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호전적인 흉노(匈奴)는 가장 두려운 존재였고 추수철만 되면 국경을 넘어와 약탈(掠奪)을 일삼았다. 진시황의 가장 큰 골칫거리 이자 두려움이었다, 진시황 즉위 8년 후 흉노족을 정벌(征伐)하고 기분이 좋아져 박사(博士) 70명 을 모아 놓고 연회를 열었다.
정복전쟁의 승리(勝利)에 도취 된 진시황은 천하통일(天下統一) 후 분봉제(分封制)를 폐하고 군현제(郡縣制) 실시와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가 정착 되어가면서 권력기반이 공고해 지는 것을 자축(自祝)하는 자리였다.
한껏 흥취가 오른 진시황에 주청신(周靑臣)은 축하(祝賀) 하고 있다.
“영명하신 폐하께서는 6개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지금 또 흉노와 백월을 정복하셨는데, 특히 폐하께서 제후에게 분봉하는 것을 취소하고, 군현제를 설치하여 화근을 제거해서, 백성들은 즐거이 생업에 종사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폐하의 공덕은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청신의 축하에 잔뜩 불만(不滿)이 쌓인 유가(儒家) 순우월은 체제에 대한 불만을 쏟아 놓았다. 이는 진시황의 군현제(郡縣制)를 통한 중앙집권(中央集權)에 대한 불만이었고 국가 정체성(正體性)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이 듣기로는 상나라와 주나라 두 왕조가 1천여 년을 내려 온 것은, 모두 제후(諸侯)들에게 분봉(分封)해 주어 보좌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천하를 얻고도 자제들에게는 봉지를 주지 않았으니, 만일 난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려는 신하가 출현하게 되면, 누가 있어 도와줄 것입니까? 주청신은 아첨으로 떠받들며 폐하의 잘못을 더하게 하고 있으니, 충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과 같이 천하통일의 대업(大業)을 일군 승상(丞相) 이사는 진나라의 국가 정체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순우월의 발언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순우월을 논박(論駁)했다.
"봉건시대(封建時代)에는 제후들 간에 전쟁이 끊이질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이 되었고, 법령(法令)도 일괄적으로 한 곳에서 발령되어 사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다고 생각해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 비방(誹謗)하는 선비들이 있습니다. 하오니 백성(百姓)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 복서, 종수(농업)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법가(法家)의 적통(嫡統)을 자처하는 승상 이사는 순자(荀子)의 제자로서 순자는 맹자와 같이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대표주자(代表走者)로서 치열(熾烈)하게 경쟁한 사이였고, 순자의 법가(法家)는 맹자의 유가(儒家)를 물리치고 법가의 적통을 자처하는 이사가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을 도와 천하통일(天下統一)의 대업을 이루었다.
따라서 순우월이 국가 최고지도자 앞에서 국가 정체성과 이념을 앞세운 것은 헤게모니 쟁탈전(爭奪戰)을 의미했고, 기득권(旣得權)에 도전(挑戰)이며, 권력투쟁(權力鬪爭)을 예고(豫告) 하고 있다,
이사가 지적하고 있는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다고 생각해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 비방(誹謗)하는 선비“는 정확하게 유가(儒家)를 지목하고 있다.
이사가 지적한 옛 책은 유교 경서(經書)이며, 순우월의 국가모델은 주(周)나라였다. 공자가 이상향(理想鄕)으로 삼은 군주는 삼황오제 전설 속의 요,순(堯舜)이며 이상국가(理想國家)는 주(周)나라 였다. 요순시대(堯舜時代)가 전설이 아니고 실존 했다면 그 시대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 추정 된다. 문자 조차 없는 석기시대의 요.순(堯舜) 임금이다. 공자의 요순 찬양(讚揚)은 논어태백(論語泰伯)편에 나온다
"위대하도다! 요의 임금됨이여! 높고 높도다! 오직 하늘만이 위대한데, 오직 요임금만이 그것을 본받았다. 은덕이 넓고 넓도다! 백성들이 무어라 칭송할 길이 없었다. 높고 높도다! 그 성공이 성대하도다! 빛나고 빛나도다! 그 예의 법도 문장이여(大哉,堯之為君也!巍巍乎!唯天為大,唯堯則之。蕩蕩乎!民無能名焉。巍巍乎!其有成功也;煥乎,其有文章!)“
요순왕의 집권시대(執權時代) 하늘을 본 받은 왕, 은덕(恩德)이 넓은 왕 일 뿐 추상적 수사(修辭)만 남아 있으며 그 시대 백성의 어떠한 것을 잘 살폈는지, 고달픔을 덜어 준 것이 무엇인지 위민(爲民)을 위한 구체적인 것은 없다. 공자의 넋두리 일뿐, 한 줄의 시에 불과할 뿐 역사기록(歷史記錄)의 가치는 없다.
