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받드는 효 잔치를 한 다더니 ? ? ?
이 재 명의 고향 ? 이라는 쌍 놈의 동네 안동에서 나고 자란 필명 안동 촌 노[安東村勞]김 성 복 이가 팔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오늘 같은 망신은 당해본 적은 처음이다. 독자 님들도 잘 아시겠지만, 안동 촌 노 김 성 복 이는 퇴계 이황 선생님과 임진왜란 7 년 전쟁 당시 국 운이 기울어 갈 적에 나라를 구하신, 서애 류 성 룡 선생님 같은 대학 자와 명 재 상이 출생하신 명색이 양반의 고장이고, 충효 열사의 고장인 안동에서 팔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마을과 지역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일편단심 오직 충 과 효 로서 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안동의 고장을 빛내기 위해서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소 시 적부터 나를 뒤로 하고, 남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다.
지금 땅 한 평 없는 최하위의 계층에서 비록 살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 많은 늘 억만장자로 살고 있다. 남이 어려울 적에 나의 몸을 아끼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을 마다 않고 나는 혼신을 다하여 지역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봉사를 해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수신 재가 치국 평 천 하 하라고, 옛 어른들이 말씀 하 였 듯이 김 성 복 이는 어릴 적부터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알고 살아왔고, 육 형제의 가장 막내로 태어나서 최종 학력이 송현 초등학교 12 회 육 학년의 졸업장이 공교육의 전부이다. 그리고 낯에는 노가 다 막 노 동부터 시작해서 농사일과 온갖 힘들고 어렵고 남들이 기피 하는
삼 디 업종도 마다 않고 온갖 직업을 수십 개나 거친 사람이다.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서 낯에는 열심히 노동을 하고, 밤에는 주경야독을 하면서 독학으로 검정고시까지 공부를 한 사람이다. 그래서 팔순이 된 지금에도 나는 학생들이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학교를 등 하교 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어린 그 시절이 그립고 원망스러울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의 운명인 것을 어찌 하 랴 ! 나는 열 네 살부터 노 무 현 에게 교통사고를 당하던 그날까지 잠을 하루에 4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소원은 오직 잠을 실 컨, 자 보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자고 싶은 대로 자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사니, 젊을 적의 소망 하나는 이루어진 셈이다. 또 한 가지 소원은 남들처럼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직접 책 한 권을 내 이름으로 내어 보는 것이 2 차 소원이었다. 그런데, 이제 팔십 년이란 세월을 살고 보니 나의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 셈이다. 잠도 자고 싶은 대로 자고, 먹는 것도 쌀밥에 고 깃 국을 배부르게 먹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나의 이름이 쓰여 진 책도 열여섯 권이나 출판사에서 출판을 했고, 아직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수백 권의 책을 집필할 원고까지 나의 컴퓨터에 입력이 되었으니 이제 안동 촌 노
김 성 복의 소원은 다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나의 글을 좋아하시는 독자 님들도 수십 만이 계시니, 그래도 팔십 평생을 헛되이 살아오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성질 머리가 고약해서 흠이지만, 그것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욱하는 성질 때문에 항상 나의 뒤에서는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자유민주대한민국의 유명 언론사에 최고의 논객들이 모여서 글을 쓰는 곳에 꼽사리 끼워져서 그분들과 격의 없는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체육 역학 모든 학술 적 토론에서 아직 그 누구와 토론을 하면서 단 한번도 밀려 본 적은 없지만, 때로는 곧은 나무가 바람에 쉬 이 부러진다는 옛 속담처럼
내가 반듯이 고쳐야 할 단점인 것은 안다. 그러나 특히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하면 그 사람이 국가 통 수 권 자라도 이놈 ! 저놈 ! 하고 소 세 끼 개 세 끼 같은 쌍 욕을 서슴없이 할 적도 있다. 노 무 현 이란 정치인을 좋아 한다면서 그를 보수의 성지라는 안동에서 빨갱이 소릴 들어가면서, 노 무 현을 지지하는 외곽 노 사 모를 만들고,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올 적에 혼신을 다해서 그를 선거 운동한 사람이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정치를 하고 서민들을 뭉개는 정치를 하자, 나는 청와대 정문 앞에서 내가 직접 쓴, 사 행 시 에이 쓰리 용지 2 만 장을 서울 시민들에게 일일이 나의 손으로 나누어 주고,
노 무 현 퇴진 운동까지 벌이면서 일인 시위를 한 사람이고, 대학로 마로 니에 공원에서 한 미 에 프 티 결사반대 시위 당시에 전국의 좌파 들 35 만 명이 모인 곳에서 8 분 동안 기조 연설까지 한 사람이다. 그래서 노 무 현 과 문 재인 에게 밉게 보여서 저들의 계획적인 위장 교통사고 테러로 육신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열 한번이나 수술대에 올라가서 사 경을 헤 메었고, 18 년 세월 동안 희귀 난치성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이란 고질병에 걸려서 폐인 같이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정신 만은 옛날 그대로 이다. 나는 안동 농협을 53 년 전, 설립 할 적에 안동시 청소년 책임 지도자로서 처음 참여한 창립 원로 조합원이다.
