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보리에 대한 칸트의 평가
서양사에서 신비경험으로 특별한 명성을 얻는 스웨덴보리Swedenborg(스웨덴보그라는 등 발음이 몇 개 됨)는 1688년 출생하고 1722년에 사망하여 임마누엘 칸트의 1724년-1804년과 겹쳐 같은 시대를 일부 공유한다. 두 분이 교류가 있었다는 정보는 없는 것 같지만(칸트가 편지는 보냈었지만 답이 없었음) 칸트가 스웨덴보리의 사상과 행적에 호기심을 갖고 봤으며 비평도 한 점에서 계몽주의의 정점이요 이성주의인 칸트가 초월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생 후반부를 모두 소진했던 스웨덴보리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는 관심사항이다. 알려진 대로 칸트는 인간의 지식은 감성이 접촉 가능한 현상계에 국한되고 초월의 세계는 지식의 대상일 수 없다는 일종의 초월영역 불가지론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스텐스였다. 생각으로는 상상이 가능하지만 우리의 인식세계에 올 수 없는 세계를 물자체(Ding an Sich)라고 해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등이 그 물자체이며 우리의 이성으로는 신이나 영혼불멸을 인정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성의 이율배반이란 한계에 봉착된다.
김진교수의 『칸트와 종교』에는 한 채프터를 이 문제에 할애하고 있다. 이를 참고해 보면서 소견을 말해 보고자 한다. 칸트는 1776년에 『시령자의 꿈』을 쓴다. 칸트는 영혼이나 영의세계 같은 초월적 이념들에 대한 감성적 직관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이 책에서 초월적 세계에 대한 스웨덴보리의 경험적 진술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독단적 형이상학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어떤 초월적 체험 같은 것을 도덕적 실천의 차원에서 그 가치를 좀 인정 하려할까 도덕적 가치가 제외된 초월의 체험은 무가치하다는 주의에 가깝다. 어떤 사람이 경험한 주관적 감정이나 지식이 어떻게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나 하는 것은 난제에 속한다. 또 꼭 객관화(보편화) 해야 참된 지식인가 하는 문제도 따른다. 객관성이 없어도 체험한 자의 주관에는 분명한 지식으로 자리 잡혔을 수 있다. 인간의 인식구조는 보편성격이 있으면서 또한 주관적 독단 가능성에 개방 된다. 우리의 의지를 보편적 의지와 일치하도록 강요하는 우리 내면의 느낌을 칸트는 도덕감道德感이라고 불렀다. ‘보편적 의지의 규칙에 대한 감정’으로서의 도덕감은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칸트는 그의 1766년 『시령자의 꿈』에서 스웨덴보리를 비판함으로써 초월적인 이념들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독단적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동시에 초월적인 영성의 의미를 도덕적 맥락에서만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그는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를 호기심 갖고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규정하고 철저 논박한다. 물론 칸트는 영혼의 보고와 같은 스웨덴보리의 이야기가 비록 이성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불합리함, 망상, 불가해함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험들이 어떤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당연할 것이다 초월의 세계를 이성의 한계 내에서만 규정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칸트는 『시령자의 꿈』에서 스웨덴보리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중 하나는 초월적인 영적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스웨덴보리를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세계를 경험적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스웨덴보리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 또한 이성의 이율배반을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칸트는 초월적 세계와의 접촉이나 경험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직 도덕적 차원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는 주의다. 우선 칸트는 그 자신은 영혼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지 못하며 더군다나 영혼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털어 놓는다(시령자의 꿈 A8, 11 320) 이런 점으로 봐 칸트는 기독교신앙의 본류는 아닌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구원 받은 성도라면 영혼의 실체성과 영생천국의 소망을 잃지 않는다. 이성은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는 한 영적세계와는 단절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칸트는 인간에게서 이성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생기를 주는 것은 영혼이라고 한 모순적 말을 하고 있다. 영혼 존재를 의심 하면서도 거부할 수만도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면서 칸트는 영혼을 “물질로 가득 찬 공간들 속에 현존할 수 있는 비물질적 존재immaterielles Wesen”라고 불렀다.(시령A12-13,11 321)
칸트는 인간의 영혼은 신체 속에 존재한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그 영혼은 물질적 세계에 속하는 동시에 비물질적 세계에도 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은 이미 두 개의 세계와 동시에 관계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존재됨을 위해 신체와 결합하고 있는 한에서 물질적인 것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영적 존재세계의 한 구성원으로서 비물질적 차원의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니까 영혼은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에서는 물리적 세계에 속하지만 동시에 영적 세계의 비물질적 본성들과 불가분적으로 결합하는 공동체 안에 있다. 칸트는 스웨덴보리가 단지 모든 시령자들 가운데서 최고의 시령자Erzgeisterseher이며 모든 광신자들 가운데 최고의 광신자Erzphantast이며 그런 망상들 속에서 참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규정하면서(시령A84,11354)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를 매우 회의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김진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칸트가 초기에는 스웨덴보리의 사상에 경도됐었는데 흄(Hume, David1711-1776)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를 가져왔고 결국 『시령자의 꿈』을 통해 스웨덴보리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칸트는 기존의 모든 가능한 신 존재증명을 거부하고 도덕신학적 논증만이 유일하게 가능하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스웨덴보리를 대표로 하는 신비주의자와 영지주의자 또는 여러 형이상학자들이 추구하는 철학적 방법들이 자의적이고 주관적이어서 뜬구름 잡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 김진교수의 관련 글을 참고 해봤는데 칸트는 스웨덴보리에게 관심했으나(어떤 이들은 칸트에게 스웨덴 보리의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유형의 독단적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 영혼이나 영적 존재 같은 초월적 이념들은 감성적 직관이 불가능하고, 오직 도덕적 실천의 차원에서 지성적 직관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스웨덴보리의 영적 경험이나 진술들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칸트의 회의론이랄까 신존재증명 불가지론이나 도덕적 가치 면에서만 신존재를 요청하려는 모호함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도는 성령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화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에 신존재의 회의懷疑 같은 게 없다. 정상적 신앙의 사람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을 경우 말이다.
그리고 칸트의 도덕신앙은 초점에서 비켜간 이론이다. 도덕완성이 인간존재 목적일 수 없다. 완성된 인격이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되신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도덕은 성령의 열매이고 신앙행위에서 따라오는 결과물일 뿐이지 그게 인생 목적이거나 도덕 추구를 통해 신인식神認識을 하는 것 아니다. 교회 신학에서 볼 때 칸트의 요청적 유신론이나 도덕추구의 종교는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없는 희망의 논리일 뿐이다.
칸트의 신비주의에 대한 태도 또한 이성론자의 불완전한 맨트일 뿐이다. 독단적 형이상학이라고 규정하는 영적 경험들 속에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세계와의 접촉가능성이 열려 있다. 물론 유한한 이성으로가 아닌 성령의 감화하심과 지혜주심에 대한 인식, 즉 성령 안에서의 인식인 것이다. 물론 칸트가 지적하는 대로 영적 경험 중에는 터무니없는 것이나 악한 영에 이끌린 것들이 있을 수 있다.그런가 하면 건전하고 교리에 부합한 깊은 체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영적 경험들을 모두 객관 ,보편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앙행위란 하나님과의 심오한 대화요 교제이기 때문에 밖의 세상에 공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과 교회 교리에 부합한 신비 체험은 언제나 개방된다. 칸트의 기독교관은 인본주의와 회의론 그리고 다원주의를 조장하는 오류일 수 있다.
2024.5.30.안티다원