공자의 이상국가 주(周)나라는 실재한다면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수렵시대(狩獵時代)를 끝내고 농업문명(農業文明)을 시작하는 부족국가(部族國家)에 불과할 뿐이다. 그 주나라를 추앙한다.
주나라는 하와 은상 2대의 제도와 전통을 본받아서 완벽하고 성대하다. 나는 주나라의 제도와 전통을 따를 것이다(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춘추전국시대를 제패한 진시황은 건국 후 흉노를 몰아내고 국경(國境)을 안정 시키고 과거부터 내려오고 있는 분권주의적 분봉제를 혁파(革罷)하고 중앙집권제와 법치를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지고 있을 때 순우월은 진시황의 잘못을 지적하고, 법가(法家)를 버리고 유가(儒家)로 이데올로기적 전향(轉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정체성(國家正體性)을 주(周)나라처럼 국가를 쪼개서 제후(諸侯)가 다스리는 분권(分權)적 분봉제(分封制)를 택하여 국가 시스템을 개혁(改革)하고. 헌법(憲法)의 전면개정(全面改定), 새로운 국정교과서(國定敎科書) 도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수우월은 수백년의 춘추전국시대를 평정(平定)하고 국가기틀을 다지는 진시황을 부정(否定)하는 것은 물론, 국가(國家)와 건국(建國)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 이념의 기반을 제공한 법가(法家)와 승상 이사에게 정면으로 도전(挑戰)하는 것이며, 법가를 넘어 권력쟁취(權力爭取)를 하겠다는 것을 예고(豫告)하고 있다.
순우월의 주장은 또한 과거(過去)로 회귀(回歸) 즉, 퇴행(退行)을 주장하고 있다, 최초로 중원통일(中元統一)의 대업을 이루고 법가(法家)를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秩序)를 열어 갈 때 천년전 낡은 이데올로기와 국가시스템을 근본(根本)으로 삼는 다는 것은 진시황으로서 받아 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법가(法家)의 슬로건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법가의 법통을 이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그 관중은 농업이 아닌 상공업(商工業)으로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매우 실전(實戰)적인 법가(法家)는 극심한 혼란을 수습한 통일왕조에 어울리는 이념이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나라 이념을 앞세운 순우월의 이념전(理念戰)에 진시황과 이사는 유가(儒家)의 경전을 불태우고 협서율(挾書律)을 제정하여 유가의 책을 소지 하지 못하도록 했다. 진시황과 이사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이념전에 대처(對處)한 것이다.
유가(儒家)의 철천지 원수(怨讎)가 되어 영원한 폭군(暴君)으로 남은 진시황은 중원대륙에 첫 왕조가 되어 이 후 통일왕조(統一王祖)가 번영하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겼다, 드넓은 중원대륙을 통일하여 거대한 영토에 통일왕조가 지속되는 것은 결토 쉬운 일이 아니다. 한반도 통일도 수백년간 분열하여 고려시대에 가능했고, 일본 열도는 도쿠가와 막부에 이르러 통합 되었고(다이묘, 分封制는 지속 됨), 유럽은 통합 된 적이 없었다. 유럽의 몇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통합 한 것은 중국의 위대한 업적(業績)을 남긴 것이다.
