘관에게 교황이 빰따구를 맞고 병사에게 끌려가 구금 당하고, 한 때는 동시에 3명의 교황이 활동하기도 했으머,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되면서 1000년제국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르네상스를 견인한 역사는 좋은 기억 보다 질(質)과 양(量)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이 압도했던 시대이다. 굶주림과 아사, 좌절, 대량학살, 전쟁, 전염병, 종교의 혹세무민(惑世誣民), 성직자의 타락 등 역사의 어느시대 보다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시대이다. 르네상스는 화려하고 진보한 역사가 아니다. 그 고통스럽고 암울했던 시대를 헤쳐온 지혜의 시대이다. 르네상스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그 시대가 한참 지난 후 몇몇의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불려지다 19세기에 스위스의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비로서 그 시대를 “르네상스”라고 확정 된다. 그러나 요한 하위징어는 르네상스 시대를 “중세의 가을” 쯤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요한 하위징어의 기록에 동의한다. 왜냐면 조선시대를 추동(推動)한 성리학(性理學)은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시대에 살던 최소한 마을에서 말발이라도 세울 수 있는 비배 계층 소위, 그 시대 어느 양반(兩班)에게 물어 보아도 그는 분명하게 “나는 주자(朱子)의 이데올로기가 작동(作動)하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살고 있는 양반이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겠지만 르네상스 시대 지배계층은 자신이 르네상스의 문예부흥 시대를 살아 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 또는 중세의 가을에 그 시대를 추동한 선명한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없다. 또한, 그 시대를 살았던 지배층에게 직접 물어 보아도 르네상스 정신은 이런 것이다 라는 인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시대를 지배한 카톨릭의 종교적 신념을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여전히 교황청이 시대를 추동한 본산(本山)이라면 르네상스가 아니라 중세시대(中世時代)일 뿐이다. 르네상스는 그 시대를 표현하는 고유명사화 되어 달리 쓸 수 있는 말도 딱히 없다. 용어가 생겨난 것이 반교회주의를 표방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생겨났고 특히,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19세기 이후 고유명사화 되었다. 이성과 휴머니즘, 반교회주의로 대표 되는 계몽주의자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인문학에 뿌리를 두기에는 전근대적이고 마땅히 찾은 것이 르네상스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중세시대를 닫고 르네상스 시대를 추동하였다는 가설의 동력원을 휴머니즘으로 삼기에도 옹색한 것이 현실이다. 르네상스시대 또는 중세의 가을이 열린 것은 교회권위의 추락에서 시작 된다. 교황청의 권력이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던 11세기에 카놋사의 굴욕 즉, 신성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교황 앞에 3일간의 석고대죄를 올린 교황청의 시대도 있었다. 교황청의 시대 시작 된 십자군 원정은 로마 교황의 권위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200여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교황청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전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결과를 가져오게 되면서 십자군 원정 실패는 교황 권위를 수직낙하시켰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 내 성직자 임명으로부터 교황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교회 및 수도원 과세, 교회 재산의 교황청 유출을 막으려 했다. 이에 맞선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면을 하려고 하였지만 발빠르게 움직인 필리프 4세는 아나니에 있는 교황 별장에 군대와 시욘나 콜로나를 보내 강금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저항하는 과정에서 시욘나 콜로나에게 뺨을 얻어맞고 군인에게 질질 끌려가 강금 당하는 치욕을 당한다. 그 충격으로 교황은 한달 후 사망했다.
황제까지 쫒석고대죄를 올려야 했던 교황의 권위가 왕이 보낸 일개 장수에게 뺨을 맞는 신세로 전락한 교황의 자리를 필리프 4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죽은 후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임명하며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랑스 리옹에서 교황으로 즉위 시켰다. 어용(御用)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아예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버린다. 사실상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해득실에 따라 파벌이 갈린 교황청은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렸고 파벌 간 교황을 따로 임명하면서 한 때 세명의 교황이 난립하며 교황의 권위는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몇 년 후 터진 유럽의 대기근으로 수천만명이 굶어 죽었고 이어 전세계를 공포에 몰아 넣은 흑사병의 대유행은 유럽의 인구 절반이 사라지는 미증유의 재앙으로 덮쳤다. 흑사병의 유행은 유럽에 한정 된 문제는 아니었다. 흑사병의 발원지로 알려진 중국의 원나라 또한 인구 30%가 사라졌고 이집트에서는 40%가 사라졌다. 원나라 멸망의 원인을 흑사병에서 찾을 정도로 흑사병은 세계를 공포로 몰아 넣었다. 게다가, 흑사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실크로드가 막히면서 경제는 마비 되었다. 길거리에 시체가 쌓이고 죽어 나갈 때 교황청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공포에 질린 군중에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사제들의 공동생활 및 잦은 접촉으로 더 많은 흑사병 사망자가 발생했다. 흑사병에 속절 없이 무너지는 유럽사회의 절망은 대중들을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몰아 넣었고 흑사병을 하나님의 분노라고 생각하였다.
