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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법화경은 물과 기름처럼 다른 것이다. |
작성자: 정문 |
조회: 2992 등록일: 2024-0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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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불교에 등 돌리게 된 것은 대략 10년 쯤 되는 것 같다. 대략 30년 이상은 절간에 다녔었는데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과거에 얽매이는 퇴행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전생에 의해 현생이 결정되고 현생에 의해 다음생이 결정 되는 순환론적 운명론과 세계관이 싫었다. 불경에 쓰인데로 그 기준에 따라 선업(先業)을 쌓아 윤회의 사슬을 끊고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데 지구 80억 인구 중에 단 한명도 없다는 것에 내 오른 손모가지 걸 수 있다. 역사적으로 신화속 인물은 제외하고 부처가 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왼쪽 손모가지도 걸겠다. 대승불교를 창시한 용수보살은 전생에 개미 한 마리 낫으로 처죽인 업보로 인해 그 업보를 받기 위하여 죽을 때 담담히 칼을 받고 죽었다. 물론 신앙적으로 교훈을 주기 위하여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개미한마리 죽인 것도 죄가 되어 죽어야 하는데 인간은 극락에 갈 수 없는 존재라고 못 박는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개미 한 마리 안죽인 사람이 어디 있으며, 삼겹살 한저름 안 먹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또한, 어느순간 스님과 무당들이 법률문제로 찾아오면 그들과 상담하면서 하수구에 처박힌 쓰레기 수준의 도덕성과 인성에 질려 버렸었다. 신용불량 아닌 사람이 없었고, 전과자에, 죄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거나, 어디서 배워 처먹었는지 개쩌는 권위의식에 질려 버렸었다. 마치 자신이 신(神)이라도 되었는양 알수 없는 권위의식에 쩔은 그들의 정신세계도 황폐화 된 그 자체였다. 돈 많은 과부 겁주어서 재산을 탈취한 경우도 있고, 개인돈으로 차린 개인사찰을 조계종이 빼앗게다고 몇년간 송사가 벌어지는 일은 흔한일이다. 지독하게 타락한 불교 자체도 싫었다. 불교계의 타락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어느 절간이든 신도들 상대로 점치고 앉아 있고, 천도제와 백중제로 철장사를 하며 무당도 천수경 독송하며 작두 차는 것이 현실이다. 결혼해서 남몰래 가정을 꾸리는고 있는 스님은 애교 수준이다. 그럴려면 차라리 대처승제도를 도입이나 하지 할 짓 다하고 고상떠는 것에 질려 버렸다. 석가모니가 기존의 힌두교에 가장 반발 한 것이 두가지다. 첫 번째는 브라만의 제사를 주관하며 카스트 제도의 최상위 계급으로 온갖 못된 짓을 하는 것과 전생의 공덕으로 내세에 고귀한 계급으로 다시 태어 난다는 윤회였다. 개인적으로 정말 웃겼던 것은 모든 것 다 내려 놓고 무념 무상으로 살며 번뇌를 끊으라고 하면서 돈 털어서 시주 많이 하고 불사일으키고, 돈 많이 벌어 남 도와 주면 내세에 좋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난다며 논리는 떠 뭐란 말인가. 현생은 내려 놓고 살고 다음생은 고관대작으로 태어나 잘먹고 잘살라는 논리가 기가 막힐 뿐이다. 돈버는 것은 남을 아프게 하는 것이니 돈벌려 하지 말고 다 내려 놓고 살라면서 내세의 좋은 계급으로 태어나서 죄지으라는 것인지 그 이율배반 적인 논리를 30년간은 고민 했던 것 같다. 석가는 캬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요즘으로 따진다면 다이아몬드 수저이다. 그런데 석가 보다 높은 계급이 있다. 힌두교에서 제사 행위를 주관하는 브라만 계급이다. 성경으로 따진 다면 레위지파이다. 브라만은 제사행위를 주관한다는 이유만으로 왕족 보다 높은 계급으로 군림하며 온갖 특혜와 권력을 누렸다. 세월이 갈수록 제사 행위는 화려해지고 규모가 커졌고 그에 따라 브라만의 권력은 커져만 갔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백성을 핍박했다, 브라만의 커지는 권력은 곧 백성의 착취로 이어졌을 것이다. 또한 전생에 선업을 쌓아 브라만이 된 그들은 뭔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석가는 브라만의 횡포와 제사를 비판하며 제례 행위를 중단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석가는 당시 가장 타락하고 돈에 눈이 멀은 브라만 권력의 창고인 윤회와 제사에 대하여 정면 대결을 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절간에서 백중제니 천도제니 돈 긁어 모을려고 환장하는것은 정면으로 이단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새겨 보면 토씨하나 빼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이단이다. 얼마전 허경영이 대승불교에 대하여 강의하는 것을 유투브에서 보았다. 허경영은 사기꾼으로 알고 있기에 관심 조차 없다. 다만, 지나가는 영상에 대승불교를 강의하면서 사기치는 것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근본불교인 소승불교가 인도에서 힌두교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면서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 대승불교를 창시했다는 것이다. 아이큐 430에 공중부양까지 한다는 허경영의 개무식이 그냥 뽀록 난 것이다. 단언하건데 허경영은 불교의 역사에 대하여 첫페이지도 읽지 않았다. 실존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달마대사는 선불교(禪佛敎)는 소승불교계열이다. 개인적 수행을 통해 해탈을 하는 것은 전형적인 소승불교이며 특히 수행 방법으로 좌선이나 참선을 주된 방법으로 삼고 있어 이 또한 전형적인 소승불교의 영역이다. 선불교에서는 부처가 되려 하지 않고 윤회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아라한(阿羅漢, 나한)이 수행의 목표이다. 소승불교 수행의 최종 목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다만,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대승불교의 범주에 포함 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부처가 금기시한 윤회와 제사를 살려 낸 것이 나가르주나의 대승불교이다. 나가르주나가 생존한 시기는 150년에서 250년 사이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여 창시 된 대승불교의 분파가 유식불교도 생겨났고 중국으로 건너와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 되어 그 곳의 주류 불교가 되었다. 반야경과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을 주요경전으로 쓰고 있다. 