진시황의 중원통일(中原統一)과 국가 통치의 이념이 된 법가(法假)는 대륙의 통일왕조가 번성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중국인 특히 한족(漢族)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당(唐)나라가 안정적으로 대륙의 왕조시대를 열은 것은 진시황이 남긴 통일 된 땅과 법가의 산물이었다. 중국 최고의 태평성세(太平聖歲)로 일컬어 지는 정관의치(貞觀之治)는 법치(法治)인 율령제(律令制)의 확립으로 가능했다. 법치(法治)는 진시황에서 당(唐)나라까지 국가통치의 근본이 되었고 동북아에 국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진시황의 분서(焚書)로 인해 소실 된 유교 경전은 경전을 외운 수 많은 유가들에 의해 전승 되었고, 공자의 후손 집의 벽에서 경서(經書)가 쏟아져 나오는 등 분서갱유가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유방이 건국한 한(漢)나라 시대 유가(儒家)는 복원 된다.
한나라 때 유가(儒家)는 분서갱유로 인해 소실 된 경서를 복원하는 훈고학(訓詁學)이 발전한다. 즉, 공자에 대한 복고주의(復古主義,misoneism)가 유행(流行)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복고주의는 분서갱유로 인한 유가(儒家)의 복원 보다는 공자어록(孔子語錄)과 경서(經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한 연구였다. 중국 문자인 한자(漢字)를 중화어(中華語)라 부르지 않고 한(漢)나라 시대의 문자를 의미하는 漢字라고 부른다. 즉, 한자가 한(漢)나라 때 체계화(體系化) 되고 통일화(統一化) 됨으로서 국가어의 문자가 정립 된 것이다.
넓은 대륙의 수 많은 방언(方言)과 서로 다른 의미와 쓰임새에 한자(漢子)는 통일 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 따른 저마다 다른 유교 경서에 대한 해석(解釋)과 주해(注解)가 난립하면서 사실상 당나라 때까지 훈고학(訓詁學)은 유교 경전에 대한 주해와 해석을 통일화 하는 작업이었다,
공자의 이상향(理想鄕)은 주(周)나라였다. 그러나 주나라의 국립도서관장으로 있었던 노자(老子)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타라상에 반기들었고,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도가(道家)의 시조가 된다. 노자는 공자의 윤리철학(倫理哲學)을 비판했고, 존재론적(存在論的) 자아성찰(自我省察)을 통한 개인의 행복을 찾았다. 유가(儒家)의 절대적가치(絶對的價値) 추구에 비하여 상대적가치(相對的價値)를 추구하며 나라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며 국가권력(國家權力)이 비대하여지는 것을 경계(儆戒)하며 개인주의(個人主義)를 추구(追求)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로 대표되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노장사상(老莊思想)은 도교(道敎)로 신앙화(信仰化)되었다.
5호16국 시대를 평정한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를 지배한 철학적, 종교적 기반은 도교와 불교였다. 노장사상을 이어 받은 도교(道敎)는 다른 생각과 사상에도 유연(柔軟) 했다. 한나라 때 전래 된 불교(佛敎) 또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고 수백년에 걸쳐 중원(中原)에 토착화(土着化) 되면서 도교와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수(隋), 당(唐)시대를 이끈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유체이탈(幽體離脫)을 하여 자유롭게 육체를 바꾸었다는 소림사(少林寺)사의 면벽구년(面壁九年) 달마는 실존(實存)에 대하여는 개인적으로 회의적(懷疑的)이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중국식 대승불교로 만들어지면서 즉, 선불교(禪佛敎)가 생겨나며 도교와 불교의 융합을 상징하는 가공의 인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즉, 수당시대를 이끌었던 이념적 토대가 불교와 도교가 되면서 두 종교(宗敎)는 서로 간에 타협의 여지가 생겼던 것이다.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대변되는 당나라의 국력(國力)과 문화(文化)는 이전시대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성(强盛) 했다. 중국인들이 가장 국뽕스러워 하는 시대가 당나라 때이다. 당나라의 개방적 국가 운영은 마니교(摩尼敎), 배화교(拜火敎,(조로아트터교), 기독교의 일파인 경교(景敎,Nestorianism), 회회교(回回敎,이슬람교) 등이 전래 되어 시대적으로 사상과 철학을 풍성하게 했다. 당나라 시대 목판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며 출판이 늘고,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으로 대표되는 당나라 문학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고, 본격적으로 불경이 편찬 되어 보급 되면서 문화는 부흥했다.