대중은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채찍을 들고 거리를 나와 자신을 때렸다. 이탈리아에서 시작 된 채찍질 고행은 삽시간에 독일 등으로 퍼졌다. 고깔을 쓰고 십자가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했고 광장에 모여 천사의 편지를 읽으며 선혈낭자 한 채찍질이 이어졌다. 광장은 피로 물들었고 피가 묻은 옷조각을 붙들고 기도 했다, 견딜수 없는 흑사병의 공포는 급기야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하여 자해가 동원되었고, 그리스신화 술의 신 디오니소스(박카스)의 제사를 위해 올려지는 제물처럼 하나님의 제물을 자처했다. 유럽은 절망의 도가니가 되었다. 흑사병이 지나간 참상은 끔찍했다. 유럽 인구는 절반 가까이 줄었고 인력부족으로 인건비가 치솟았다. 치솟는 인건비를 잡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임금을 규제하였고, 사악한 군주는 가혹하게 세금을 걷어 들였고 농민들은 혹독한 세금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려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이 넘도록 전쟁을 벌렸다. 견디다 못한 프랑스와 영국의 농민은 자크리의 난과 와트 타일러의 난이 휩쓸었고 북쪽의 스웨덴까지 농민봉기가 일어나 봉건제도는 위기를 맞는다.
흑사병으로 인구 절반이 죽고 그 후유증 극복에 매달릴 때 유럽을 지탱해온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니노플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침공을 받는다. 오스만의 술탄 메메드2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성용 대포를 동원했다. 거대한 대포는 포의 길이는 8m가 넘고, 직경은 75cm, 544 kg의 포탄을 1.6 km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포를 운반하는 데는 병력 200명과 황소 60마리가 필요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 침입자들은 서쪽 방면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었다, 서쪽을 둘러싼 성벽은 재래식 성곽 요새의 극치였다. 422년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쌓은 뒤 난곡불락의 철옹성으로 1000년 동안 누구도 함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이 개국하고 60년이 지난 후 술탄 메메드2세는 거포를 동원하여 콘스탄니노플의 철옹성 성벽을 무너뜨렸고 천년의 제국 동로마제국은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했다. 콘스탄니노폴이 함락되기 1년전 1452년 헝가리 대포 기술자 우르반(Urban)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찾았다. 자신의 거포 제작을 제의 하였으나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우르반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메메드 2세를 찾아 4배를 받고 거포를 팔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대마도 도주가 가져다 준 조총을 창고에 처박은 조선의 어리석음 이었다.
유럽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거포가 천년제국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메메드2세의 정복은 계속되며 발칸 반도까지 점령 한다. 메메드2세는 유럽 턱밑까지 진출했고, 유럽은 자존심이 무너졌고 이교도의 침공에 떨어야 했다. 굶주림과 흑사병, 전쟁과 반란의 혼란 속에 교회는 타락했고 탐욕스러웠으며 군주의 폭정과 가렴주구에 유럽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유럽에 불어닥친 사상 초유의 재앙의 연속은 유럽 사회를 인구학적인 붕괴(demographic collapse), 정치적 불안정(political instabilities), 종교적 격변(religious upheavals)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들은 무엇인가 희망을 찾고 싶었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 단테는 세익스피어와 르네상스 문학을 양분했다. 그는 11년에 걸쳐 대작(大作) 신곡(神曲)을 썼다. 단테는 문학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신념에 따라 이탈리아 토스카나 방언으로 쓰여진 신곡은 이탈리어 생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이탈리어의 아버지로 불린다. 당시 유럽의 권력은 라틴어에서 나왔다. 라틴어 성경을 통해 유럽의 문화 헤게모니를 잡은 교황청은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면 화형(火刑)에 처했다. 교황청은 문자와 지식을 독점하고 대중은 무지하게 만들었다, 토스카나 방언으로 쓰여진 단테의 신곡을 읽는 대중은 교황청에 대한 도전이었다. 단테의 신곡은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젊은 시절 짝사랑했던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아 사후세계를 여행하며 시작되며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중심으로 서구의 기독교 문명을 집대성한 문학작품이다. 작품 속에는 그리스 신화가 동원되고 지옥에 떨어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도 등장하는 등 종교, 철학, 역사, 자연 과학이 망라되며 인간 삶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지식을 다룬다. 또 다른 그의 저서 군주정체론을 통해 교황의 모든 세속적 권력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테는 타락한 교황청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교황청은 1908년까지 단테의 신곡을 교황청 금서로 지정 했다. 단테의 신곡과 교황청과 사회에 대한 비판은 많은 이탈리아 작가에 영향을 주었다. 보카치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이야기를 구성하여 이탈리아어로 데카메론을 썼고 흑사병의 공포에 떨고 있는 현실 속에 수도사와 마을여자의 불륜, 유부남과 유부녀들의 불륜 등의 성적타락 및 탐욕스런 교황청과 세태를 공격했다. 광대한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후 큰아들인 아르카디우스에게 동(東)로마제국을 물려 주었고,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에게는 서로마제국을 물려 주었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은 훈족의 대이동으로 게르만족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되면서 서로마제국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70년만에 멸망을 당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사라센제국 메메드2세에게 콘스탄티노풀이 함락 당할 때까지 1,000년을 이었다.
