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의 변증법
비판批判이란 한자로만 보면 비교하고 판단한다는 정도의 의미인데 그렇지 않다. 비판이야말로 좋은 기능을 가진 우리 생활의 필수적 보약일 수 있다. 비판을 비난非難이나 모함謀陷같은 부정적인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비판critique,criticism은 정신 기능에서 중요한 몫을 커버 한다.물론 비판이나 비평을 할 때 부정적 내용을 발굴해 내고 이를 드러낼 경우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상이 가진 한계와 부정성을 발굴하고 온전케 하자는 과정인 것이다.
우선 비판은 인간 정신 기능 중 이성이 작업하는 콘텐츠다. 이성은 감정의 간섭을 배제하고 대상이나 사물의 현상이나 본질 속성 등을 파악하고 평가한다. 비판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인식능력의 한계 등을 전제한 기능이다 인간정신이 완전하고 오류가 없다면 비판은 필요 없다. 존재 그 자체로서 충족적일 것이다. 결국 비판은 인간자신의 불완전성과 인식과 판단능력의 한계 등을 보완하기 위한 기능이다. 우선 비판은 대상이나 사물의 본질을 탐색한다. 현상現像phenomenon 너머의 본질本質을 보려한다. 현상은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며 과정적이기 때문에 비판정신은 현상을 이루는 본질에 주목하는 기능이다.
또 비판은 대상의 한계를 찾아낸다. 모든 존재는 완전하거나 불변한 것이 아니기에 그 대상이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의 한계를 드러내야 한다. Kant는 인간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하는데 올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비판정신은 자신의 이성까지도 비판해 본다. 다음으로 비판은 특수를 보편에 넣어보는 작업이다. 특수한 개인이나 개별자를 그 종의 보편에 넣어본다. 예로 전광훈은 목사다. 그럼 전광훈을 목사일반의 보편 속에 넣어 보는 것이다. 물론 보편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만 특수나 개별체를 인식하는데 그 종의 보편에 대입해 보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랬을 때 그 개별자 또는 특수가 지닌 특성이나 보편과의 관계에서의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아무리 개인적 역량이 특별해도 그가 존재하는 사회적 환경이나 여러 조건들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 전씨가 목사라면 목사라는 보편개념에 그를 대입해 볼 수 있다. 목사 일반은 어떤 경우나 하나님을 죽이겠단 말 못한다. 예배를 쎅스라고 못한다. 심지어 오르가즘해야한다는 특수는 목사일반 그리고 기독교인의 보편과 공존불가의 사태다.
여기에 비판이 따르고 견제가 요구됨은 당연한 것이다. 전씨가 아주 외인이면 모르지만 기독교회의 목사임을 자임하고 있으며 그 기독교계를 이용해 자기일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교계로부터 비판적 평가가 있게 마련이다. 앞서 말했듯이 비판의 단계는 처벌이나 규제 이전의 성찰의 단계인 것이다. 고쳐서 온전함을 이루자는 변증법적 안티테제의 과정인 것이다. 이것을 단순한 감정으로 받아 전씨 없으면 나라 망할 것처럼 불안해 하는 건 사고트레이닝의 결핍이거나 감정일변도의 자아가 보이는 단순성일 것이다.
비판은 본질을 규명하고 한계를 미리 드러내 서로 약한 부분을 보완하고 온전함을 이뤄 신테제(대립의 통합단계)로 가자는 것이다. 인간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인 것이다. 비판이 가능한 사회는 열린사회이고 비판이 허용 되지 않는 사회는 닫힌, 즉 독재나 이단사이비교 또는 야만의 필드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마다 선진사화가 된 것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불완전한 존재인 것을 전제하고 서로 논의하고 비판하는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달하고 개방적 논의가 열린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보이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건 함께 야만사회로 가자는 격이다.
전씨의 애국운동 자체를 하지말라고 하거나 터부시 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드러낸 모습으로의 지속은 대형 사고를 내거나 교주우상주의가 돼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성찰을 하고 문제들을 시정해 건강한 애국을 하자는 것이다.
이대로 전씨 혼자 고성 지르고 돈을 마구 뿌려대는 일과 헛된 망상의 말을 지속해서는 롱런할 수가 없다. 큰 부작용을 내 오히려 우파 애국 세력을 허무하게 만들 수 있기에 하는 비판적 조언인 것이다.
그는 전국 수천수백개 마을마다에 교회당 짓겠다고 했고 기독청 교민청 할 것 없이 수많은 약속을 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일에 목숨 건다고 한다. 그럼 전국은 아니라도 예배당 한 두개라도 짓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기독청 짓는다고 큰 헌금 들어온다고 자랑자랑 한 게 몇년 경과했나? 주옥순 권사 남편이 건축위원장이라는데 뭐하길래 건축 설계도 못하고 있나?
이런 허언虛言과 괴성怪聲을 듣고도 그냥 아멘!만 하는 영혼들은 이성 실종의 문턱을 밟고 있을지 모른다. Hegel이 말했듯 이성적인 것이라야 현실적인 것이다. 전씨를 맹목 비호만 하는 건 전씨를 위한 게 아니고 그를 사이비교주로 만들어 전락시키는 도우미 노릇하는 것이다. 그를 정 도우려면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면서 비판적 시각으로 돕든지 해야 한다.
목회자는 이단의 역사를 공부해서 그 분야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도들이 단지 나타난 현상에 열광하는 것과는 다른 본질적 평가를 하게 된다. 자기 본교회 목사님들의 조언을 듣는 게 현명하다. 전광훈교는 그동안 전씨만 목사고 다른 목사들은 모두 삯꾼이라는 아주 야비한 썰을 풀어놔 애국운동한다고 나선 교인들이 본교회와 자기 목회자를 우습게 아는 병이 들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나쁜 결과를 예방하는데 비판이야말로 필요한 가치일 수밖에 없다.
안티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