그 당시 나와 같이 참여한 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유일하게 나 혼자 남아 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안동 조합에서 오늘 6, 8 일 오전 10 시 30 분에 안동 탈춤 축제 장에서 조합원 경노 잔치를 한다고 연락이 왔었고, 버스로 태워 준다 하기에 나는 나의 교통 수단인 오토바이를 타고, 행사장에 참석한다고 대답을 하고 행사장에 시간 맞추어서 오전 10 시 25 분에 현장을 도착해보니 내가 알던 친구들은 거의 없고, 모두가 낯이 선 조합원 뿐이었다. 수천 명이 모인 행사장에 지팡이라도 짚고 참석하는 것이 예의이고, 우리 농협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 행사 요원들의 안내로
1 부 행사장에 참석했는데, 경 노 잔치에 무슨 놈의 정치인과 조합 간부들은 그렇게 많이 참석하고 그들을 일일이 소개를 하고 하는 대만, 무려 한 시간이 훌 적 지나갔다. 그리고 점심은 행사장 밖 운동장에서 텐트를 치고서 먹게 되었는데, 한 달 간 행사를 준비했다는 행사장에 사람이 앉아서 밥을 먹을 자리조차 충분하지 못해서 일부 사람들은 점심 식사도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는 분도 있었고, 나는 점심 먹을 자리를 몇 바퀴 돌면서 찾았으나 모든 텐트마다 꽉 차서 앉을 자리가 없어 행사 직원들 보고서 몇 마디 싫은 소릴 하고 그냥 집으로 왔다. 수억 원의 행사 비가 지출되는 행사장에 그것도 한 달 간이나 참석 인원까지 점검을 했음에도
점심 먹을 자리까지 없을 정도로 행사 진행을 했다는 것은 조합 장의 책임이 백 퍼센트라는 것이다. 효[孝]잔치라고 이름을 붙였으면 정치인들이나 기관장들이 오히려 나이 많은 노인들을 잘 모셔야 할 것임에도 내 빈 석이라고 하는 텐트에는 한가하게 앉아서 시장이니, 조합 장이니 유관 기관장이니 국회의원이니 하는 자들이 거만하게 저들은 식사를 배불리 먹고 희 희 덕 거리면서 정작 대접을 받아야 할 원로 조합원들은 찬 밥 신세가 되었다는 것은 안동 농협의 임직원들은 정신 차려야 할 것이다. 오늘의 자리는 우리들의 자리이지, 시장이나 국회의원 시의원들의 경노[敬老]잔치가 아니란 말이다.
그것도 전국의 최우수 농협이란 타이틀을 수 년 간 획득한 안동 농협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다른 곳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 정치인들은 썩어 문 들어 졌어도 우리 농민들은 초지일관 농 심[農心]을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안동 농협은 앞으로 효 잔치라는 행사는 다시 하지 말라 ! 차라리 그 돈으로 불우한 시민들을 보살펴 드려 라 ! 경노 잔치 행사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조합이 전국에 최우수 농협이라고 으시 되는 꼴이 정말 한심스럽구나 ! 그래서 이 재 명 같은 개 잡 놈이 안동이 고향이 아닌 대도 안동이 고향이라고 해도 입들을 쳐 닫고 있는 가 ? 이 머저리 같은 놈 들 아 !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