유교(儒敎)는 한나라 때 불교가 전래 되고 도교가 유행하며 춘추전국시대부터 당나라 말기까지 주류에서 벗어난 마이너 (minor)로 만족했다, 그러나 훈고학(訓詁學)의 끈을 잡고 주류(主流)에서 벗어난 유가부흥(儒家復興)을 꿈꾸는 복고주의자(復古主義者, revivalist)로 살았다. 지금은 동양철학 하면 유교를 떠올리게 되었지만 유교는 송나라의 주희에 의해 신유학(新儒學)이 만들어지기까지 1,000년 이상 존재감 없는 학문의 영역에 만족한 것이다,
당나라는 강력한 군사력(軍事力)을 가진 나라였다. 호전적인 선비족의 핏줄을 이어 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당나라 개국세력은 강력한 군대를 두고 중원통일과 국가를 운영했다. 통일과정에서 군사적 능력만 있다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기용하였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흑치상지와 고선지는 장수로 이름을 날렸다. 본격적인 나라의 기반을 다진 당(唐)고조(高祖)의 아들 이세민(당태종)은 무인(武人)으로서 능력이 뛰어나 아버지로부터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며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특별 관직(官職)을 받기도 했다.
당나라는 한반도 내륙 신라까지 해로(海路)를 통해 수십만의 군사력(軍事力)을 투사(投射)하며 고구려를 무너트린 군사강국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는 지방군벌(地方軍閥)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멸망한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등 지역군벌(地域軍閥)의 크고 작은 반란으로 인하여 국력이 쇠약해졌다.
따라서 당나라의 뒤를 이은 송(宋)나라는 문치(文治)를 표방하며 황제의 직접 통제 아래 중앙군(中央軍)을 운용한다. 그 시대 중앙군이 80만이 넘어가는 강병임에도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안보를 구걸(求乞)하는 문약(文弱)한 나라였다.
거란전쟁(契丹戰爭)에서 승리한 후 송나라를 방문한 고려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운하를 파고 화려한 영빈관을 지어 환대했다. 그러나 고려 사신의 막무가내(莫無可奈)로 횡포(橫暴)를 부렸고, 관리를 두들겨 패고 황제에 결례를 저지르는 등 갑질을 한다. 또한 무리한 재물 요구에 응(應)해야 했으며, 무역에서도 송나라는 시세보다 몇배의 값을 처주고 고려 물품을 사들여야 했고, 송나라 물품은 시세보다 몇분의 일에 불과한 값으로 팔아 송나라는 막대한 무역적자(貿易赤字)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시대 그토록 무지몽매(無知蒙昧)하게 추앙(推仰)한 소동파는 고려의 횡포에 질려 ”고려의 공물은 허접한 물건인데 반해 송나라가 지출하는 경비는 백성들의 고혈이라며“ 고려와 상종도 하지 말것으로 7번이 상소문을 올렸으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려의 심기(心氣)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요(遼)나라와 금(金)나라, 송나라 사이에서 고려가 군사적(軍事的) 세력균형(勢力均衡, balance of power)을 잡고 있었다,
송나라는 동네북이 되어 오나 가나 두들겨 맞으며 요나라와 금나라에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다. 입만 살아 있는 나약한 선비들의 망상(妄想)은 냉혹(冷酷)한 국제관계(國制秩序)에서 돈 주고 평화를 살 수 있다고 생각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죽도록 두들겨 맞는 아픔만 커졌고, 급기야 중원 지역을 잃고 양쯔 강 이남으로 쫒겨나 남송(南宋)시대를 열었다.