피렌체공국을 지배한 메디치 가문을 이어 받은 코시모는 사후(死後) 피렌체 공화국의 국부 추앙되는 법령까지 제정될 정도로 피렌체공화국의 지배자였다. 뛰어난 외교력을 갖추었고 정치력 또한 갖추어 빈민에게 막대한 기부를 하여 민심도 얻었다, 교황 피우스 2세는 피렌체의 “정치문제는 코지모의 집에서 논의되었고, 코지모가 관리를 임명하고, 전쟁과 평화의 여부를 결정했다” 라고 했다. 피렌체에서 코시모의 권력과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동서로 갈라진 교회 통합을 위하여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를 피렌체로 불러들여 공의회를 개최할 정도로 국제적인 영향력도 상당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저술 중 하나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메디치 가문의 조언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코시모는 풍부한 교양을 갖추었고, 독일어와 프랑스어, 라틴어와 히브리어, 그리스어와 라틴어까지 구사 했다. 게다가 사업수완까지 뛰어났다. 10개 도시에 메디치은행을 설립하고 로마 교황청 전담은행으로 막대한 부를 축척하며 유럽 최대의 은행가가 되었다. 또한 양모와 비단업을 장악했고, 직물제조 및 염색에 필요한 백반까지 독점하여 메디치 가문은 유럽 최고의 부자였다. 코시모는 자신의 막대한 부를 예술과 학문에 후원하여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그리스-로마 문명에 매료 된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 코시모는 자신의 도서관을 만들어 유럽, 근동에 사람을 보내 그리스, 로마 시대의 희귀본, 귀중본, 원고들을 사들였다. 예술가에 막대한 후원을 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을 이꿀었으며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은 그의 도움으로 제작 된 것이다. 그리스-로마 고전에 매료 된 코시모는 특히 플라톤에 심취했고 코시모는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 플라톤의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저술에서 따와 정신적 사랑을 의미하는 “플라토닉 러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인문학자이다. 코시모는 피치노에게 플라톤 연구기관을 만들게 하여 플라톤 아카데미가 세워졌다. 코시모는 피치노에게 연구자금을 주었고 연구할 수 있는 별까지 제공하여 플라톤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도록 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크리솔로라스는 라틴어가 지배하는 서유럽에 그리스 문학을 소개하고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그는 피렌체에서 그리스어 교수로 일하였고, 밀라노, 비비아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또한, 서유럽의 영국·프랑스 등을 방문하여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어 문법”을 간행하여 서유럽의 그리스어 교과서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베로나는 크라솔로라스 공부하며 그리스어를 배웠고,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하며 이탈리아로 돌아온 베로나는 서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플라톤의 저작을 비롯한 54권의 그리스 고전 필사본을 가져왔다. 1423년에는 조반니 아우리스파는 혼자서 238권이나 되는 그리스 고전 필사본을 서유럽에 전해준다. 그에 의해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투키디데스 등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었고 모두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에서 플라톤을 비롯한 수많은 극작가와 역사가들이 쓴 그리스 고전의 대부분을 구해볼 수 있게 되었다. 1438년, 피렌체에서 코시모는 동-서교회의 통합을 위한 공의회를 개최했고 콘스탄티노플의 지식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동서 교회의 통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콘스탄티노플 지식인들은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그들이 가지고 온 그리스 고전의 필사본은 서유럽의 문예부흥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되면서 대대적인 피난민이 서유럽으로 몰려들며 그들의 보따리 속에서 담긴 많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자료들이 서유럽에 전달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망명한 그리스 인문학자들은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로 몰려 들었다.
유럽의 이교도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충격은 그리스-로마를 살려내는 복고주의(復古主義, revivalism) 길을 걷게 했다. 지식사회를 이끌었던 라틴어를 대신하여 그리스어가 쓰였고 그리스-로마 고전이 번역되고 연구되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미술과 조각, 건축이 유행했다. 중세 주류를 이루고 있는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 신학에 바탕을 두고 인식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하여 이성 또한 신의 영역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세를 흔든 재앙과 죽음의 골짜기에 교황청은 무기력했고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죽음과 맞서려는 르네상스시기 대안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을 불러냈다. 그리스 철학과, 과학, 형이상학, 논리학, 도덕학이는 복고주의(復古主義, revivalism)를 이끌었다. 그 복고주의가 발견한 인간의 이성은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 발전을 가속화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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