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자체》스쳐가기
폭염의 무더위이다. 곳곳에서 전쟁과 자연재해로 고통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하는 그림일까( 롬8:22) 칸트의 <물자체론>을 살피면서 더위를 좀 피해 볼 수 있을까? 칸트의 <물자체>이론은 이해하기가 좀 딱딱한 편인데 독어로는 Ding an Sich 이고 한자로는 물자체物自體 또는 사물자체事物自體로 옮긴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사물자체의 본질적 실체를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감각과 인식구조를 통해 나타난 <현상>이고 이 현상 뒤에 숨겨진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물자체>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직접 경험하거나 알 수 없으며 오직 존재를 추정할 뿐이다. 칸트는 이 물자체가 신神 영혼靈魂 자유自由 같은 개념과 관련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들을 경험과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필수 개념이 된다. 이렇게 이 물자체는 우리가 인식 불가능한 사물의 본질인 것이다.
칸트의 경우 우리 인식은 현상계에 국한 돼 있고 우리는 이 현상을 통해서만 사물을 인식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대상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게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구조가 대상을 파악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을 파악하는 인식의 틀에 따라 파악된 것이 사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은 현상일 뿐 현상을 이루는 본질은 아닌 것이 된다. 칸트는 이 현상을 이루는 토대를 <물자체>라고 이름 해 본 것이고 이 현상 넘어의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고 추정만 할따름이라고 한계 짓는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회의론懷疑論skepticism을 펼치고 있다. 이런 주장이 신학에 영향을 미쳐 종교다원론 또는 신학적 자유주의의를 낳게 한다. 한편, 기독교적 환경에서 살아온 탓일까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없다고 보았으면서도 도덕적 행위와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神의 개념이 필요하다며 소위 요청적 신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영혼의 불멸도 인간이 죽은 후에도 도덕적 책임이 지속된다고 믿기 위해 상정된 주제이다.
한편 헤겔은 칸트의 물자체를 초월적인 것이 아닌 현실세계에 내재하는 것으로 재해석 한다. 그는 물자체가 인간의 인식과 경험서 완전 분리된 게 아니고 현실화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 것이 변증법적 과정으로 현실화 한다고 보면서 인식과 현실의 분리를 부정하고 모든 실체가 인간 이성과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해될 수있다고 주장한다. 즉 헤겔은 물자체를 역사적인 이성적 과정을 통해 현실에 실현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의지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물자체가 초월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지가 물자체>라고 한다. 그는 모든 동식물 생명 없는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의지 현상>이 있다고 본다. 그는 <칸트의 물자체가 인간의 의지(will)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내면에서 물자체에 접근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우리 내면의 의지와 자연 현상의 본질인 의지가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칸트와 동시대의 셸링Schelling은 칸트의 물자체 개념이 불필요하다면서 자연과 정신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그는 자연자체가 곧 절대적인 실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며 자연을 단순히 물질적 세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표현>으로 이해 한다. 자연과 정신을 분리된 것 아닌,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자연 자체를 정신의 할동>으로 보면서 칸트의 주관과 객관 ,현상과 물자체의 구분을 넘어 <동일성철학>을 제시한다. 그는 주관과 객관이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다고 주장함으로 칸트의 인식론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상 <물자체> 에 대한 스케치를 해봤는데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전모를 파악할 수가 없는 신비 그 자체이다. 이 신비 자체에 근접하고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길은 존재세계의 원인자요 설계자이시며 세계를 제작해 내신 분의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이성의 단독 작업으로는 신비에 다가 갈 수 없다. 칸트는 물자체라는 어려운 말로 사람들 고생시킬 게 아니라 다이렉트로 성경계시에 올인 했어야 했다. 이 물자체론은 성경신앙을 버린 고독한 영혼의 불완전한 추론일 것이다. 성경은 물자체니 그런 것 없이 만유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의지, 섭리적 경륜이 포괄적으로 담겨있다. 헤겔의 물자체가 현실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전개되는 양 하는 설명이나 셸링의 동일성철학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만유의지론도 그냥 추정일 뿐이고 이성의 한계 안에서 노는 방랑일 뿐이다.
철학들은 그 자체로서 이성의 산물이기에 이성의 죄성과 불완전성, 인식과 판단능력의 한계 등에 속박된다. 이성의 한계를 고려치 않은 이성주의적 사유는 오류에 개방될 수밖에 없다. 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는 보고 참고는 하지만 철학이야말로 신학의 지배를 받고 신학적 결론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존재세계는 이 세계를 설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답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철학은 신학의 시녀요 도구의 위치여야 한다. 세상학문의 정수인 철학이 신학을 들이 받거나 헷갈리게 만들면 답이 없게 된다. 키엘케고르 후 130년간 철학이 신학을 들이 받고 도리어 지배하려는 데까지 왔고 니체Nitche에게서 그 발광의 정점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세계의 주체가 아니다. 피조체이고 지구에 내던져진 피곤한 실존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아닌한 인간실존과 자연세계는 길 잃고 방황하며 쥐엄열매로 연명하는 탕자 신세일 뿐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48:1)
2024.8.14.안티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