강성해진 거란족과 여진족, 몽골족 등의 북방유목민족에게 처절하리만치 두들겨 맞고, 굴욕외교(屈辱外交)에 시달린 문명인(文明人) 한족(漢族)은 자존심(自尊心)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문치(文治)를 표방한 송(宋)나라는 훈고학(訓詁學)을 국가이념(國家理念)으로 삼아 사대부(士大夫)의 나라 선비의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원시유학(元始儒學)은 전쟁이 일상(日常)이었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출세지향(出世指向)적 처세학(處世學)에 불과한 태생적(胎生的)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국가통치(國家統治)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아젠다를 제시 할 학문적 실용성(實用性)도 없었다. 또한, 인간 삶의 내면(內面)과 불안(不安)을 달래고, 국가통합(國家統合)의 철학적(哲學的) 가치를 제시할 능력도 되지 못했다.
따라서 송대(宋代)에 들어서 유가(儒家)는 변신을 시도한다. 천년 동안 죽은 공자 어록 파먹은 훈고학(訓詁學)은 마이너 리그에서 벗어나 메이저리거를 꿈꾸며 복고주의문헌학(復古主義文獻學)을 집어 던진다.
북송오자(北宋五子)로 불리는 주돈이, 정이 등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도교(道敎), 불교(佛敎)에서 관념의 차용을 통하여 태극도(太極圖)와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등의 이론적 토대가 만들었다. 도교와 불교의 관념을 가져다 쓴 것을 관념차용((觀念借用)으로 볼 것인지 표절(剽竊)로 볼것인지 융화(隆化)로 볼 것인지 변질(變質)로 생각할 것인지 시간의 무게 앞에 의미 없는 일이다. 좋게 생각해서 관념차용과 융화로 생각하자.
여튼, 개인적으로 태극(太極), 기(氣), 음양(陰陽)은 도교적(道敎的) 냄새가 많이 나고 그쪽으로부터의 관념차용으로 생각된다. 본질, 원리, 원칙 등을 의미하는 리(理)의 관념은 불교의 화엄경(華嚴經)에서 관념차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불가(佛家)의 화엄경(華嚴經)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대표하는 경전이다. 화엄경은 부처의 깨달음의 내용을 담은 경전(經典)으로 매우 난해(難解)하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다). 부처의 입적(入寂, 죽음) 후 인격적인 부처를 상징하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별개의 부처를 형상화 한다. 다양한 부처가 형상화 되고 그 중 하나가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다. 부처가 깨달은 진리를 신체화(身體化) 하여 영원불멸한 존재, 법신(法身)으로 형상화한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석가의 입적 후 약800년경으로 추정 되는 때 비로자나불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창안한 나가르쥬나(龍樹菩薩)에 의해 힌두교의 3대주신 중 하나인 비슈누를 형상화(形象化)한 것으로 보인다. 비슈누는 우주를 유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 널리 퍼져 꽉 차있으며, 우주적 존재의 원인이자 우주를 하나로 유지하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힌두교에서는 부처를 비슈누의 8번째 화신(化神)으로 흡수(吸收)하여 부처는 비슈누이고 비슈누는 부처이다.
화엄경은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法身佛)이 하나가 되면서 시작하며, 비로자나불은 허공과 같이 끝없이 크고 넓어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득 차 있는 비슈누처럼 상징되고 있다. 즉, 우주를 총괄하며 불가의 진리(眞理) 즉, 근원(根源), 원칙(原則), 원리(原理), 법칙(法則)을 상징하는 것이다. 주자학의 리(理)의 개념과 같다.
나가르쥬나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창안하며 힌두 주신(主神) 비슈누를 부처의 신격(神格)에 흡수하여 비로자나불로 대중 앞에 선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인간 본연(本然)의 근원적 불안(不安)을 비로자나불을 통해 대중을 위로 하는 것이며 대중 앞에 선 비로자나불은 부파불교의 개인적 해탈(解脫)을 벗어나 대승불교로서 누구나 사회적 해탈에 동참할 수 있는 대중화(大衆化)를 의미함이다.
공자(孔子)의 하늘 외에는 존재론적(存在論的) 또는 초월적 문제를 설명 할 수 없었다.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주자학은 불교로부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관념차용(觀念借用)하여 리(理)를 흡수(吸收)함으로서 윤리학(倫理學)의 한계를 벗고,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세계를 만들며 인간 사상을 지배하려는 종교적 카리스마(Charisma)를 얻은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