특히 법화경은 나가르주나가 활동하던 시기 또는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보다 나중에 쓰여졌다. 따라서 1세기에 쓰여진 법화경을 예수님이 공부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으며 더구나 티벳에서 불교를 공부했다는 것은 더욱 황당한 논리이다. 티벳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대략 4세기 또는 그 이후로 보고 있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티벳으로 전래 되어 두가지 불교가 대립하게 되자 당시 왕이 인도불교 대표와 중국불교 대표를 모아 놓고 맞장 토론을 하여 인도불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며 토착화 과정에서 라마교가 된다. 라마교 또한 대승불교의 일파이며, 달라이 라마의 환생에서 보듯이 철저하게 윤회설을 따른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스님들이 염주를 돌리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또는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 주문을 한다. 티비 드라마에서도 항상 나오는 주문이라 익숙할 것이다. 전형적인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주문이다. 나무(南無)는 귀의 한다는 뜻으로 타력으로 해탈을 원하는 중생을 구원하는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에 귀의 합니다라는 뜻이다. 법화경은 대승불교를 떠받드는 경전이다. 법화경의 주인은 석가모니가 아니고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다.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을 줄인 말로서 경전의 핵심은 일불승(一佛乘) 사상이다. 모든 중생(衆生)과 일체(一切)의 것 모두가 부처와 함께 성불한다는 뜻이다. 공부 또는 수행을 통해 개인의 자력으로 부처가 되는 자력문(自力問)이 아니라, 부처나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베푸는 원력 (願力)으로 부처가 된다는 타력문(他力門)이다. 원력을 베푸는 것은 아미타불(미륵불, 彌勒佛)과 관세음보살의 가피력(加被力)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무아미타불과 나무관세음보살을 주문으로 외는 것이며 관세음보살만 주문으로 외워도 부처가 된다고 가르친다. 법화경은 억천만겁(1겁(劫)은 1,000년에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로 큰 바위에 구멍을 내는 정도의 시간) 전에 석가모니는 부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땅에 다시 와서 땅위의 부처가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법화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자력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 다만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미타부처와 관세음 보살의 도움을 받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법화경에서 부처에 이르는 3가지 길(3乘)을 제시하고 있다.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 그것이다. 성문승은 선지식들의 말씀이라고 하는 경전, 계율, 논서에 의해 깨달음을 통해 아라한(阿羅漢, 나한이라고도 한다- 소림사의 그 나한이다)이 되는 길이다. 아라한은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 부처 바로 밑의 경지에 이른 준 부처이다. 다음은 연각승은 인간이 가진 욕망을 끊음으로서 부처에 이르는 길이다. 법화경에서는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숭불교의 수행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출가자 등 전문 수행자만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승불교 이외에 수행하지 않는 일반 중생을 위해 보살승을 마련하여 잘못된 욕망을 끊고, 이타심을 가지고 남을 도우며 아아미타불이나 또는 관세음보살을 통해 부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 교리이다. 대승불교에는 수많은 부처가 있다. 아미타불은 석가모니불의 스승이라고 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부처로 일컬어진다. 부처에는 수많은 부처와 보살이 있다. 보살도 사실상 부처인 준부처이다. 오직 지구에만 온 석가모니부처 이외에도 우주에는 셀 수 없는 부처가 있어 중생을 구원한다는 다방불(多方佛)이 존재하고 있어 사실상 대승불교는 다신교로 보아도 무방하다. 아함경과 팔리어 경전 등이 소승불교의 경전이며 법화경, 화엄경, 반야경과 같경전이 대승불교이며 서로 공유하는 경전은 아함경 정도이고 그것도 극히 일부만 대승불교에서 논해질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아함경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따라서극단적으로 석가모니의 소승불교와 나가르주나의 대승불교는 다른종교라고 까지 하고 있다. 소승불교왕국이었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은 너도 나도 부처의 제자이고 말씀이라며 황색옷을 입고 혹세무민하여 3만명의 이단자를 내 내쫓은 적이 있었다. 그만큼 불교의 교리는 난해하며 목표가 불분명하다. 우리나라 사이비 종교와 무당들에게 불교 교리를 차용하여 혹세무민하는 하는 것이 대부분일 정도로 불교의 교리는 선명성에 있어 취약하다. 더욱이 법화경은 선명성이 극단적으로 취약하다. 일본의 일련종에서 법화경의 제목 ”묘법연화경에 귀의합니다“라고 주문으로 외우고 있는 것이 남녀호랑교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이다. 정식명칙은 창가학회이다. 그만큼 법화경은 해석하기 나름으로 모든 종교의 교리에 녹아들 수 있도록 불교를 대중화 정치화 하기 위하여 만든 경전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돈과 국력을 쏟아 부어 팔만대장경을 만든 호국불교는 정치성이 강한 대승불교였기에 가능했다. 즉 개인의 해탈을 사회적 해탈로 이념화가 가능한 것이 대승불교이며 소승불교는 정치화가 되지 못하는 한계 때문에 번성하지 못한 것이다. 묘법연화경의 탄력성은 이슬람세계 가서 코란화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분파이며 다신교로서 불교의 가면을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체사상이 막시즘과 유교, 성경을 혼합하여 인류사에 영원히 남을 악한 사기질이 벌어지고 있듯 종교와 종교, 종교와 사상, 사상과 사상의 융합은 언제나 악질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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